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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284화 (279/1,794)

템빨 22권 - 22화

‘이건 예측이다.’

자진모리는 아무런 예비동작도 없이 전개되는 발차기다.

지근거리에서, 그것도 사각으로부터 목표물을 타격하기 때문에 상대는 보고 대응하기가 불가능했다.

한데 그리드는 갓 핸드로 완벽하게 막아냈다.

그리드가 ‘과거 단 한 번 당했던 기술’의 발동 타이밍을 ‘난전 속’에서도 염두에 두고 미리 대처하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 정도였나.’

크라우젤은 본인이 그 누구보다 더 그리드를 높이 평가한다고 믿어왔다. 심지어 저 라우엘, 데미안, 극검보다도 더 말이다.

하지만 이제 보니 도리어 저평가하고 있는 듯했다.

진정한 그리드의 실력은 크라우젤의 상정범위를 넘어섰다.

‘믿기지 않는 성장속도다. 피아로님과 특훈을 쌓아온 덕분일까?’

설마, 그리드가 번헨 열도를 60번째 섬까지 돌파하였으리라곤 상상 못하는 크라우젤.

그가 그리드에 대한 평가를 한 차원 높였다.

‘상정 불가.’

미리 준비해놨던 수 따위 싹 버린다. 실시간으로 최선을 모색하며 싸운다.

툭.

투둑!

판단하는 크라우젤의 복부로부터는 핏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곳곳에 파괴의 흔적이 남은 무대 중심이 붉게 젖어갔다.

이는 무척이나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저, 저럴 수가…”

“크라우젤이 상처를 입다니…?”

관중은 마치 하늘이 무너진 것만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천외천.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하였던 높디높은 하늘.

그가 일대일 대결에서 상처를 입은 적이 있던가?

없다.

크라우젤은 무적이었고 그것이 상식이었다.

한데 지금 이 순간 그리드가 파괴해버린 것이다.

상식을!

『크라우젤이 그리드에게 패배했었다는 뉘앙스로 말했던 거… 말장난이 아니라 사실이었던 걸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크라우젤이 일대일 승부에서 진다는 건 결단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애초에 그는 평타와 논타켓 스킬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 괴물이지 않습니까? 누구라도 그를 이긴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리드가 타켓팅 스킬로 기선제압에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전투의 양상은 금세 또 바뀔 테지요. 크라우젤에게 유리한 쪽으로 말이죠!』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크라우젤의 승리를 믿고 있었지만 그리드는 달랐다.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크라우젤의 복부를 꿰뚫었던 대검을 회수한 그가 동시에 이야루그트를 휘둘러서 공격을 연계시켰다.

그리드의 얼굴에는 승리에의 열망이 깃들어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두더지 승천.”

크라우젤의 레벨은 그리드보다 40이상 높다.

또한 온갖 효력을 발휘하는 칭호를 무려 15개 이상 보유하였으므로 극살(極殺) 한 방에 쓰러질 리 만무했다.

그리드가 연계하는 공격을 회피함과 동시에 백아도를 아래로부터 빛살처럼 쏘아내는 그의 반격을 그리드가 허용하고 말았다.

이야루그트와 그리드의 대검을 X자로 교차하여 방어를 시도했으나 크라우젤이 틈새에 단도를 꽂아 넣어 방해했다.

서걱!

“큽…!”

턱 끝을 베인 그리드가 상태이상 ‘실신’에 저항하며 파그마의 검무, 극(極)을 전개하였다.

도중에 크라우젤의 단도에 옆구리를 2회 또 찔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극살(極殺)과 마찬가지로 타켓팅 스킬인 극(極)을 토대로 크라우젤에게 데미지를 누적시키면 전투를 주도할 수 있으리란 확신이 그에게는 있었다.

하지만 극(極)의 파괴력은 극살(極殺)과 달라 크라우젤이 맞받아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늘 찢기.”

하늘 찢기는 백의 검객의 궁극기 중 하나다.

마나 소모가 크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지녔으나 대상의 방어력을 일정수준 무시하며 높은 위력을 발휘하는 ‘반격 스킬’이었다.

꽈작!

꽈자자자자작!!

그리드가 등지고 있는 하늘 위로 거대한 야수의 발톱이 아로새겨졌고,

콰차창!!

극(極)의 기운이 파쇄되면서 이야루그트와 대검의 내구력이 손상됐다.

이어서 그리드의 넓은 가슴으로부터 다섯 줄기의 핏줄기가 솟구쳐 올랐다.

“크아아악!”

그리드가 커다란 비명을 내지르는 경우는 드물다.

워낙에 방어력이 높아서 통증 자체를 거의 느끼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9진(眞) 백아도에 극(極)을 반격당하면서 입게 된 데미지는 엄청났다. 방어력이 거의 무시되었고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주춤거리는 그리드의 안면을 크라우젤의 발차기가 걷어찼다.

퍼엉!

풍선 터지는 듯한 폭발음이 발생했지만 다행히 그리드의 얼굴은 무사했다.

제아무리 크라우젤이라도 일반적인 발차기로 그리드에게 타격을 입히는 건 무리가 있었다.

단, 그리드의 얼굴을 발판으로 삼아서 유리한 위치를 점령하는 것은 성공했다.

검정 도포를 펄럭이며 허공으로 떠오른 크라우젤의 백아도에 강렬한 검기가 맺혔다.

그리드의 기억에도 있는 특정 스킬의 전조였다.

‘유성검!’

쿠오오오오오오오오!!

백광보를 돌진기로 응용하여 지상의 그리드를 노리고 하강하는 크라우젤.

그가 마치 운석과도 같은 기세로 강맹한 기파를 발생시키자 그리드가 서있는 무대의 반경 10미터가 균열을 일으키더니 급기야 움푹 파였다.

그리드는 기파에 짓눌려 굽혀지려는 허리를 세우느라 안간힘을 써야만 했고 둔해졌다.

‘마력 탐지는 아직 쿨타임…!’

백광보의 은신 효과 때문에 크라우젤의 위치를 놓친 그리드가 결국 회(回)의 사용을 포기했다. 그리고 <피의 울음>을 발동시켰다.

키이이이이이잉!!

이야루그트가 기성을 토했다.

과거, 레이단에서 크라우젤의 유성검을 캔슬 시킨 바 있는 균형 상실 유발 스킬이었다.

크라우젤의 반지 중 하나가 빛을 번뜩였다.

퍼엉!

각성의 효과를 지닌 반지였다.

폭음을 터뜨리며 착용자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어준다.

덕분에 크라우젤은 귓가에 들려오는 이명을 떨쳐낼 수 있었고 무사히 유성검을 완성시켰다.

쩌저저저저저저저저정!!

“크아아아악!!”

란스티어의 망토와 삼겹갑, 뿔 투구, 큰 장갑 등 최고의 방어력을 자랑하는 아이템들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고 표현할 수 있으리라.

대상의 방어력에 비례한 공격력+고정 데미지가 깃든 유성검의 위력이 그리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탓.

떨어진 기세와 달리 가볍게 착지한 크라우젤이 한쪽으로 단도를 집어던졌다.

그러자 저 멀리, 소형 용광로 앞에 모여서 은밀하게 망치질 중이던 4개의 갓 핸드가 단도 한 자루에 차례대로 타격을 입더니 경직되었다.

핏빛으로 물든 그리드의 시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아이템 합체>의 발동이 취소되었습니다.]

‘빌어먹을!’

실전에서 써먹기 더럽게 힘든 스킬이다.

생명력이 어느덧 3분의 1밖에 남지 않은 그리드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역시 흑화 없인 안 된다.’

흑화가 상승시켜주는 능력치에 의존해야지만 크라우젤을 상대로 동률을 이루거나 우위를 노려볼 수 있다.

하지만 망설여진다.

이야루그트의 경험치가 어느덧 99퍼센트를 달성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앞으로 50합 정도만 버티면 등급을 올릴 수 있어.’

흑화로 생명력을 낮추면 50합을 겨룰 동안 버티기 더 어려워진다. 이야루그트의 등급이 오르기 전에 둘 중 하나가 죽고 승부가 끝날 터였다. 물론 그리드가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우선 버틴다.’

마음을 독하게 먹은 그리드가 대검을 인벤토리로 돌려놓았다.

크라우젤을 상대하면서 쌍검술을 완벽히 구사할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할 자신이 없었으므로 이야루그트 한 자루에 집중할 심산이었다.

‘뭔가 노림수가 있는 건가?’

끝까지 흑화를 사용하지 않는 그리드를 크라우젤이 경계하기 시작했다.

극살(極殺)을 허용하고 3분의 1이상 깎였던 생명력은 <트롤왕의 저주> 칭호 효과로 인해서 어느덧 꽤 회복되어가고 있었다.

하여 시간은 자신의 편이라고 믿었건만, 그리드의 태도를 보아하니 장기전이 꺼려졌다.

‘시간을 끌어선 안 될 것 같군.’

‘한시라도 빨리 어머니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드리고 싶다.’라는 마음에서 발생한 초조함으로 내리는 섣부른 판단이 아니다.

현재 크라우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냉정하고 면밀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스스로의 판단을 믿었다.

‘속전속결!’

쿠르르르르르르릉!!

맑디맑은 하늘 너머로부터 천둥소리가 들려왔고 대지는 격동하기 시작했다.

무대 위에 서있는 크라우젤과 그리드의 몸이 격하게 흔들렸고, 유성검의 여파로 반파 된 무대가 기울어지더니 급기야 무너져 내렸다.

각국 방송사의 진행자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저건…!』

『크라우젤이 타르마를 해치울 때 사용했던 광역 스킬의 전조입니다!』

천지파열무.

국가대항전을 앞두고 크라우젤이 동대륙에서 습득해온 이 광역스킬은 무려 유니크 등급의 스킬이었다.

범위면 범위, 위력이면 위력 어느 면에서도 부족한 부분이 없다.

하늘과 땅 전역을 장악해버리는 최강의 광역기였다.

“천지파열무.”

쿠콰콰콰콰콰콰쾅!!

하늘에서부터는 벼락이 깃든 검기의 폭우가 쏟아져 내리고, 사방으로 갈라진 지면으로부터는 용암이 솟구쳐 오른다.

피할 길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고 그리드는 그대로 큰 타격을 입을 것처럼 보였다.

러시아의 국민들이 환호했다.

“크라우젤이 이겼다!”

“러시아가 1등이다!”

반면 대한민국 국민들은 좌절을 금치 못했다.

“저거 못 피하는 스킬 같은데…”

“전황 확 기울 듯…”

세계인들의 희비가 교차하고 국가대항전의 시청률이 정점일 찍는 그 순간!!

[호칭 <은밀한 영웅>의 효과를 개방합니다.]

[적들의 의식을 분산시킵니다.]

어그로 해제.

[스킬 <위세>가 발동합니다. 이 효과는 10초 동안 유지됩니다.]

자신을 중심으로 50미터 범위 내에 존재하는 모든 적들의 방어력을 50퍼센트 저하.

[스킬 <종횡무진>을 1회 사용할 수 있습니다.]

200미터 범위 내의 ‘원하는 대상’에게 접근할 때까지 타켓팅 스킬을 제외한 모든 공격을 회피하는 최상위 돌진기 생성.

퍼어어어어엉-!!

어느덧 <신속한 몸놀림>까지 전개한 그리드의 신형이 벼락처럼 튀어나갔다.

이동속도가 어찌나 빠른 지, 그의 이동경로에 잔광이 남을 지경이었다.

한데 심지어 직진이동도 아니었다.

그리드의 신형은 연신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천지파열무가 발생시킨 검기의 폭우와 벼락, 그리고 분출되는 용암들을 모조리 회피해버렸다.

“……!”

마치 크라우젤을 보는 듯한 움직임이다.

경이적인 그리드의 컨트롤 솜씨에 놀란 관중들과 시청자들이 할 말을 잃었고,

“흑화. 대장장이의 분노. 그리고 연살(聯殺).”

크라우젤을 상대로 50합을 겨뤄?

미친 짓이다.

지금 승기를 잡지 않으면 진다!

퍼엉!

결단을 내린 그리드의 이야루그트가 1회.

퍼펑!

2회.

퍼퍼펑!!

3회.

크라우젤을 찔렀지만 맞추지 못하고 파공성만 터뜨렸다.

하지만 무의미하진 않았다.

그리드의 공격속도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고, 또한 갓 핸드들까지 협공을 가해왔으므로 크라우젤은 회피하는 과정에서 자세가 무너지고 말았다.

‘늦었다…!’

쩌어어어어어어엉!!

결국, 연살(聯殺)의 4회째 타격이 크라우젤에게 정확히 꽂혀 들어갔다.

회피를 포기한 크라우젤의 선택은 방어였다. 물론 평타로 막을 수는 없었고 어떻게든 데미지를 최소화시키고자 <독수리 강림>으로 그리드의 이야루그트를 찍어 눌렀다.

하지만 풀 버프 상태의 연살(聯殺)에 실린 공격력이 월등히 높았으므로 독수리 강림으로는 이야루그트의 기세를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푸우욱!!

가슴을 관통당하는 크라우젤!

생명력을 5분의 1만 남겨놓고 살아남은 그가 휘청거리면서도 곧장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이어서 백아도를 아래서 위로 사선으로 그었다.

쩌엉!

간발의 차이로 막아낸 그리드가 반격을 가했고, 이를 또 막아낸 크라우젤이 똑같이 반격으로 응수하기를 반복했다.

채챙!

채채채채채챙!!

쉬지 않고 검을 교환하는 두 사람의 몸이 서서히 하늘 위로 떠올랐다.

육체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검과 검이 맞부딪칠 때마다 발생하는 반발력에 저항하지 않고 순응함으로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

크라우젤이 강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강했단 말인가?

또한, 크라우젤의 실력을 온전히 끌어내고 있는 그리드는 또 어떻고?

국가대항전 내내 활약했던 각국의 랭커들이 수준 차이를 절감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는 저들의 실력 중 절반도 체험하지 못했던 거야.’

격이 다르다.

크라우젤이라는 하늘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이 떠있었고, 그리드는 공든 탑 정도가 아니라 철옹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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