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3권 - 15화
“나는 세이렌의 왕이다. 내가 즉 바다다.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만물을 포용하고 또한 집어삼킬 수도 있다. 이런 내가 타인을… 그것도 인간을 섬긴다는 것은 이치에 맞질 않다.”
신장이 무려 2미터가 넘는 거인.
돌덩이처럼 솟은 어깨에 촘촘히 박혀있는 옥빛 비늘이 인상적인 수인족 왕, 맥스옹이 드디어 반응을 보였다.
딸을 잃은 이후 수년 동안 넋 나간 사람처럼 살아왔던 그가 처음으로 표정의 변화를 보이는 것이었다.
변화한 표정으로부터 엿볼 수 있는 감정은 단연코 분노였다.
“감히… 감히 왕에게 망발을 뱉다니… 그대는 바다의 무서움을 겪어보지 못했는가?”
콰아앙!!
도대체 얼마나 큰 진주를 깎아 만든 것일까?
인간들의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백옥의 옥좌를 깨어 부순 맥스옹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는 그 누구도 섬기지 않는다! 나야말로 받들어져야 할 유일무이한 존재다!!”
쩌렁쩌렁!
대전을 울리는 맥스옹의 목소리는 무시무시한 내력을 담고 있었다.
귀를 부여잡은 수인족 병사들이 쓰러지면서 피를 토했고, 유페미나와 라우엘 또한 휘청거렸다.
[맥스옹이 <수인족 왕의 분노>를 시전합니다.]
[선택받은 왕의 목소리에는 범인이 감당할 수 없는 위엄과 바다를 가르는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수속성 저항력이 50퍼센트 하락합니다!]
[내상을 입습니다!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소모합니다!]
[균형 감각이 손상되어 모든 속도가 20퍼센트 하락합니다!]
[스킬과 마법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20퍼센트 상승합니다!]
[상태이상 ‘공포’에 빠집니다!]
[상태이상 ‘혼란’에 빠집니다!]
[저항하였습니다.]
[해일이 밀려옵니다!!]
쿠와아아아아앙!!
맥스옹의 포효와 동시에 격동하기 시작한 일대의 마나가 해일로 변모하더니 그리드 일행을 덮쳤다.
일견하기에도 엄청난 위력이 담겨있었으므로 그리드는 긴장했다.
‘이렇게 강한 수속성 마법은 처음…!’
피할 수 없다.
대전 전체가 집어삼켜지게 생겼다.
이대로는 유페미나와 라우엘까지 위험하다.
‘내가 지킨다!’
성스러운 빛의 무구 세트로 스왑하고 갓 핸드를 소환한 그리드.
오래간만에 성스러운 빛의 방패까지 무장한 그가 유페미나와 라우엘의 앞으로 몸을 날리는 그때였다.
“뿌리 장막!”
유페미나가 목속성 S급 방어마법을 사용했다.
땅으로부터 솟구쳐 올라온 넝쿨들이 순식간에 장벽을 형성하였고, 이내 밀어닥쳐오는 해일을 흡수하더니 그것을 양분삼아 더욱 더 범위를 확대했다.
화려한 장식품들로 치장되어있던 왕의 대전이 순식간에 숲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와우… 상태이상을 저항했었어?”
“늘 만반의 준비를 하고 다니니까요. 최악의 사태는 미연에 방지함이 기본이죠.”
해일을 모조리 흡수해버리고 비대해진 넝쿨들의 틈새.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는 그리드에게 대꾸한 유페미나가 퀘스트를 공유해주었다.
[히든 퀘스트 <수인족 왕의 분노>가 생성됩니다!]
<수인족 왕의 분노>
★히든 퀘스트 <다가오는 멸망>의 히든 연계 퀘스트★(최대 5인까지 참가 가능)
맥스옹은 5년 전, 사랑하는 딸 오옹 공주를 잃은 후부터 쭉 시름에 잠겨있었습니다.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닫은 채 오옹 공주만을 그리워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극한의 분노로 인하여 그의 닫혔던 마음이 해방됩니다.
이성을 잃은 수인족 왕 맥스옹을 제압하십시오!
태어나 단 한 번도 패배해본 적이 없는 그에게 본때를 보여준다면, 그는 충격을 받고 각성할 것입니다. 오로지 과거만을 그리던 눈을 현실로 되돌려 현명한 왕이 될 수도 있습니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맥스옹의 생명력을 90퍼센트 감소시킨다.
퀘스트 실패 조건:맥스옹의 사망, 혹은 퀘스트 진행자의 전멸.
퀘스트 클리어 보상:맥스옹의 각성. 맥스옹의 은인이 됨. 세이렌의 발전 속도 상승.
‘히든 연계 퀘스트…!’
높은 자유도를 구사하는 Satisfy에서 퀘스트 분기점은 셀 수 없이 많다.
특정 퀘스트를 클리어한 후, 이후 행동에 따라서 연계 퀘스트를 얻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대부분의 연계 퀘스트는 높은 보상을 보장했다.
하물며 히든 퀘스트의 연계 퀘스트라면, 그 가치가 감히 헤아릴 수 없이 높을 것이었다.
“근데 보상이 맥스옹의 각성과 은인이 되는 거라니…? 어째 영 구린데?”
“맥스옹이 Satisfy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반증일 테죠. 어쩌면, 피아로님급의 네임드 NPC를 산하에 둘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겁니다.”
유페미나와 달리 상태이상에 걸렸다가 뒤늦게 회복한 라우엘이 입을 열었다.
“흔치않은 히든 연계 퀘스트입니다. 반드시 성공해야만 해요.”
하지만 어려울 것이다.
의도치 않게 발생시킨 이 히든 연계 퀘스트의 클리어 난이도는 라우엘이 여태까지 경험하고 들었던 그 어떤 퀘스트의 난이도보다 높을 것으로 추정됐다.
‘<다가오는 멸망>을 클리어한 퀘스트 진행자가 맥스옹의 심기를 건드려야만 발생하는 퀘스트…’
발동조건부터가 까다로운 퀘스트다.
NPC와 순수하게 감정을 교환하는 그리드였기에 발견할 수 있는 퀘스트였다.
‘난이도는 최악… 다가오는 멸망을 진행하면서 소모 된 전력으로 일국의 왕과 맞서 싸우라니, 말이 안 된다.’
현실에서 왕이란 무력이 강한 자를 뜻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Satisfy에서 왕이란 즉 네임드 NPC였고, 대부분의 네임드 NPC는 기본적으로 강했다.
물론 예외도 있었지만 맥스옹이 그 예외에 포함되리라는 기대는 접어두는 게 옳다.
하나의 종족을 대표하는 존재로서 상식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 그가 날린 선공은 무척이나 위협적이지 않았던가?
“이곳에 있는 사람이 제가 아니라 페이커님이셨다면 좋았을 텐데… 바깥에 있는 동료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피아로님과 아스모펠님을 불러들이시죠.”최선의 결과를 도출하고자 동료들의 희생을 권유하는 라우엘이었다.
이를 악 무는 모습을 보아하니, 이와 같은 선택지밖에 제시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무력함을 원망하는 눈치였다.
그리드가 단칼에 거절했다.
“싫어.”
엘핀스톤 레이드 당시 후로이를 희생하면서 느꼈던 무력감과 죄책감에 또 한 번 시달리고 싶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노력해왔고,
“나는 강해졌다.”
노력의 결실을 보여줄 때다.
“피아로와 아스모펠의 도움 없이 맥스옹을 잡는다.”
“그리드님…!”
라우엘은 사색이 되었다.
불가능한 일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터엉!!
지면을 박찬 맥스옹이 신형을 날렸다.
근육덩어리의 거구라고는 믿기지 않게도 빠른 속도였다.
유페미나와 라우엘은 그에게 반응하지 못했다. 오직 그리드만이 아슬아슬하게 움직임을 포착하여 대항했다.
쩌어어엉!!
“크윽…!”
옥빛 비늘을 두르고 있는 맥스옹의 오른쪽 팔꿈치를 이야루그트로 맞받아친 순간, 그리드가 뒤로 한 걸음 크게 밀려났다.
맥스옹의 물리공격력이 크리스를 상회한다는 명확한 증거였다.
그뿐이랴?
퍼어어엉!!
“크악!”
맥스옹이 내뻗은 손으로부터 분출 된 물기둥에 가슴을 강타당한 그리드가 무려 7,800의 데미지를 입었다.
성스러운 빛의 무구 세트를 무장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맥스옹의 마법력은 드레이크보다 정확히 2배 이상 강했다.
하지만 그리드 또한 만만치 않았다.
맥스옹의 공격을 막아내고, 허용하는 과정에서 갓 핸드를 활용한 반격을 가했다.
푹!
푸푸푹!
압도적인 공격력을 자랑하는 <+9실패작>, 뛰어난 밸런스의 <+8그리드의 대검>, 적의 방어력을 일정량 무시하는 <+8도플갱어의 대검>, 그리고 이상적인 단검을 베이스로 제작했던 <+7이상적인 장검>이 수인족 왕의 허리와 가슴 곳곳을 찔렀다.
움찔!
맥스옹이 이를 악 물었다.
검에 찔린 부위들로부터 격통을 느낀 탓이었다. 하지만 조금도 주춤거리지 않았다.
콰르르릉!!
벼락이 치는 듯한 소리가 그리드의 귓전에 울렸다.
인지하고 보니, 이미 맥스옹의 발차기가 눈앞에 날아오고 있었다.
퍼억!
[5,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옥빛 비늘에 뒤덮인 발목에 안면을 강타당한 그리드가 넝쿨들 사이로 날아가 처박혔다.
“감히 주군을!!”
격노한 라우엘이 <지룡의 발톱>을 소환하자 맥스옹이 서있는 지면에 날카로운 돌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맥스옹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맥스옹이 즉시 소환한 푸른 물방울이 돌기둥의 위력을 완화시킨 까닭이었다.
라우엘은 당황하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의 역할은 시선 끌기에 있었으니까!
“나무거인의 포옹!”
그리드와 라우엘이 맥스옹의 어그로를 끄는 사이.
주문을 캐스팅한 유페미나가 또 한 번 S급 마법을 전개했다.
이번에도 역시 수속성에 강한 목속성 마법이었다.
수속성 마법에 특화 된 수인족들의 왕국을 찾아오기에 앞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목속성 마법들을 최대한 복제해놓았던 것이 유효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꽈드드드득!!
“흐읍!”
앞서 사용했던 뿌리 장막으로 인하여 형성되었던 넝쿨의 숲이 순식간에 거인의 형상을 갖추더니 맥스옹의 몸을 감싸 안았다.
몸을 완전히 찢어버릴 기세로 조이고, 또한 비틀어버렸다.
붙잡힌 채 신음을 토하는 맥스옹에게 그리드가 날아들었다.
그가 찔러오는 이야루그트에 실린 기운은 궁극의 살의였다.
“살(殺)!!”
푸우욱!!
“크아아아악!”
레전드리 등급으로 성장한 <이야루그트>가 알려주는 검로는 전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고, 갱신 속도 또한 빨랐다.
<도살귀의 안대>까지 착용한 그리드의 약점 공격능력은 극대화 된 상태였다.
맥스옹은 약점인 쇄골의 아가미를 이야루그트가 정확히 찔렸다.
비명을 내지르며 피를 분출하는 그에게, 검을 회수하면서 한 바퀴 회전한 그리드가 매직 미사일을 연달아 발사했다.
이때 동시에 밟은 보법을 기반으로 극살(極殺)을 연계하여 베고, 찌른다.
[크리티컬!]
[대상에게 455,0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
극살(極殺)을 사용한 대가로 생명력이 소모 된 그리드.
그대로 연(聯)까지 전개함으로서 이야루그트의 콤보 효과를 발생시키려던 그가 다급히 방어태세를 취했다.
나무거인의 포옹을 뿌리친 맥스옹의 반격을 막아내기 위함이었다.
쩌저정!
상단과 하단을 동시에 타격하는 주먹과 발차기를 각각 갓 핸드와 이야루그트로 막고,
퍼퍼펑!!
물 폭탄은 허용하고 만다.
걸쭉한 피를 한 움큼 토해낸 그리드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제길… 요즘 왜 이렇게 5연격이 안 터지는 거지?’
<성스러운 빛의 장갑>에 귀속되어 있는 최상급 옵션 효과.
이전에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 터져주며 도움을 주었던 그것이 요즘에는 감감무소식이다.
국가대항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드는 불안해졌다.
‘내가 요즘 돈 좀 만지니까 괘씸하다고 악운을 부여하는 건가…!’
빌어먹을 행운의 여신 같으니라고!
애꿎은 신을 원망하는 동안에도 그리드는 맥스옹과의 공방을 계속하고 있었다.
퍼펑!
쿠콰콰콰쾅!!
라우엘과 유페미나의 마법 공격을 최대한 막고, 피하고, 어쩔 수 없을 때는 허용하면서도 끝까지 그리드만 노리고 공격하는 맥스옹.
노려봐오는 그의 푸른 눈동자에 담겨있는 분노와 살의가 보통내기가 아님을 깨달은 그리드가 어느 순간 미소 짓고 말았다.
황당함으로부터 비롯된 실소였다.
‘개자식.’
생각할수록 괘씸하다.
세이렌을 지켜준 영웅에게 이 무슨 처사란 말인가?
애초에 본인은 세이렌에 관심조차 없던 주제에!
“씨팔! 파렴치한 새끼! 너 따위가 무슨 염치로 왕을 자처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반드시 본때를 보여주고 싶다.
하지만 맥스옹의 강함은 뱀파이어 백작 엘핀스톤과 비견됐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었다.
결코 세 명이서 레이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리드는 자신이 공개할 수 있는 모든 패를 꺼냈다.
우선 노에와 랜디를 소환한 후,
“기사 소환! 쥬드!”
윈스톤의 방위를 맡겨놓았던 첫 번째 기사를 불러들이고,
“악마 소환, 이야루그트.”
마지막으로는 상정할 수 없는 존재마저 끌어들인다.
이제는 물량빨까지 발휘하는 그리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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