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3권 - 5화
세이렌 전체를 감싸고 있는 투명 외벽.
그 너머로 엿보이는 심해의 풍경은 보는 이에게 신비를 넘은 경외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지금 에쌍트는 심해의 풍경보다도 그 풍경을 등지고 서있는 카츠의 존재가 더 놀라웠다.
“블러드 워리어…! 네가 이곳엔 무슨 볼일이지!!”
상태이상 ‘스턴’을 단 1초 만에 극복한 에쌍트가 물약을 복용하면서 외쳤다.
카츠가 콧방귀 뀌었다.
“별 같잖은 놈이 집주인행세를 하는구나. 내가 이곳을 왜 방문했는지 일일이 네게 보고해야하나? 애초에 네놈, 누구냐?”
“이 미친놈!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습격했던 거냐!!”
사람을 함부로 기습한 주제에 거만하게 지껄이는 카츠의 태도에 분개하던 에쌍트가 문득 깨달았다.
“아하! 그렇군! 네놈도 여기에 돈을 벌려고 왔구나!!”
세이렌은 사냥터와 퀘스트가 부족한 왕국이다.
100레벨대 유저들조차 방문을 꺼려하는 이 볼품없는 국가에 하이랭커인 카츠가 굳이 찾아온 이유는 딱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에쌍트는 확신했다.
“그래…! 네놈도 백요와 끈이 있었던 거야! 그래서 이곳에 수인족을 사냥하러 온 거고!!”
엄밀히 따지면 한 배를 탄 몸이다, 이거다.
한데 뒤치기를 하다니?
“치사한 새끼! 혼자서 수인족을 독식하고 돈방석에 앉을 생각이로구나!!”
나름 그럴듯한 추리라고 자부하는 에쌍트였다.
카츠의 입장에선 귀여울 따름이었지만 말이다.
“내가 돈을 노리고 움직인다고? 큭큭! 그것 참 신선한 발상이로군.”
‘아차!’
저놈은 가진 게 돈밖에 없는 놈이었지?
카츠가 일본 굴지의 재벌가 아들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에쌍트는 문득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설마 네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맞다. 난 수인족들의 편으로 이곳에 왔다. 그리드의 시다바리로써.”
“…씨다바리!!”
그게 뭐지?
일본의 고유명사를 알 리 없는 에쌍트였다.
하지만 현재 정황을 유추해볼 수는 있었다.
‘카츠가 템빨단에 들어간 건가? 템빨단이 세이렌을 구원하러 온 거고?’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지?
백요는 이 사실을 알고 있나?
깊게 생각해볼 여유는 없었다.
쿠콰콰콰콰콱!!
잔인하게 살육당한 수인족들이 흘린 피.
혈류가 되어서 카츠의 곁을 살아있는 뱀처럼 맴돌고 있던 그것이 에쌍트를 향해서 날아들었다.
무척 빠른 공격이었으므로 에쌍트는 크게 놀랐고 필사적으로 반응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쉽게 피했다.
혈류의 궤도가 복잡하지 않았기에 금세 적응할 수 있던 것이다.
콰콱!
쿠콰콰콱!!
직선, 직각, 직선.
흉흉한 기세와 상반되게 단순하게 움직이는 혈류가 연신 맨땅에 헤딩만 했다. 목표물인 에쌍트는 스치지도 못하고 지면만 부쉈다.
혈류를 피하는 과정에서 동료들의 곁으로 당도하게 된 에쌍트가 기세등등해졌다.
‘흥! 별 것 아니… 가만?’
이거, 너무 쉬운 거 아닌가?
전장의 지배자 아레스, 영혼 약탈자 수에론, 마지막으로 블러드 워리어 카츠.
이들 셋은 전쟁터에서 결코 만나면 안 되는 위험인물들로 간주된다.
피가 난무하는 전장에서 카츠의 실력이 고작 이정도일 리가 없었다.
에쌍트가 최악의 결과를 예측했다.
‘설마…!’
혈류를 피한답시고 골옹과의 거리를 벌리고 동료들의 곁으로 다가오게 된 것, 어쩌면 카츠가 의도한대로 움직인 결과가 아닐까?
불길한 생각에 휩싸이는 순간이었다.
퍼펑!
쿠콰콰콰콰콰쾅!!
갑자기 폭발을 일으킨 혈류가 소용돌이치더니 에쌍트와 그의 동료들을 집어삼켰고,
“큭큭! 피라미 새끼들!”
카츠의 입가로 짙은 미소가 번졌다.
블러드 카니발과 그들의 군세가 고통 속에 내지르는 절규를 마치 즐겁다는 듯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음정을 맞추는 그의 모습은 사이코패스 그 자체였다.
이내 검을 뽑아 들고 적진 한가운데로 한 걸음, 두 걸음 이동하는 그에게 옹골이 물었다.
“도움은 정녕 감사하지만… 그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은 뭐지? 너희 인간들은 죄다 살육을 즐기는 건가?”
“…”
본래 카츠의 성격이었다면 하찮은 NPC의 질문 따위 무시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제는 본인이 템빨단 소속이라는 자각이 있었고 그리드가 NPC를 존중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심지어 그리드는 NPC랑 결혼까지 한 인물이지 않은가!
“…흐음.”
그리드의 입장을 고려한 카츠가 길드의 이미지를 위해서 귀찮음을 무릅썼다.
나름 친절해보이고자 골옹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맞다. 싸우고, 죽이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헐…”
골옹과 수인족 병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수인족들의 인간에 대한 편견과 불신이 더욱 더 짙어지는 순간이었다.
카츠의 쓸데없는 친절함이 발생시킨 불상사였다.
***
유페미나.
소녀처럼 아담하고 귀여운 외모를 지닌 그녀를 라우엘은 템빨단의 숨은 보석이라고 부른다.
대외활동을 하지 않는지라 거의 무명에 가깝지만, 그녀야말로 사실상 템빨단 최고의 전력이었으니까.
타인의 스킬을 복제함으로서 다방면에서 활약할 수 있고, 또한 전투능력은 최강이었으므로 그녀는 템빨단의 팔방미인이자 수호신 같은 존재였다.
물론, ‘상위 스킬들을 대량으로 복제해놓은 상태’라는 전제가 붙어야만 했지만.
그녀가 전력을 발휘할 때는 그리드조차도 OP(Overpowered)라고 부르며 두려워할 지경이었고 실제로 그녀는 과거 페이커를 ‘가볍게’ 박살냈던 전력이 있다.
심지어 피아로와도 호각을 겨뤘었고 말이다.
그런 유페미나가 현재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예언가 미옹에게 히든 퀘스트를 받고 장장 반 년 이상이나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동안 유페미나는 각 분야 하이랭커들의 스킬을 실컷 복제해놓은 상태였다. 스스로가 최강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한데 어째 전투가 어려웠다.
흑요.
그리드가 보면 사족을 못 쓸, 부러울 정도로 성숙한 몸매를 지닌 그 여성은 비상식적으로 날랬다.
너무 빨라 눈으로 쫓을 수가 없을 정도다.
타켓팅 스킬을 조준하는 게 불가능하다.
전후좌우, 사방팔방으로부터 날아오는 검격을 <거인의 포옹>으로 막아낸 유페미나가 아껴왔던 S급 마법 중 하나를 발동시켰다.
“화염지옥!”
화르르르륵!
유페미나를 중심으로 전방위 8미터 구역에 불기둥이 솟구쳤다.
광역 마법이었다.
적의 신속을 무력화시키기에 광역 마법처럼 효과적인 수단도 없었다.
화상을 입은 흑요가 결국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불기둥들을 피해서 화염지옥의 영향범위로부터 퇴각하고자 시도하는 그녀였지만 이미 늦었다.
유페미나는 화염지옥을 발동하자마자 <폭풍 중력장>의 주문을 완성시켜놓고 있었으니까.
꾸드득! 꽈득!
기이한 소리를 터뜨린 흑요의 몸이 그대로 지면에 곤두박질쳤다.
갑자기 수십, 수백 배까지 솟구친 중력에 짓눌린 여파였다.
“히힛!”
패배를 직감하고 자포자기한 것일까?
웃음을 터뜨리는 흑요였다.
그녀의 몸을 벼락 깃든 폭풍이 집어삼켰고 유페미나는 몇 발의 불화살을 더 날렸다.
그러자 잠시 후 흑요가 잿빛으로 산화해버렸다.
‘5분 31초…’
유페미나가 흑요 한 명에게 발이 묶여있던 시간이다.
이 과정에서 스킬을 총 8개나 소진해버린 유페미나의 양 뺨이 도토리 문 다람쥐의 볼처럼 부풀어 올랐다.
“쓸데없이 세가지고는 속을 썩이네요.”
템빨단의 최상위 전력과 비교해도 결코 손색이 없는 실력자였다.
이만한 강자가 그동안 어떻게 숨어 지냈던 걸까?
의문을 품으면서, 점차 과격해지고 있는 세이렌 중심부의 전장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유페미나가 귀신에 홀린 표정을 지었다.
“힛! 이히힛! 너처럼 세고 귀여운 애가 어떻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거야? 우리 언니가 물어보래!!”
“…?”
흑요.
조금 전 분명히 잿빛으로 산화하였던 그녀가 또 다시 유페미나의 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모습으로!
“쌍둥이신가요?”
라는 의문을 품기에는 아이디조차 똑같지 않은가!
보석보다 아름다운 유페미나의 붉은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치 그리드를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
펑!
퍼퍼퍼퍼펑!!
수천 년 동안 평화로웠던 세이렌이 전쟁터로 변하고 채 15분밖에 지나질 않았다.
한데 벌써 시가지 곳곳이 쑥대밭이 되어가는 중이다.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폭발과 창칼의 쇄도가 세이렌이 공들여 쌓아올린 문명을 파괴하였고 수인족 병사들과 백성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그만둬라…! 제발! 제발 멈춰!!”
1왕자 파옹.
수인족 최강의 전사이기도 한 그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애원까지 해봤다.
하지만 부질없었다.
전체적인 전력 차이가 워낙 심했을 뿐더러 인간들의 잔학성이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으므로.
“와, 왕자전하…”
“야옹!! 묘옹!!”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온 젊은 기사들도, 스승으로 섬겼던 중년의 기사와 마법사들도.
인간들에게 하나둘씩 죽어나갔다.
“비열한…! 비열한 인간 놈들!!”
백성들을 방패삼아 싸우다니!
누군가는 어리석다 비웃을지 모른다.
하지만 수인족들은 자신의 손으로 동족을 해할 수 없었다.
적들이 백성을 방패삼아 싸우자 차마 공격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다가 쉽게 쓰러져나갔다.
백요는 그들이 웃겼다.
“바보들이네.”
“너희들은 악마다!!”
분노한 파옹이 백요에게 쇄도했다.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저 요망한 인간 암컷을 해치우는 게 그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백요는 너무 강했다.
수인족 최강자라는 파옹조차도 그녀를 감당할 수 없었다.
터엉!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아랫배로 창을 막아낸 후,
퍼억!!
파도처럼 출렁이는 팔뚝 살로 파옹의 안면을 가격하는 백요.
몸무게가 족히 2톤에 달할 것 같은 그녀는 스스로의 신체적 특징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싸움의 달인이었다.
“이, 이익…!”
“사람을 돼지라고 비하하지 않는 점만큼은 칭찬해줄게.”
웃훙, 손 키스를 보내면서 찡긋 웃는 백요가 파옹을 소름 돋게 만들었다.
굳어버리는 파옹의 얼굴을 확인한 백요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니, 그 표정은? 역시 너도 내가 못 생기고 뚱뚱하다고 싫어하는 거야?”
퍼억!
분노한 백요의 크고 물컹한 주먹이 또 한 번 파옹의 안면을 강타했다.
파옹은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
무기도 들지 않은 인간이 어찌 이리도 강할 수 있는가?
혼란스러워하며 코피를 쏟는 그의 귓가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체중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무도가네요.”
맑고 깨끗한 목소리다.
목소리의 주인은 마음에 한 점 어둠도 없을 게 분명하다는 확신이 생길 정도로.
“넌 또 뭐지?”
처음 보는 인간 수컷이 다가와 손을 내밀자 파옹이 경계하며 적개심을 표출했다.
인간에 대한 그의 불신과 증오는 정점을 찍고 있었다.
끝까지 자신의 손을 잡지 않고 도리어 창을 겨누는 파옹을 확인한 인간 수컷, 레가스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맑은 눈동자에 깃들어있던 슬픔이 분노로 변한다.
“어째서 이들이 이런 고통과 슬픔을 맛봐야만 하는 겁니까?”
언제나 웃음기를 띄고 있던 레가스의 눈매가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그와 시선을 마주친 백요가 새하얀 백발과 대조되는 누런 이를 꽈드득, 갈았다.
“나를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뚱뚱한 건 죄가 아니야! 나는 물만 먹어도 살찌는 체질이라고!!”
퍼엉-!
헛소리를 지껄이며 날아든 백요의 정강이와 레가스의 주먹이 충돌했다.
순간, 레가스는 깨달았다.
‘내 상대가 아니다…!’
***
“궁금한 게 있다.”
그리드의 빌딩 5층에 월세로 입주하게 된 야수인간 툰.
보증금 없이 입주하는 혜택을 받은 대가로 그리드의 이삿짐 나르기를 도와주던 그가 문득 의문을 표출했다.
“어째서 이삿짐센터 직원들을 고용하지 않고 직접 이삿짐을 옮기는 거지?”
낑낑거리면서 박스 하나를 옮기고 있던 그리드가 무슨 그런 한심한 질문을 하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돈 아껴야지. 요즘에 인건비가 얼마나 비싼 줄 알아?”
“돈 아낀답시고 이삿짐 옮길 시간에 게임하는 게 너한텐 훨씬 더 이득일 텐데?”
그리드의 가치는 천문학적이다.
그가 게임을 1시간 플레이해서 거둘 수 있는 수익은 이제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했다.
아니, 굳이 게임이 아니라 당장 인터넷 방송을 켜고 혜성그룹만 외쳐도 돈을 벌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인지도는 대단한 것이었다.
“아…!”
그리드가 좌절했다.
“빌어먹을…!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와서인지 경제관념이 이상해졌어!!”
제대로 헛고생하고 있었구나.
깨닫고 억울해서 눈물까지 글썽이는 그리드에게 툰이 얇은 책자 하나를 건네주었다.
혜성그룹에서 그리드에게 선물로 준 다이아몬드 클래스 캡슐의 설명서였다.
“마무리는 내게 맡기고 어서 가서 게임해라.”
“그, 그래… 고맙다.”
후다닥, 그리드가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를 바라보는 툰의 눈동자에 기대감이 실렸다.
“너는 얼마나 강해졌을까?”
이삿짐을 옮기는 과정에서 그리드가 기존에 사용하던 캡슐을 발견한 툰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리드가 사용해온 캡슐은 완전히 초창기에 출시되었던, 그것도 최저가의 보급형 캡슐로서 ‘동화율 최악’이라는 악명이 높은 모델이었으니까.
반면 다이아몬드 클래스 캡슐은 최상급 모델이다. 그리드가 사용하던 캡슐보다 가격적으로도 150배는 더 비쌌고 성능은 압도적으로 뛰어났다.
국가대항전에서 선수들에게 보급되었던 중급 캡슐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
“템빨러라면 인생이 템빨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지.”
피식, 기분 좋게 웃은 툰이 이삿짐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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