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3권 - 2화
“할 이야기라는 게 뭐야?”
폐막식이 끝난 후.
에펠탑 인근의 한 레스토랑에 템빨단원들이 모였다.
다국적 길드답게 모두의 피부색과 눈동자색이 달랐지만 이들이 함께 있는 모습에 위화감은 조금도 없었다.
이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신뢰와 애정이 가득했고 누가 봐도 한 가족 같았다.
“대머리.”
“닥쳐! 대머리가 아니라 삭발이다!”
물론 폰과 반트너 같은 예외도 있었다.
“크라우젤님을 템빨단에 영입하도록 하죠.”
소란 속에서 라우엘이 꺼낸 서두는 놀라웠다.
일행 중 몇 명이 술렁였다.
“천외천을 템빨단에?”
“어떻게요?”
폰과 레가스의 질문이었다.
이들은 다른 템빨단원들과 달리 크라우젤 영입 계획을 몰랐던 인물들이다.
물론 그리드도 마찬가지였다.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그들에게 라우엘이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저희에게는 크라우젤님을 영입할 권리가 있는 거죠.”
“…”
한 치의 거짓과 과장도 없이 전말을 진술하는 라우엘.
그의 표정은 당당했다.
크라우젤 영입 작전은 오로지 그리드와 템빨단을 위해서 계획하고 실현시킨 바, 라우엘은 그리드가 기뻐해 주리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그리드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잠시 생각해보다가 맥주잔을 비운 그리드가 충격적인 반응을 보였다.
“크라우젤은 영입하지 않는다.”
“…예?”
예상치 못한 일이다.
어째서 최강의 전력을 마다하는가?
라우엘은 물론이고 템빨단원 대부분이 당황했다.
“크라우젤은 반드시 영입해야할 인재입니다! 템빨단의 동맥에 크라우젤의 피가 흐르게 된다면! 우리 템빨단은 종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질 것이며 앞길에 거칠 게 없어질…!”
라우엘이 크라우젤의 가치를 피력하기 시작했지만 그리드가 중간에 잘랐다.
“동료라는 게 강제로 얻을 수 있는 거냐?”
폰이 덧붙였다.
“크라우젤은 늘 혼자서 게임을 플레이해온 유형의 인물이다. 그가 집단에 소속되는 것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텐데? 은혜를 빌미로 그를 영입해봤자 진정한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언젠가는 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이는 위험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
라우엘이 반박했다.
“사람은 변하게 마련입니다. 당장 우리들만 봐도 어떻습니까? 우리가 동료가 된 이유 또한 결코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며, 이를 충족해가는 과정에서 마음을 열고 진정한 동료로 거듭나게 된 것이죠. 크라우젤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이 당장은 반발심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는…”
“아니, 됐어.”
그리드의 뜻은 단호했다.
“새장에 가둘 수 있는 존재도 아닐뿐더러, 애초에 우리는 그에게 집착해야할 정도로 약한 집단도 아니다.”
크라우젤은 Satisfy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쭉 솔로 플레이만을 고수해왔고 그 결과 지존이 된 인물이다.
그의 플레이방식이 그에게 적합하다는 뜻이다.
이제와 집단이라는 틀에 그를 가둬놓고 플레이 방식을 바꾸게 만들었다가는, 크라우젤은 더 이상 크라우젤이 아니게 될 수도 있었다.
실제로 CD게임에서도 많이 나오는 사례가 아닌가?
적일 때는 지존급으로 세던 캐릭터가 동료가 되더니 약해져버리는 경우!
“그건 단순한 억측에 불과합니다!”
끝까지 반발하는 라우엘이었다.
템빨단원 대부분이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기껏 애써서 최강의 전력을 영입할 기회를 얻었건만, 어이없게도 내부 반발로 인해서 기회를 놓치게 생겼으니 얼마나 곤혹스럽고 분하겠는가?
그리드 또한 라우엘의 마음을 헤아렸기에 숨기지 않고 솔직한 심경을 밝혔다.
“라우엘, 나는 크라우젤에게 졌다.”
크라우젤은 그리드의 목표였다. 반드시 도달하고 싶은 하늘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도달하지 못했고 다시 기회를 엿봐야만 했다.
“누군가는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크라우젤을 라이벌로 생각하고 있어. 나는 언젠가 그를 완전히 넘어설 때까지 계속 경쟁하고 싶다.”
“…아.”
라우엘이 깨달았다.
‘내가… 내가 그리드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거구나!’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이기지 못한 경쟁자를 ‘수작을 부려서’ 수하에 둔다는 것, 무척이나 불편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일 터다.
그리드의 입장을 납득한 라우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크라우젤님과의 거래는 없던 일로 하도록 하지요.”
그리드가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없던 일로 해?”
“…영입하지 말라면서요?”
황당해하는 라우엘에게 그리드가 사악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영입하지 말라는 게 꼭 거래를 백지화시키라는 뜻은 아니지.”
***
폐막식이 끝나고 국가대항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분산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세계 각국 언론에 새로운 화두가 올랐다.
‘랭커 목록에서 크라우젤의 이름이 사라졌다.’는 속보가 전 세계에 의문과 충격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 탓에 기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크라우젤은 러시아 선수 전용기로 피신을 오는 수밖에 없었다.
‘라우엘이 30분 후에 연락을 주겠다고 했으니.’
그 전까지 잠시 Satisfy에 접속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전용기 내에 설치 된 캡슐을 이용한 크라우젤이 Satisfy에 접속했다. 그리고 곧장 상태창을 열었다.
이름:크라우젤
레벨:1
직업:검성
*도검류 무기를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도검류 무기 장착 시 숨겨진 기능을 이끌어냅니다.
*새로운 검술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창조 횟수는 <완전한 소드 마스터리>스킬 레벨이 하나 오를 때마다 추가됩니다.
칭호:전설이 된 자
칭호:동대륙의 선인
칭호:트롤왕의…
칭호:…
…
..
생명력:1,485/1,485
마나:100/100
근력:50(+120) 체력:15(+50)
민첩:30(+60) 지력:10(+10)
평정:10 불굴:10
위엄:10 통찰력:10(+40)
재생:30
초감각:0.1
‘상상을 초월하는군…’
검성으로 전직했을 당시 크라우젤은 내심 큰 충격을 받았었다.
레벨이 1로 떨어졌을 뿐더러 그간 힘들게 단련해온 스킬과 능력치들도 대부분 초기화되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칭호들은 남아있었고 검성의 기본 능력치와 스킬이 워낙 대단했다.
러시아가 종합순위 1위를 차지한 덕분에 <경험치 획득률 30퍼센트 상승 버프>까지 받았으니 레벨을 다시 복구하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다.
특히 크라우젤은 패시브 스킬 <예리한 감각>이 사라지고 본래 액티브 스킬로 분류되었던 <초감각>이 스탯으로 변화한 점에 주목했다.
‘초감각의 패시브화…’
그것도 제한 없이 육성 가능한 패시브화라고 보면 될 터.
단기적으로 봤을 때는 과거의 초감각과 비교해서 그 성능이 미약할지언정 훗날엔 다를 것이다.
초감각 스탯을 제대로 육성한다면, 크라우젤은 항시 초감각 상태를 유지하는 절대자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액티브 스킬이었을 당시의 초감각과 비교하면 그 성능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았지만 말이다.
-크라우젤! 잠시 나와 봐야겠는데?
게임에 접속해있는 크라우젤에게 캡슐외부로부터 회신이 왔다.
알렉산더였다.
스킨헤드 알렉산더.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로 본래는 크라우젤을 무시하고 적개심을 보였던 그가 이제는 크라우젤의 충견을 자처하고 있었다.
크라우젤에게 까불다가 본때를 보기도 했고, 그보다는 러시아를 1위로 만들어준 크라우젤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느낀 까닭이었다.
-뭐냐?
이유를 묻는 크라우젤에게 알렉산더가 설명했다.
-웬 원숭이 새끼… 아니, 한국인 하나가 너를 만나야겠다면서 비행기로 쳐들어왔어.
-그게 누구지?
-그, 그리드다. 아무래도 너한테 PvP에서 진 게 억울해서 시비를 걸러 온 것 같은데? 어떡할까? 혼쭐을 내서 돌려보낼까?
-아니, 기다려라.
크라우젤이 즉각 로그아웃했다.
그리드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그는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라우엘과 이야기가 끝났나보군.’
이제 그리드는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을 터.
충성의 서약을 받으러 왔을 것이다.
본래 집단이라는 것은 상하관계에 집착하는 법이니까.
씁쓸한 미소를 지은 크라우젤이 캡슐에서 나왔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하윽…!”
“하으응~~”
비행기 출입구.
우락부락한 체격을 지닌 러시아 선수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드의 손끝이 그들의 몸을 한 번 스칠 때마다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후, 후아아앗~~!”
또 한 명의 러시아 선수가 그리드의 손에 닿자마자 괴상한 신음을 흘렸다.
동시에 눈을 까뒤집고 얼굴을 붉히며 흐느적, 주저앉는 모습이 마치…
이하 생략.
“저, 저놈 저거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지 모르겠다고.”
지레 겁을 먹은 알렉산더가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크라우젤의 등 뒤로 숨었다.
손가락 하나만으로 동료들에게 황홀경(?)을 선사하는 그리드가 알렉산더는 두려웠던 것이다.
“안녕?”
크라우젤을 발견한 그리드가 인사해왔다.
통역기를 벗은 크라우젤이 한국어로 화답했다.
“반갑다. 무려 2시간 만이군.”
“고려인이라더니 한국말 잘 하네?”
“모국어를 못할 리 없지.”
“흐음…”
쓸모없어진 통역기를 벗은 그리드가 크라우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전체적인 몸매의 윤곽은 사내의 그것이 맞았지만, 크라우젤은 너무 여자같이 생겼다. 그것도 예쁜 여자 말이다.
긴 속눈썹과 수려한 콧대, 그리고 왠지 야한 그윽한 눈빛을 유심히 관찰하던 그리드가 결론부터 말했다.
“친구하자.”
“…뭐?”
빨리, 지금 당장 템빨단에 가입해서 자신을 위해 싸우라고 말할 줄 알았던 그리드가 의외의 말을 꺼내자 크라우젤은 당혹스러웠다.
성큼, 그에게 가까이 다가선 그리드가 손을 내밀었다.
“서로가 힘들 때 도울 수 있는 사이가 되자고. 앞으로도 이번처럼 혼자서 외롭게 싸우고 싶지 않다면.”
왕따였던 그리드는 알고 있다.
혼자의 한계를, 그리고 고독을 말이다.
또한 그리드는 언젠가 크라우젤의 힘이 필요할 것이란 사실도 예상하고 있었다.
“지금 나는 당신에게 길드 가입을 권유하는 게 아니야. 그저 필요할 때 서로에게 의지하자는 거지.”
“…어째서?”
크라우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내게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지?”
그리드가 굳이 길드 가입을 강요하지 않는 이유.
나의 입장을 헤아렸기 때문일 터다.
왜 이리도 큰 호의를 보이는가?
의문을 품는 크라우젤에게 그리드가 간단히 답했다.
“나에게는 앞으로도 경쟁상대가 필요하거든. 나는 당신의 발전을 원해. 더욱 더 강해지는 당신을 상대로 싸우고, 때로는 의지하면서 발전하고 싶다. 그리고 애초에, 길드에 나보다 강한 사람은 피아로 하나면 이미 족해.”
“…”
과거, 레이단에서 만났을 당시와 비교하면 지금의 그리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얼굴에 그늘 한 점 없었고 눈빛은 당당했다.
웃기게도, 의지하고 싶어지는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두근거림을 느낀 크라우젤이 그리드의 크고 거친 손을 맞잡았다.
“기쁘다.”
필요할 때 불러주면 언제든지 달려가겠다. 그리고 고맙다.
라는 말은 삼키는 크라우젤이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리드가 알아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시나 그리드는 알고 있었다.
“고맙지? 고마우면 한 가지만 약속하자. 내가 부를 때마다 바로바로 뛰어와. 라우엘 덕분에 어머니의 병을 고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 정도 은혜는 갚아야지?”
“…알았다.”
그리드가 말하는 친구의 개념이란 혹시 꼬붕인가?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크라우젤의 어깨를 그리드가 상냥하게 두드려주었다.
“어머니께서 회복하시면 꼭 한국으로 모시고 놀러 와. 거하게 대접해드릴 테니까.”
“…그래.”
고맙다.
드물게 미소 짓는 크라우젤의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아름다웠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이 오래토록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크라우젤은 간절히 바랐다.
이날.
국가대항전에 참가했던 선수들이 전원 각자의 조국으로 떠났다.
그들을 기다리는 건 새로운 모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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