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3권 - 9화
펫에게는 등급이라는 게 존재한다.
당연히 가치가 높은 펫일수록 등급이 높다.
그럼, 이 가치라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책정하는 것일까?
능력치 수치와 스킬의 성능을 토대로?
맞다. 심지어 외모도 가산점이 붙는다. 예쁘고, 멋지고, 귀여운 펫일수록 못 생긴 펫보다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능력치와 외모보다 더 중요한 부분이 바로 지능이었다.
단순하게 공격, 방어, 이동, 등의 행동명령만을 이해하고 수행할 수 있는 펫들은 아무리 능력치가 뛰어나고 예뻐봤자 등급이 낮다.
효과적으로 활용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반면 지능이 높은 펫들.
주인의 말과 생각을 온전히 이해하고 보다 고차원적인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펫들은 능력치가 다소 낮더라도 등급이 높았다.
지능이 낮은 펫들과 비교해서 훨씬 더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룡이 오랜 세월동안 ‘최고의 펫’으로 군림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비룡은 능력치가 최상급일뿐더러 주인의 생각을 이해할 정도로 뛰어난 지능을 보유했으니까.
주인의 목적을 이뤄주기 위해서 비룡은 늘 최선을 다했고, 이는 플레이어에게 무척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세상 모든 플레이어들이 비룡의 주인이 되는 게 꿈일 정도로 비룡의 가치는 높았다.
하지만, 이제 세상 사람들은 비룡에게 최고라는 수식어를 덧붙이지 않는다.
비룡보다 몇 배는 더 뛰어난 펫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노에와 랜디.
공교롭게도, 둘 모두 그리드의 펫이었다.
“냥핫핫! 주인이 도와주래서 오셨다! 냥!!”
작은 날개를 파닥이면서 날아온 노에가 레가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게끔 만들었다.
“노에…! 고맙다!”
체중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싸우는 백요는 무척 강한 무투가였다.
유일한 아수라 전직자 레가스조차도 그녀를 상대로는 버티는 게 고작이었고, 그 버티기도 이제 한계였다.
죽는구나 싶을 때 구원와준 노에가 레가스는 무척 듬직했고 반가웠다.
상처투성이 레가스의 어깨 위에 핑크색 발바닥을 얹은 노에가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떠들었다.
“지옥 최강 마수인 이 몸은 원래 인간 따위 안 돕는 것이다. 냥! 하지만 주인이 도와주래서 어쩔 수 없이 돕는 것이다! 냥!!”
“핫핫, 주인님 말씀 잘 듣는 착한 아이네.”
“냥핫핫!!”
칭찬은 노에도 춤추게 만들었다.
골골거리며 기뻐하는 녀석의 턱을 쓰다듬어준 레가스가 부탁했다.
“그녀의 스탯을 빼앗아줘.”
“알았다! 냥!”
본래, 펫의 스킬 발동은 ‘주인의 명령’을 기본 전제로 한다. 명령을 받지 않으면 스킬을 쓰지 못했다.
하지만 노에는 플레이어와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높은 지능을 보유한 펫이다.
상황을 스스로 판단했고 스킬도 마음껏 사용했다.
힘차게 대답한 녀석이 백요에게 날아가더니 주둥이를 쩍, 크게 벌렸다. 백요를 한 입에 집어삼킬 심산이었다.
하지만 백요는 거체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성의 소유자였고 또한 컨트롤도 기가 막히게 훌륭했다.
그녀는 슬쩍,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노에의 주둥이를 피한 뒤 퉁퉁한 손가락을 세워서 노에의 목젖을 정확하게 찔렀다.
그러자 눈을 바둑알처럼 커다랗게 뜬 노에가 켁켁, 고통스러워하더니 맥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 아푸다옹.”
“…”
기대감으로 물들었던 레가스의 얼굴에 다시금 암운이 드리웠다.
***
[헤아릴 수 없는 기운에 압도당합니다.]
[저항에 실패하였습니다. 기운의 근원지로부터 물러섭니다.]
[34,72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태이상에 이어서 기습을 허용한 흑요.
유페미나와 싸우는 내내 웃던 그녀가 처음으로 얼굴을 굳혔다.
“히…익?”
3만 5천에 가까운 생명력이 소모됐다고?
그것도 단 일격에?
레전드리 등급의 아이템으로 도배를 하고 있는 이 내가?
‘누구?’
자신의 가슴을 관통하고 있는 흑청색의 대검.
떨리는 눈으로 그를 확인한 흑요가 이내 한 명의 사내를 떠올렸다.
‘그리드…!’
맞다.
천외천의 궁극기조차 견뎌냈던 내게 이만한 피해를 한 방에 입힐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템빨단의 수장이 바로 그리드임을 상기한 흑요가 등 뒤로 팔을 휘둘렀다.
발악적인 몸짓이었지만 빨랐고, 또한 절묘했다.
날카로운 호선을 그린 그녀의 태도가 그리드의 안면을 정확히 겨냥하고 날아갔다.
스윽.
대검을 회수하며 물러선 그리드가 피했다. 그는 살(殺)을 맞고도 비교적 멀쩡한 흑요의 단단함에 놀라고 있었다.
“고작 레더아머를 무장한 주제에 상당히 튼튼… 어?”
출렁.
“…출렁?”
지슈카의 것보다 큰 것 같은데?
‘심지어 방어구 디자인도 비키니야?’
완전히 취향저격이다.
본능이란 거부하기 힘든 마력을 품고 있는 법!
의도치 않게 흑요의 신체 특정부위에 현혹당하고 벙 찐 그리드에게 유페미나가 다급히 소리쳤다.
“정신 차려욧!!”
억양이 높아지는 건, 질투에서 비롯된 현상일까?
유페미나는 아니라고 부정했다.
단지 그리드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자신도 모르게 억양이 높아진 거라고 믿었다.
걱정할 수밖에 없다.
전투에서는 찰나의 틈조차도 중요하게 작용하는 바.
단 1초의 차이로 판단이 늦어져도 적에게 승기를 빼앗기는 수가 있었다.
하물며 고수간의 싸움에서는 0.1초도 중요했다.
한데 대놓고 한눈을 파는 그리드였으니 무사할 수 있겠는가?
“히힛!”
다시금 웃음을 되찾은 흑요가 <스크류 소드>를 전개하였다.
대상에게 적중 시, 대상의 치유 감소 효과와 아이템 파괴(아이템 효과 하락)를 유발하는 공격이었다.
이팩트부터가 상당히 위협적이었으므로 대상은 이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흑요의 특기는 이때 순보를 사용하여 대상의 후위를 장악해버리는 것이었다.
쩌저정!
역시나.
흑요의 출렁이는 그것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당황한 그리드가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막아냈다. 그 틈에 그리드의 등 뒤로 나타난 흑요는 새로운 공격을 연계시켰다.
“그리드!!”
유페미나의 경악성이 폐허가 되어버린 세이렌 곳곳에 메아리친다.
유페미나는 그리드를 걱정하였지만 정작 그리드 본인은 침착했다.
반응할 수 없는 공격?
‘맞아주면 그만이다.’
푸욱!!
그리드의 등을 흑요의 태도가 찌르고 비집고 들어갔다.
대상의 신체를 깊숙이 찌르고 확정적인 치명타를 유발하는 <피어스 소드>의 묘리였다.
공격력 계수가 무척 높았기 때문에 이 공격을 맞고 멀쩡한 사람은 여태껏 없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멀쩡했다.
“히…?”
고작 1만대의 데미지밖에 들어가지 않다니?
비상식적으로 높은 그리드의 방어력에 놀란 흑요가 검을 회수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리드의 미늘 갑옷 틈새에 끼인 검은 쉽게 빠지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검의 내구력이 큰 폭으로 손실되고 말았다.
시간을 끌고 만 흑요의 몸을 혈빛의 섬광이 덮쳤다.
어느새 이야루그트로 스왑한 그리드의 공격속도는 국가대항전 당시보다 미세하게 빨랐다.
민첩성이 무려 3천에 육박하는 흑요조차도 그리드의 공격속도에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왼쪽 팔목에 착용하고 있는 소형방패를 황급히 들어 올린 그녀가 방어를 시도했다.
쩌저저저정!!
“……!”
이야루그트와 충돌한 흑요의 몸이 휘청거렸다.
힘과 체력 스탯이 비교적 낮은 그녀로서는 그리드의 압도적인 공격력을 온전히 견뎌낼 수 없던 것이다.
상체가 기울어지자 그대로 손을 뻗어 지면을 짚은 후 공중제비를 돌아버리는 흑요.
뒤로 크게 물러나는 그녀를 그리드가 따라 붙었다.
그리고 재차 공격을 연계하였지만 이미 안정감을 되찾은 흑요는 회피에 성공했다. 마치 곡예사 같은 몸놀림이었다.
“히힛!”
상대가 국가대항전 PvP준우승자임에도 불구하고 위축되기는커녕 다시금 웃기 시작하는 흑요였다.
그녀는 그리드를 우습게보고 있었다. 자신이 민첩함과 컨트롤 면에서 확실한 우위에 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전투에서 중요한 요소는 단순한 피지컬이 아니다.
“템빨이지.”
덥썩!
“…!!”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흑요의 커다란 눈이 파르르 떨렸다.
사각으로부터 차갑고 단단한 무엇인가가 날아오더니 손목과 발목 사지를 붙잡아 구속시켰기 때문에 놀란 것이다.
그 유명한 갓 핸드였다.
“히익!”
갓 핸드를 떨쳐내고자 몸부림치는 흑요에게 그리드가 속삭였다.
“여자라고 안 봐줘.”
남녀평등 사회이니까!
푹!
흑요의 몸을 이야루그트가 관통해버렸고.
“히익! 힉! 키야앗!!”
앞서 살(殺)을 얻어맞고 큰 피해를 입었던 흑요는 이어서 몇 번의 타격을 더 허용하더니 곧 잿빛으로 산화했다.
“쩝.”
흑요의 크고 풍만한 그것을 더 이상 볼 수 없음에 아쉬움을 느낀 그리드.
입맛을 다신 그가 주저앉아 있는 유페미나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잘 버텨주었다.”
유페미나의 동그란 눈이 평소보다 더 커져있었다.
“당신… 굉장히 강해지셨네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
대수롭지 않게 답하는 그리드였지만, 사실 그는 유페미나가 없는 동안 수많은 시련을 겪고 이겨내 왔다.
지금 생각해도 압도적으로 강한 뱀파이어 백작 엘핀스톤, 그리고 뱀파이어 남작 티라멧과의 싸움을 통해서 전투기술이 향상되었고, 이후 번헨 열도에서는 순발력과 지능의 발전을 강요받았다. 또한 과거를 극복함으로서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섰다.
정점은 국가대항전이다.
각국을 대표하는 최강자들과 싸우면서 그리드는 보고 배운 바가 컸다.
특히 마지막 크라우젤과의 대결에서 또 한 번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그건 그렇고 방금 그 흑요라는 여자는 유페미나 네 상대가 못 될 것 같은데? 어쩌다가 위험에 빠졌던 거야?”
옛날과 비교하면 꽤나 안목이 생긴 듯한 그리드였다.
너털웃음을 흘린 유페미나가 설명했다.
“바퀴벌레 같은 여자에요. 부활을 3번이나 하더라구요. 장기전으로 가다가 제가 불리해졌어요.”
“부활? 죽었다가 또 다시 살아난다고?”
“네, 직업 고유 스킬인지, 아니면 아이템에 귀속 된 효과인지는 잘 모르겠…”
말하던 유페미나가 얼굴을 굳혔다
“힛! 이히힛!!”
흑요.
조금 전 죽었던 그녀가 또 한 번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기에.
“헐.”
황당함을 금치 못하는 그리드에게 유페미나가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횟수에 제한이 있는 스킬 같지는 않아요. 만약, 부활하는 횟수가 한정적이었다면 그녀가 저렇게까지 막무가내로 덤벼올 리 없으니까요.”
“그치. 조금은 몸을 사렸겠지.”
“하지만 부활이라는 사기적인 스킬이 아무런 페널티도 없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에요. 어쩌면,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흑요는 무한히 재생성 가능한 분신에 불과하고 본체가 어딘가에 숨어있을 수도 있겠죠. 고작 분신 따위가 저렇게 강하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지만.”
“음… 그럴듯해. 일단 동영상 촬영 모드 설정 좀.”
“어머.”
유페미나가 미소 지었다.
강자와의 싸움을 앞두고 영상을 녹화해놓으려는 그리드의 행동.
그가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이 현명해졌다는 반증이었으니까.
‘나중에 몇 번이나 돌려보면서 복기할 생각이신 거구나.’
항상 공부하는 자세를 갖추게 되신 것인가.
흐뭇해하던 유페미나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헤헤.”
헤벌쭉, 콧구멍을 벌렁거리면서 웃는 그리드의 시선이 흑요의 가슴에 고정되어 있음을 뒤늦게 깨달은 까닭이었다.
“저질이네요.”
중얼거리면서 스스로의 가슴을 내려다보는 유페미나였다.
그리고 그때 흑요가 ‘마법’을 쏘았다.
“이게 무슨…!”
날아오는 불꽃을 목도한 유페미나가 혼란에 빠졌다.
흑요는 어쌔신 클래스가 아니었던가? 한데 마법이라니?
“설마, 클래스 변환까지 가능하다고요?”
유페미나가 기겁하는 사이.
“아하, 내 물리내성이 높으니까 이번엔 마법으로 덤벼온 거구나?”
<성스러운 빛의 갑옷 세트>로 방어구를 스왑한 그리드가 흑요의 마법을 대놓고 맞았다.
압도적인 전력차이를 주지시켜주기 위한 일종의 과시였다.
그 효과는 컸다.
그리드의 생명력이 쥐똥만큼밖에 달지 않은 것을 확인한 흑요가 전의를 상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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