템빨 23권 - 16화
[검귀 이야루그트를 소환합니다!!]
쿠르르르릉!!
그리드가 스킬을 사용함과 동시에 이야루그트가 천둥처럼 포효했다.
혈빛의 마기를 사방으로 방출하며 날뛰는 녀석을 그리드가 놓치고 말았다.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그리드의 근력으로도 붙잡아둘 수 없는!
“크윽…! 이 괘씸한 놈이!!”
툭하면 주인하고 맞먹으려든다.
언제 한 번 제대로 날 잡아서 교육시켜야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를 가는 그리드를 버려두고 하늘 위로 떠오른 이야루그트.
블러드 스톤으로 제련되어 반투명한 붉은 빛깔을 띄우던 그것이 칠흑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밤보다 더 짙은 완연한 어둠이었다.
“아름다워…”
유페미나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었다.
새카만 이야루그트의 검신에 금색의 고대문자들이 휘갈겨지는 광경이 너무나도 신비롭고 아름다웠던 까닭이다.
그리드와 라우엘, 심지어 수인족 왕 맥스옹조차도 그에 시선을 사로잡혔다.
고오오오오-
이야루그트는 더 이상 요동치지 않았다. 방출하던 혈빛의 마기 또한 모조리 갈무리하며 고요해졌다.
“…”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흐른다.
찰나이나 영원 같다.
파아앗-!
정적이 깨졌다.
이야루그트로부터 붉은 구슬 하나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지옥제일 검사, 검귀, 검마, 대악마 제파르의 유일한 적수 등등.
살아생전 온갖 광오한 수식어로 치장되었던 이야루그트의 영혼이 세상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호오라… 저건 대단하군.’
그리드의 몸속에 잠들어있던 브라함이 깨어나 감탄했다.
단순히 흥미를 보이는 수준이 아닌 감탄 말이다.
스스로를 지고한 존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브라함이 감탄할 정도면 대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 걸까?
그리드가 기대하고, 한편으로는 불안해하는 그때.
우주의 별빛처럼 영롱한 빛을 내뿜던 이야루그트의 영혼이 차츰 변화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형상을 갖추어나갔다.
허리 굽은 노인이었다.
크르르…
혈빛의 마기를 타오르는 불꽃처럼 전신에 두른 노인.
이마에 날카롭게 솟은 외뿔과 근육처럼 툭 튀어나온 눈두덩이, 그리고 새카만 홍채가 인상적인 이 백발의 노인이 바로 지옥제일 검사 이야루그트다.
마력을 타고나지 못한 하급 악마 출신.
오직 검술 하나만을 단련하여 대악마와도 호각을 겨뤘던 존재.
지옥의 유수한 권력자 마르바스로부터 ‘대악마들의 서열을 바꿀 수 있는 자’라는 평가를 받았던 그가.
“…감미롭다.”
3백년 만에 숨을 쉬었다.
달콤한 공기를 폐부 깊숙이 넣으며 세포 하나하나를 일깨웠다.
***
“이럴 수가?”
수인족 왕 맥스옹이 깜짝 놀랐다.
건방진 인간 놈이 소환한 악마가 발산하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은 까닭이었다.
두려울 것 없이 군림해온 그에게 어렴풋이 위기감을 선사할 정도였다.
‘저게 바로 말로만 듣던 대악마인가?’
세이렌이 고립 된 왕국이라고는 하나 지옥과 마족에 대한 지식은 어느 정도 퍼져있었다.
특히 맥스옹은 국왕으로서 옅게나마 광범위한 지식을 쌓고 있었고, 악마에 대해서도 적당히 알고 있었다.
그가 봤을 때 이야루그트는 말로만 듣던 33인의 대악마 중 하나 같았다.
‘어떻게 인간이 대악마를 소환할 수 있는 거지? 인간과 마족은 서로 적대하는 관계가 아니던가?’
역시 옅은 지식이다.
맥스옹은 대악마의 진정한 힘을 몰랐을 뿐더러 인간과 마족이 종종 계약으로 묶이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허허…”
이야루그트를 대악마로 오해하고 너털웃음을 흘리는 맥스옹.
그가 그리드의 어깨 위에 앉아있는 검은 고양이와 그리드의 손목을 붙잡고 서있는 작은 인간 소녀를 번갈아 살펴보았다.
‘저것들 또한 마물…’
그것도 상당한 힘을 지닌 마물들이다.
지옥에나 있어야할 법한 존재들을 거느리다니, 그리드는 필시 평범한 인간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맥스옹은 그리드보다 다른 인간 사내가 더욱 더 신경이 쓰였다.
‘저 인간은 뭐지?’
자신과 비견되는 거구를 지닌 인간 남자.
맥스옹은 그리드가 소환한 4개의 존재 중 그 인간이 가장 크게 거슬렸다. 심지어 대악마보다 더 말이다.
이유야 간단했다.
“어째서 알몸이지?”
“…”
그렇다.
그리드가 소환한 인간 남자, 기사 쥬드는 알몸 상태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완벽한 근육을 자랑하는 나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꺄악!”
뒤늦게 쥬드의 물건을 목격한 유페미나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힐끔힐끔, 커다란 눈동자를 은근히 돌려서 감상은 계속했다.
“커…?”
그리드와 라우엘은 쥬드의 물건 크기가 비상식적으로 거대함에 당황하여 할 말을 잃었다.
잠시간의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왜 알몸이냐!!”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리드가 버럭 소리쳤다.
중요한 부위를 가릴 생각 않고 당당하게 서있던 쥬드의 답변은 간단했다.
“쥬드. 훈련 끝나고. 목욕.”
목욕 중에 소환에 응했다는 뜻이다.
“이런 황당한.”
게임을 너무 현실과 똑같이 만들어놓은 게 문제다.
NPC들 모두가 인간과 같은 감정을 지녔고 당연히 생활패턴도 비슷했다. 목욕은 일상이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불상사가 발생한 것이다.
“소환에 응하기 전에 무기랑 갑옷부터 챙기지 그랬어?”
“주군이. 부르셨으니까. 바로 온다.”
“그것 참 감동적인 충성심이구만.”
플레이어와 NPC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가 인벤토리의 유무다.
NPC들에게 인벤토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즉, 현재 알몸인 쥬드는 쉽게 말해서 노템 상태라는 뜻이다.
아무리 쥬드의 레벨이 300을 돌파하고 있을지언정 아이템 하나 없이 맨몸으로 무슨 힘을 발휘하겠는가?
‘이걸 어쩌지?’
도움이 되지 않는 건 둘째 치고, 자칫하다간 쥬드가 죽게 생겼다.
고스란히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쥬드를 그리드가 걱정하는 그때였다.
“악마. 죽인다.”
퍼억!!
쥬드가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을 날린 대상은 수인족 왕 맥스옹이 아니었다.
혈빛의 마기를 타오르는 불꽃처럼 몸에 두르고 있는 노인, 검귀 이야루그트였다.
아군인 줄 알았던 인간 놈에게 다짜고짜 면상을 얻어맞은 이야루그트가 치를 떨었다.
대악마 제파르와의 승부에서 패배하고 죽기 전까지, 지옥제일의 검사로서 명성이 높았던 나를 고작 인간 따위가, 그것도 실오라기 한 장 걸치지 않은 정신 나간 놈이 주먹으로 때리다니?
“두려움을 모르는구나.”
숨을 쉰다는 것.
족히 3백년 만이다.
무척이나 감미로워 만끽하고 싶었다.
하지만 흥이 깨져버렸다.
방해받은 분노를 살의로 승화시킨 이야루그트가 쥬드를 적으로 인식했다.
쿠오오오오오오-
마검 이야루그트가 자신의 본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검귀 이야루그트에게 감응하기 시작했다.
주인인 그리드는 무시하고 신속하게 날아가 이야루그트의 손에 쥐어졌다.
쥬드를 향해서 검을 휘두르려는 그를 그리드가 다급히 말렸다.
“멈춰!”
부질없는 외침이었다.
레전드리 등급으로 성장하면서 과거의 힘을 일부 되찾은 이야루그트의 자존감은 하늘을 찔렀다.
마족도 아닌 고작 인간에 불과한 그리드의 명령을 무조건적으로 따르지 않았다.
서걱!
“윽.”
만월을 그리는 혈빛 검광이 쥬드의 넓직한 가슴을 베어버렸다.
동시에 쥬드의 생명력 게이지가 40퍼센트 깎였다.
그리드가 화들짝 놀랐다.
‘평타 데미지가 무슨…!’
쥬드가 맨몸이라고는 하지만 기본 근력과 체력 스탯은 무척 높은 인물이다.
타고난 방어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한데 이야루그트가 단 일격에 그를 빈사상태 직전까지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평타로 말이다.
이는 +9실패작을 쥔 그리드도 못할 일이었다.
“쥬드. 아프다. 참는다. 죽인다. 악마.”
비틀비틀.
치명상을 입고도 쥬드는 겁먹은 기세가 없었다. 도리어 상처 입은 몸을 이끌고 이야루그트에게 달려들었다.
이야루그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5백 년을 살았고, 또 3백 년을 영혼으로 존재해왔으나 쥬드처럼 무식한 인간. 아니, 생명체를 그는 처음 보았다.
“겁 없는 놈…! 네놈은 목숨이 10개라도 되는 것이냐! 히드라조차도 내게는 함부로 덤비지 못했었다!”
일갈한 이야루그트가 백발을 흩날리며 재차 검을 휘둘렀다.
그리드가 제지하기에는 너무 빨랐다.
“쥬드!!”
쥬드의 목숨이 위험하다.
첫 번째 기사.
내가 병사들 중에서 직접 선별하여 육성했기 때문에 더욱 더 각별한 존재.
그를 두 눈 뜨고 잃게 생겼다. 그것도 아군에게!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발악적으로 소리치는 그리드의 외침을 들은 쥬드가 움찔, 자리에 멈췄다.
그러더니 비상식적인 궤적을 남기며 날아오는 검을 아무 생각 없이 맨 손으로 붙잡더니 빼앗아버렸다.
<나, 아무 생각 없다>패시브 스킬과 <무기 뺏기>스킬이 이상적으로 연계된 것이다.
“헉?”
이야루그트가 질색했다.
자신의 공격을 막거나 피하는 존재는 그래도 몇 번 봤었지만, 고작 맨 손으로 검을 빼앗아가는 놈은 또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검사인 내가 검을 빼앗기다니, 믿기지 않는 현실이다.
‘이놈이 사실은 엄청난 실렸자였구나!’
말투가 어눌하고 피아를 구분하지 못할뿐더러 알몸을 노출하고 다니기에 바보천치인 줄 알았더니 아니다.
경계하는 이야루그트와 멀뚱멀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쥬드의 사이로 그리드가 다가와 섰다.
“너희는 서로 적이 아니다. 지금부터 아군을 공격하는 자에겐 가차 없이 엄벌을 내리겠다.”
“감히 내게 명령을…”
이야루그트는 반발심을 표출하였으나.
“네.”
쥬드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 눈앞의 악마 노인과 싸우고 있었을까?
쥬드는 이미 까먹고 있었다.
최대 지력 20의 위엄이었다.
여기까지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수인족 왕 맥스옹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무슨 짓들이냐!!”
적을 앞에 두고 저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다니?
정녕 괘씸하다.
마음 같아서는 놈들이 한눈 팔고 있을 때 공격해 엄벌을 내리고 싶었지만, 그런 치사한 방법은 왕으로서 용납할 수 없었다.
“감히 왕을 능멸하다니! 정당한 죗값을 치러라!!”
쩌렁쩌렁!
또 한 번 <수인족 왕의 분노>를 전개한 맥스옹이 해일을 일으키며 돌진해왔다.
그와 동시였다.
쥬드를 노려보면서 이를 바득바득 갈던 이야루그트도, 덜렁덜렁 거리면서 멍하니 있던 쥬드도, 쥬드의 물건에 정신이 팔려있던 유페미나도, 어이없는 형국을 황당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라우엘도.
“우선 저 시끄러운 놈부터 조용히 만들도록 하지.”
“좋은 생각이에요.”
일제히 맥스옹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각자의 궁극기를 사용했다.
콰르릉!
라우엘이 불러일으킨 벼락이 물기에 젖어있는 맥스옹을 강타하여 맥스옹의 기세를 늦췄고, 이어서 유페미나의 목속성 마법이 맥스옹에게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혔다.
제1대 10인의 루키 중 정점을 찍었었던 라우엘, 그리고 최초의 에픽 전직자 유페미나.
이제는 심지어 템빨까지 갖추고 있는 이들의 합격은 맥스옹을 위협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맥스옹은 터프했고 싸움에 능숙했다.
몸 곳곳에 철갑처럼 두른 비늘을 활용하여 급소만큼은 보호한 그가 그대로 나아가 공격을 감행했다.
첫 번째 공격대상은 당연히 알몸의 인간 사내였다.
일대 다수의 전투.
제일 만만한 놈부터 확실하게 골라 처리해놓는 편이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잘못 된 판단이었다.
상대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쥬드가 보유하고 있는 고유 스킬 <나, 아무 생각 없다>의 등급은 무려 SS-이다.
대체 왜 저딴 스킬의 등급이 이리도 높은 걸까?
그리드조차도 이유를 몰랐었지만, 등급이 높다는 건 확실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뜻이 된다.
쥬드는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맥스옹의 공격에도 위축되지 않고 대응하였고, 이는 맥스옹의 예상을 깨뜨리는 판단이었다.
날아오는 물기둥을 피하기는커녕 정면으로 얻어맞고 돌파하여 손을 뻗어오는 쥬드의 손아귀에 얼굴을 부여 잡히고 말았다.
물론, 쥬드의 근력이 일개 병사 출신치고는 상식을 초월할 정도로 높아 2천대라고는 하지만 맥스옹을 위협할 수준은 아니었다.
맥스옹은 쥬드의 손에 얼굴을 붙잡히고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파리가 앉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문제는 시야가 가려졌다는 점에 있었다.
“지고의 검.”
푸우욱-!
빈틈을 노린 이야루그트가 쏘아낸 혈빛 섬광이 맥스옹의 심장을 관통했다.
심대한 데미지를 입은 맥스옹이 움찔거리면서 자세를 무너뜨렸고,
“냄새 좋다옹! 냥!!”
수인족 특유의 비린내에 심취한 노에가 행복한 표정으로 주둥이를 벌리더니 맥스옹을 집어삼켰다.
동시에 발동하는 <영혼 섭취>와 전이를 토대로 근력을 대폭 강화시킨 그리드와 그를 복제한 랜디가 동시에 연살(聯殺)을 전개했다.
“크아아아아아악!!”
맥스옹이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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