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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289화 (284/1,794)

템빨 23권 - 4화

황비 마리.

4황자의 어미인 그녀는 아들을 황태자로 만들고 제국을 손아귀에 넣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황후 아리아떼를 잃고 시름에 빠진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후, 큰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그녀는 귀족들과 깊은 관계를 맺었고 적기사단을 재편성하여 자신의 수족처럼 부렸다.

한때는 당대의 적기사단이 전대의 적기사단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정 반대다.

각성한 검공 리미트의 가르침을 받고 깨우침을 얻은 당대 적기사들은 전원 검호급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전대 적기사단보다 당대의 적기사단이 훨씬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게 된 것은 당연한 순리였다.

덕분에 마리의 입지가 또 한층 높아졌다.

의도야 어찌됐든, 그녀는 실제로 적기사단을 훌륭하게 육성하였으니 황제가 그녀를 더욱 더 총애하게 된 것이다.

본래라면 기뻐해야할 마리였으나 도리어 골치가 아파졌다.

<다섯 기둥>을 얻은 후부터 적기사단을 등한시하던 황제가 적기사단을 다시금 ‘쓸모 있는 패’로 인식하게 되었으니까.

적기사단이 황제로부터 임무를 하달 받는 횟수가 점차 늘어났고 그 탓에 마리의 무력에 공백이 생기는 경우가 잦아졌다.

‘쥬앙데르크… 나를 사랑하는 건 확실한 것 같지만 컨트롤하는 게 불가능하단 말이지.’

괜히 제국의 황제가 아니다. 재색만으로 현혹시킬 수 있을 정도로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아무리 노력해도 손아귀에 완전히 넣을 수가 없다.

안 그래도 자신의 실체를 알고 있는 아스모펠이 누군가에게 납치당한 후부터 위기감을 느껴온 마리였기에, 그녀는 방어본능으로서 새로운 무력집단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황제나 다른 귀족들의 입김이 닿지 않는, 오로지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개들을 이용해서 말이다.

***

4개월에 단 한 번, 2개의 보름달이 하나로 겹쳐지는 밤이 찾아온다.

그리고 이때 브리니치 앞바다가 간조 현상을 겪으며 비밀의 길을 공개한다.

바다의 깊은 심연까지 이어지는 자줏빛 길.

다름 아닌 세이렌으로 향하는 길이다.

그렇다.

본래 세이렌은 4개월 단위로 입장할 수 있는 왕국이었다.

하지만 유페미나에 의해서 공개된 이후,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이곳을 방문하였다가 여러 개의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이제 세이렌은 언제든지 방문할 수 있는 왕국이 되어버린 것이다.

“정말로 저기가 맞는 거냐?”

라브.

화속성 비룡의 속도를 기준으로, 레이단의 사막을 지난 후 2시간을 더 비행해야 도달할 수 있는 바다다.

그곳 중심부에 휘몰아치고 있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확인하고서 꿀꺽, 마른 침을 삼킨 카츠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세이렌에 입장하기 위해선 저 소용돌이 속으로 몸을 날려야만 한다니?

카츠는 이게 뭔 개소린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기 떨어지면 100프로 죽는 거 아니냐?”

설마, 이놈들이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살해하려는 건 아닐까?

카츠는 템빨단에 가입한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동료들을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가 사람을 믿지 못하는 건 자라온 환경의 문제 탓이기도 했다.

무려 피를 나눈 친형제들과도 후계자리를 놓고 싸워왔으니까.

카츠에게 있어서 인간을 신뢰하는 일은 쉬운 게 아니었다.

“하여튼 왜놈들은 소심하다니까.”

독립투사의 후손인지라 일본인을 증오하는 극검이 마치 러시아의 알렉산더처럼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자칫하면 큰 갈등을 불러일으킬만한 말투였지만 다행히도 카츠는 개의치 않았다.

과거, 공식석상에서 한국인들을 조센징이라고 비하하고 무시하였던 스스로의 과오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츠의 성격이 개차반이라고는 하지만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부정할 정도로 비열하진 않았다.

“네가 나를 싫어하는 걸 이해한다. 이참에 옛날의 내 태도와 발언들을 사죄하고 싶군.”

“…엥?”

카츠가 의외의 반응을 보이자 도리어 극검이 당황했다.

그가 아는 카츠는 원래 개새끼였다. 이렇게 순순한 태도를 보이면 안 되는 거였다.

‘이래서야 나만 나쁜 놈 되는 거잖아?’

어떻게 반응해야하지?

고민하는 극검의 엉덩이를 카츠가 발로 뻥, 걷어찼다.

“넌 왜 사과 안 하냐?”

“야, 이 개X끼야!!”

역시 개차반이다.

아귀도의 입구를 연상하게 만드는 소용돌이 속으로 추락하는 극검과, 그가 죽는지 안 죽는지 물끄러미 확인하는 카츠.

그리고 그 둘이 재미있다는 듯이 싱글벙글 웃고 있는 폰과 레가스.

정신 나간 네 사람을 지켜보면서 후로이는 새삼 실감했다.

‘역시 템빨단에 정상인은 드물다. 자칫 그리드님께 피해가 가지 않도록 나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해.’

그렇게 생각하는 후로이의 특기는 상대방 부모님의 안부 묻기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가 가장 쓰레기였다.

***

수인족.

신체적 특징이 인간과 무척 흡사한 종족이다.

어깨에 달린 아가미와 등과 팔뚝, 그리고 허벅지에 보석처럼 두르고 있는 반짝이는 비늘들을 감출 수만 있다면 어떻게 봐도 인간이었다.

지적능력 또한 뒤처지지 않았으므로 단순하게 ‘물속에서도 살 수 있는 인간’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단, 근력과 마력은 보통의 인간보다 배 이상 강했고 발전가능성도 높았다.

번식력이 떨어지고 육지에서는 오래 살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지만 않았어도, 수인족은 필시 인간 이상의 문명을 구축하고 세력을 떨쳤을 것이다.

“그들의 심장에 축적되어있는 마력을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을 찾아내었다. 너는 당장 세이렌으로 가서 그들의 심장을 최대한 많이… 아니, 모조리 빼앗아 오너라.”

<블러드 카니발>의 최강자로 손꼽히는 백요.

반 년 전, 그녀는 황비 마리를 섬기는 <로즈 나이트>에 입단했고 이때부터 마리에게 충성하고 있다. 마리는 그녀의 물욕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예쁜 건 재수 없어.”

마리의 설명과 명령을 상기하며 세이렌에 발을 들인 백요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름다운 수중왕국 중심부에 솟아있는 모래성의 자태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도망치는 수인족 백성을 쫓아가 죽이고 돌아온 에쌍트가 코웃음 쳤다.

“예쁜 것치고 실속 있는 건 드물지. 수인족은 생선 대가리라서 멍청한가봐? 모래로 성을 쌓다니 말이야.”

에쌍트 또한 백요와 마찬가지로 블러드 카니발 소속이다.

하지만 마리와 일면식도 없었고 로즈 나이트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가 이번 원정에 참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백요로부터 퀘스트를 공유 받은 덕분이었다.

“심장 하나당 80골드라… 100마리만 잡아도 현금으로 환산하면 7천 달러쯤 되는군.”

“천 마리면 7만 달런가! 큭큭! 괜히 트리플 S급 퀘스트가 아니야! 이거 엄청 짭짤한 퀘스트라고!!”

에쌍트 외에도 이번 원정에 참가한 블러드 카니발 소속 플레이어는 많았다.

무려 30명.

블러드 카니발 정원의 3분지 1에 해당하는 숫자가 세이렌에 집결한 것이다.

블러드 카니발이란 전투와 살육에 특화된 존재들의 집단인 바, 이들 30명이 모인 이상 전투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심지어 이들은 각자 용병을 고용하거나 동료들을 불러 모아 약 1,000명에 육박하는 군세를 이루고 있었다.

평균 레벨은 무려 233!

7대 길드? 템빨단?

플레이어로 구성 된 집단 따위는 우리들에게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리라.

이들은 자부심이 넘쳤고 실제로 강했다.

평화에 찌들어 전쟁에 익숙하지 못한 수인족 병사들은 이들 앞에 한낱 먹잇감에 불과했다.

서걱!

세이렌 시가지.

한쪽에서 떨고 있는 수인족 노인을 베어버린 후, 격노하며 달려오는 병사들을 연달아 격파한 에쌍트가 신난다고 웃었다.

“쉽다, 쉬워! 정말로 쉽다고! 이것들 레벨 엄청 낮아!! 천 마리는커녕 만 마리도 잡겠는걸!!”

수인족 백성들의 평균 레벨은 100내외, 병사들의 평균 레벨은 180레벨로 추정됐다.

하나 같이 수속성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변수를 지니긴 했으나 이미 예상했던 바다.

아이템으로 수속성 저항력을 최대한 올리고 왔기 때문에 조금도 위협적이질 않았다.

수인족.

두당 80골드의 가치를 지닌 존재치고는 허무하리만치 약하고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잔뜩 들뜬 채 살육에 심취하는 블러드 카니발과 그들의 군세.

수초와 모래로 아름답게 가꿔진 세이렌이 피로 물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뒤늦게 전장에 당도한 3왕자 골옹이 울부짖었다.

“악독한 인간 놈들…!”

수인족은 호전적이지 않다.

만족을 알았고 남의 것을 쉽게 탐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타인을 속이고, 빼앗고, 죽이기를 개의치 않는 인간이란 족속은 경계와 혐오의 대상이었다.

“어째서냐! 너희 인간들은 어째서 이 바다 속 깊은 곳까지 와서 우리를 침략하고 살육하는 것이냐!! 심지어 저항조차 하지 못하는 아녀자들까지…!!”

몸을 날린 골옹이 에쌍트에게 언월도를 휘둘렀다.

그를 막아낸 에쌍트가 깜짝 놀랐다.

검격을 교환함과 동시에 상체를 기울인 골옹이 바위처럼 단단한 어깨를 날려 온 까닭이었다.

단순한 쾌검사가 아니라 투술에 능한 전사였다.

뻑!

“윽.”

가슴을 얻어맞고 멀찍이 날아간 에쌍트가 곧바로 벌떡 일어섰다.

이기죽거리는 그의 입가가 얄밉게 비틀려있었다.

“고작 물고기 잡는데 딱히 큰 의미가 있을까? 이 비린내 나는 새끼야!”

“괘씸한 놈!”

도발에 더욱 더 분노한 골옹의 움직임이 커졌다. 쾌속을 자랑하는 검술의 효과를 극대화시킬 의도로 더욱 더 강하고 빠르게 검을 휘둘렀으나 이는 빈틈을 유발하고 말았다.

간신히 버티던 에쌍트가 방패로 반격하여 골옹의 턱을 날려버렸다.

“이햐! 역시 멍청한 새끼 상대하는 건 쉽다니깐!!”

이 골옹이라는 놈은 네임드급 NPC 같다.

일반 백성 NPC들을 해치워도 80골드를 받는 판국이니, 이놈을 잡으면 최소 10만 골드쯤 거뜬하게 챙기지 않을까?

욕심에 들뜬 에쌍트가 골옹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골옹은 생각보다 더 강했다.

3차 전직자인 에쌍트조차도 그를 쓰러뜨리긴 불가능했고 차츰 수세에 몰렸다.

“누가 좀 도와줘!!”

뒤늦게 주제를 파악한 에쌍트가 다급히 소리쳤지만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애초에 블러드 카니발이란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상조회에 불과하다. 구성원들 사이에 동료의식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만약, 최소한의 규칙조차도 없었다면 이들은 이미 진즉부터 서로의 등에 비수를 꽂아왔을 것이다.

“죽을 때 방패 떨궈라! 전부터 탐났거든!!”

“캬캬! 꼴사나운 모습 좀 봐라! 한심하네!!”

도와주기는커녕 조롱하는 동료(?)들을 확인한 에쌍트의 독기가 바짝 올랐다.

“개자식들…!”

어떻게든 이 위기를 넘긴 후 다른 놈들에게 골옹의 어그로를 넘기고 싶은 에쌍트였다.

하지만 빌어먹을 수인족 골옹은 빈틈이 없었다.

3차 전직자가 최소 3명은 합을 맞춰야 간신히 레이드할 수 있을 것 같이 강한 존재였다.

‘하필이면 왜 내가 이런 괴물한테 찍혀서는…!’

아직 심장을 27개밖에 모으지 못했다.

고작 2,160골드만 얻고 죽기엔 손실이 너무 크다.

‘망했어!’

에쌍트가 좌절하는 그때였다.

“꺄아악!”

“으앙! 엄마! 아빠!!”

블러드 카니발과 그들의 군세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골드를 축적시키고자 살육의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집안에 숨어있는 수인족 백성들을 남녀불문하고 침략해 죽였다.

절규하는 여성들, 분노하는 노인들, 울부짖는 아이들.

그들의 고통과 슬픔 따위 조금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애초에 이들이 죄의식 있는 인간이었다면 블러드 카니발이라는 집단에 가입하지도, 이번 퀘스트를 수락하지도 않았을 터다.

“그만 둬라! 당장 그만 둬!!”

무고한 백성들이 잔학하게 살육당하는 모습을 골옹은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피눈물을 쏟으며 외치는 그의 옆구리에 에쌍트의 검이 깊숙이 꽂혔다.

“하핫! 싸움 중에 한 눈을 팔아서야 쓰나!!”

“으윽…!”

골옹은 상황이 절망적임을 깨달았다.

침략해온 인간의 숫자보다 수인족 병사의 숫자가 무려 10배 이상 많다지만, 인간들의 강함을 고려해보면 숫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수인족 최강의 전사 중 하나인 자신이 고작 한 명의 인간에게 발이 묶인 것부터가 최악의 상황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형님…!’

1왕자 파옹이 이끄는 본대조차도 인간들에게 고립되어 위기인 듯하다.

예언가 미옹의 말대로 파도 신은 우리 수인족을 버리시는가?

자신이 상처를 입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덤벼오는 인간들을 보면서, 골옹이 질끈 눈을 감는 순간이었다.

콰자자자작!!

하늘에서부터 벼락처럼 떨어진 섬광이 에쌍트의 머리를 반으로 쪼갰다.

예상치 못한 습격.

그것도 어마무시한 공격력을 내포하고 있는 스킬 공격에 적중당하고 스턴에 빠진 에쌍트가 떨리는 시선을 위로 돌렸다.

그리고 한 사내를 보았다.

“아름다운 피의 강이다.”

씨익.

흰 이를 드러내며 웃는 사내의 아이디는 카츠.

그가 짓는 미소는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에쌍트를 비롯한 블러드 카니발의 그 누구와 비교해도 그가 제일 미친놈 같았다.

“블러드 워리어…?”

고오오오오오오-

전장에 흐르는 수인족들의 피가 서서히 하늘 위로 떠오르는 광경, 기이하고 잔혹하면서도 아름다워 사람들의 넋을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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