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3권 - 6화
“헐… 예상했던 상황과는 전혀 다른데?”
“음, 이거 좀 심각하군.”
세이렌에 입장한 후로이, 극검, 폰.
모래성벽 위에 올라선 채 전장을 살피는 그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세이렌을 침공한 플레이어들의 수준이 상정했던 범위를 아득히 초월할 정도로 높았던 까닭이다.
“숫자는 1천여. 평균 레벨은 200초중반인가.”
“그중 서른 명 정도는 3차 전직자다. 그것도 어중이떠중이 수준이 아니야. 전원 전투에 특화 된 실력자다.”
놀라울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아니, 도리어 즐거워하면서 세이렌의 백성과 병사들을 살육하는 플레이어들.
그들의 움직임과 장비, 그리고 스킬을 관찰하면서 추측하던 세 사람의 시선이 문득 전장 중앙으로 고정되었다.
“엥?”
“레가스가 밀려?”
“백요? 저게 누구지?”
카츠와 함께 막무가내로 전장에 난입한 레가스.
폰 일행 중 그를 걱정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레가스가 누군가?
국가대항전 PvP에서 데미안과 호각으로 싸웠던 실력자다.
두 개의 태양-그리드, 크라우젤-을 SSS급 강자라고 분류할 경우, 레가스는 최소 SS급의 강자였다.
한 마디로 짱이다 이거다.
그가 전장에서 발가벗고 춤을 출지언정 적에게 잡혀 죽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래서 폰 일행은 그를 걱정하지 않았다.
한데 이게 웬걸?
백요.
생소한 아이디를 지닌 백발의 뚱뚱한 여성이 레가스를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능력치, 스킬, 컨트롤 모든 면에서 레가스보다 뛰어난 면모를 보였고 레가스는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그냥 정신없이 얻어터지는 수준이었다.
말인 즉, 백요 또한 크라우젤급의 괴물이라는 뜻이었다.
“저만한 여자가 여태껏 어디에 숨어있었던 거지?”
크라우젤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던 시기.
사람들은 플레이어가 어찌 저리도 강할 수 있느냐며 커다란 충격을 받았던 바 있다.
크라우젤 NPC설까지 돌았다.
그리고 지금 백요가 그랬다.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크라우젤처럼 충격적인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역시 세상은 넓어.”
부들부들.
중얼거리는 폰의 몸이 떨렸다.
두려움과 긴장감에?
물론 그런 감정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환희가 더 컸다.
폰은 궁극의 무(武)를 추구하는 인물인 바.
더욱 더 강해지기 위해서 늘 강자와의 싸움을 갈망하는 성향이 있다.
지금, 백요와 싸우면서 넝마가 된 주제에 웃고 있는 레가스처럼 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백요란 새로운 도전의 대상이자 성장의 발판이었다.
“나는 레가스에게 합류하겠다. 너희들은 나머지 잔챙이들을 맡아줘.”
“여기에 잔챙이가 어디 있다고?”
적들 모두가 강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 극검이 폰의 어깨를 붙잡았다.
“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좀 참아주라.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레가스가 저 괴물 여자의 발을 묶어놓는 동안 적의 숫자를 최대한 줄여놓는 일이야.”
“극검의 말이 맞다. 후발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수인족의 피해를 최대한 억제하는 게 우리의 임무야. 개인적인 호승심은 잠시 접어둬라.”
“크음…”
후로이와 극검 덕분에 냉정을 되찾은 폰이 창을 꺼내들었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그가 <레일 스피어>를 구동시켰다.
“우리가 날뛰는 동안 레가스가 잘 버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도는 괜찮잖아?”
뿌득!
뿌드드득!!
근육을 팽창시키더니 기이한 소리를 토해내는 폰의 오른팔.
불가능하게 보이는 각도까지 비틀어지는 그 팔을 보면서, 후로이와 극검이 혀를 내둘렀다.
‘겁나 아플 것 같다.’
사용하는 대가로 고통이 유발되는 스킬들이 있다.
단순하게 생명력을 잃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신체적 결함을 불러일으키는 스킬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정점을 찍는 것이 바로 레일 스피어였다. 레일 스피어를 사용하는 대가로 폰이 감수해야할 페널티는 무척 컸다.
대신, 효과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다.
퍼어어어어어엉!!
꿀꺽, 후로이와 극검이 몇 번의 마른 침을 삼키는 사이.
폰이 발사한 레일 스피어가 300미터 거리에 떨어져있는 백요에게 날아갔다.
피하는 것이 불가능한 형태의 스킬이었으므로 그대로 꿰뚫린 백요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덕분에 한 숨 돌릴 수 있게 된 레가스가 이쪽을 향해서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워 보였다.
“헐. 저 싸움바보가 도와줘서 고맙다네.”
“그러게. 왜 끼어드냐고 화낼 줄 알았는데.”
“저 여자가 진짜 어지간히도 센가보다.”
세 남자의 얼굴에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드디어 완전하게 직시한 것이다.
수인족 백성들과 병사들을 도륙하느라 정신없던 블러드 카니발 중 일부가 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폰이다!”
“극검이야!”
“템빨단 놈들이 여긴 왜…!”
“우리를 방해하려는 건가!!”
레가스를 도운 대가로 위치가 노출되었고 기습의 기회를 놓쳐버렸다.
적들에게 표적이 된 세 사람이 눈빛을 교환한 후 각자 행동에 나섰다.
“우리들 미래의 마누라 유라보다 예쁨!”
웅변가 후로이가 달콤한 말로 사기를 진작시켰고,
“발검.”
피잉-!
그리드가 제작한 칼집 <극검꺼> 속에 숨어있던 <이상적인 장검>이 백색의 검광을 토해냈다.
“폭(暴).”
쿠콰콰콰콰쾅!!
야수처럼 흉포한 검광이 절벽 아래 적들에게 날아가 꽂히자 3차 전직자를 제외한 플레이어들은 대부분 일격에 사망했다.
“휘유.”
극검의 발검술에 감탄한 폰이 휘파람을 불면서 백마를 내달렸다.
순식간에 절벽 아래까지 도달한 그의 창격이 한 번의 직선을 그릴 때마다 적이 두세 명씩 잿빛으로 산화했다.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된 수인족 백성들이 눈물까지 흘리며 감사를 표했다.
죽은 엄마의 시신 곁에서 떠나질 못하는 어린아이들을 보호하고 선 폰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도탄에 빠져라.”
“미친…! 저놈을 막아!!”
누구나 알고 있듯이 강함이란 상대적인 것이다.
폰 일행이 백요를 괴물로 보았듯이, 블러드 카니발과 그들의 군세는 폰 일행을 괴물로 보았다.
***
“불사 스킬은 봤지만 부활 스킬을 보는 건 처음이네요. 당신의 직업 특성인가요? 아니면 아이템이나 칭호의 효과인가요? 무척 탐나네요.”
“힛! 이히힛!!”
첫 번째 싸움은 4분 31초에 승부가 났던 반면 두 번째 싸움은 5분 20초나 걸렸다.
힘을 안배하면서 간신히 흑요를 제압한 유페미나가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작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좋은 향기가 나는.
하지만 흑요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럴듯한 향기에 감춰져있는 죽음의 악취를 말이다.
퍼억-!
<응징>
C급 단일 마법이다.
특이하게도 사용거리에 따라서 위력이 달라지는 이 마법의 위력은 지근거리에서 사용할 경우 B급 단일 마법 이상이었다.
머리통이 박살나고 잿빛으로 산화하는 흑요를 확인한 유페미나가 한 숨 돌렸다.
“두 번 부활하는 건 불가능하겠죠.”
후로이로부터 세이렌에 도착했다는 귓속말을 받았다.
이제 빨리 동료들과 합류해서 수인족의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것이 유페미나가 당면한 과제였다.
한데…
“힛! 이히힛!! 너, 조금씩 약해지네?”
“…어라라.”
조금 전, 분명히 머리통이 터져 죽었던 흑요가 또 다시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나 유페미나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어쩌면 단순한 부활 스킬 보유자가 아니라 보다 상위의 술법을 사용하는 플레이어 같았다.
“바퀴벌레 같은 여자네요.”
감상을 읊은 유페미나가 날아오는 흑요의 공격을 마법으로 맞받아쳤다.
동시에 발생하는 폭발가 사방으로 충격파를 전달하자 건물 하나가 또 부셔져버렸다.
유페미나의 퀘스트 클리어 조건은 수인족 보호뿐만이 아닌 내정시설의 수호이기도 한 바.
유페미나는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축적해놓은 스킬과 마법, 그리고 마나와 스태미나가 빠르게 소모되고 있는 지금 그녀가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다름 아닌 그리드였다.
얼굴을 붉힌 유페미나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이건 딱히 흑심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단지 당신이 의지되는 남자라서 떠올리게 되는 것뿐이지.’
“힛? 으힛?”
전투 중에 혼자서 도리짓하더니 얼굴을 붉히는 유페미나.
그녀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흑요였다.
누가 봐도 미친 사람에게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자 불쾌해진 유페미나의 전투 집중력이 상승했다.
***
“비공식 랭커가 서른 명…? 그리고 태양급의 강자?”
선발대로부터 도착하는 실시간 정보를 분석한 라우엘이 확신했다.
‘블러드 카니발이다.’
7대 길드 이상의 세력.
아니, 어쩌면 템빨단에 버금가는 세력이 하루아침에 나타났을 리 없다.
이번에 세이렌을 침공한 집단은 기존부터 존재하던 세력이라고 보는 게 옳았고, 비공식 랭커를 대거 보유하고 있는 세력이라면 블러드 카니발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상종하고 싶지 않았던 집단과 적대하게 되었군.’
블러드 카니발은 오로지 돈과 재미만을 추구하는 집단으로서 상식과 도의를 모른다.
그들과 적대하게 될 경우 여러모로 피곤해질 것이 분명했다.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짓는 라우엘의 등을 팡팡 두들긴 지슈카가 고혹적인 미소를 피어 올렸다.
“걱정할 거 없어. 이번에 완벽하게 짓밟아놓으면, 놈들은 우리를 두려워하게 될 테고 두 번 다시는 우리에게 덤비지 못할 거야.”
라우엘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맞습니다. 기왕 적대하게 되었다면 후환이 없게끔 확실하게 박살내는 것이 옳겠죠.”
말하는 것과 달리 라우엘의 속내는 썩 편치 못했다.
백요라는 태양급 강자가 거슬렸던 까닭이다.
‘페이커님까지 데려오는 게 좋았을 텐데.’
솔직히 말해서, 라우엘은 선발대만으로 유페미나와 세이렌을 충분히 구원할 수 있으리라 분석했었다.
그래서 후발대도 총원이 8명밖에 되지 않았다.
쉽게 생각한 이유?
세이렌을 침공한 세력이 ‘플레이어 집단’이었던 까닭이다.
그들의 전력을 평균적인 플레이어의 수준으로 고려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오판이었다.
하필이면 20억 유저 중에 블러드 카니발이라는 최악의 집단과 연류될 거라고는 솔직히 예상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힘들어질 수도 있겠군. 이럴 때 그리드님이 계셨다면…’
전화도 받지 않고 대체 뭘 하시는 걸까?
아쉬워하면서 한숨 쉬는 라우엘의 시야로 길드 알림창 하나가 떠올랐다.
[마스터 ‘그리드’가 접속하였습니다.]
***
가상현실게임의 구조를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플레이어가 뇌파를 서버에 전달하고 서버는 이를 토대로 플레이어의 움직임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현실보다 Satisfy에서의 반응 속도가 약간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약간이란 불과 0.1초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리드가 2년 넘게 사용해왔던 최악의 싸구려 캡슐은 반응이 0.3초나 늦었다.
초창기 모델이면서 동시에 양산형이다 보니 기술적인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캡슐 그 자체엔 특별한 관심이 없었고 중요하다 여겨본 적이 없다.
그래서 0.3초의 늦은 반응시간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려니 생각하며 기존의 캡슐을 사용해왔다.
그러다가 제2회 국가대항전부터 괴리감을 느꼈다.
뭔가 반응이 빨랐다.
손을 뻗고자 생각하는 순간 손이 뻗어져나갔고 뭔가 말하려고 하면 말이 툭 튀어나왔다.
무척 미묘한 차이였지만 한동안 적응하기 어려웠을 정도였다.
그리고 오늘.
“헐.”
그리드는 신세계를 체험했다.
몸이 마치 현실에서와 똑같이 움직이는 것이었다. 행동하고 말함에 있어서 아주 미세한 이질감조차 없었다.
지금 이 순간, Satisfy에 접속해있는 게 아니라 현실에 있는 기분이랄까?
“이, 이거…!”
다이아몬드 캡슐의 설명서에 명시되어있던 ‘최고의 싱크로율’을 떠올리고 사태를 파악한 그리드가 기쁨에 환희했다.
“아이린을 더욱 더 기쁘게 만들어줄 수 있겠어!!”
남들은 모를 정도로 미세한 차이만큼이나마 허리를 더 빨리 움직일 수 있게 된 이상…
이하 생략.
“뭐?”
룰루랄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아이린의 방으로 달려가던 그리드가 문득 자리에 멈춰 섰다.
라우엘로부터 귓속말이 도착한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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