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2권- 20화
『그리드 승리!!』
‘어이가 없네.’
몇 대 때리지도 않았는데 잿빛으로 산화해버리는 딘!
그리드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4강까지 올라왔기에 강한 줄 알았더니, 왜 이렇게 약한 거야?’
이야루그트의 현재 경험치는 98.3퍼센트. 등급 상승이 머지않았다.
크라우젤을 만나기 전까지 최대한 경험치를 누적시키는 것이 그리드의 목표였다.
하지만 딘은 약해도 너무 약했다. 몇 대 톡하고 치니까 죽어버렸다. 의도치 않은 일이라 당혹스러울 따름이다.
‘힘 조절을 더 했어야 했어.’
하오, 크리스, 데미안에 이어서 폰에 이르기까지.
PvP 내내 최강자들만 상대하느라 감을 잃고 말았다.
딘도 강할 줄 알고 힘 조절을 너무 적당히 한 게 실수였다.
“크음…”
불편한 기침을 토하며 로그아웃하는 그리드.
미국 대표들과 나란히 앉은 채 그를 바라보는 라우엘의 애간장이 녹고 있었다.
‘이제 모든 건 크라우젤님께 달렸다.’
원점으로 돌아왔다고 표현함이 옳다.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는 일 없이,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싸워 원하는 결과를 만들 것.
크라우젤이 늘 해왔을 일이다.
‘힘내십시오.’
어머니를 구하고 싶으시다면.
불끈, 라우엘이 주먹을 말아 쥐는 그때 3위 결정전이 시작됐다.
준결승전에서 크라우젤에게 패배한 스컬과 그리드에게 패배한 딘의 싸움이었다.
승자는 당연히 스컬이 되었다.
스컬은 크라우젤을 상대로도 제법 치열한 접전을 펼친 바, 통합랭킹 8위인 그의 실력은 다른 우승후보들과 비견해서 결코 부족함이 없었다.
“잘 싸웠다, 스컬!”
“당신의 활약을 잊지 않을 거예요!!”
미국인 관중들이 스컬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조국을 종합순위 1위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마지막까지 분투한 스컬의 활약이 미국 국민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선사한 것이다.
“내년엔… 내년엔 다를 거다…”
스스로의 무력함에 분개하며 눈물까지 글썽이는 스컬의 모습이 모두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라우엘 또한 죄책감에 휩싸였다.
크라우젤을 템빨단에 영입하겠단 이유로 공성전에서 고의적으로 패배했고, 이로 인해서 조국이 종합순위 1위를 놓쳐버렸으니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할 리 없다.
하지만 라우엘의 본분은 템빨단의 참모였고, 그 역할에 충실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이 사명을 짊어진 자의 숙명… 이생에서의 죗값은 다음 생에 치르도록 하지요…”
오글오글!
갑자기 영문 모를 혼잣말을 지껄이는 라우엘 탓에 미국 대표들의 손발이 오그라졌다.
***
대망의 PvP 결승전!
무려 한 달 가까이 진행되었던 국가대항전의 대미를 장식할 무대이니만큼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가 무척 높았다.
Satisfy가 뭔지 잘 모르는 노인들조차 채널을 고정해놓고 있었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특히 한국과 러시아가 난리였다.
이번 대회의 결과로 인해서 국가대항전 일등국이 정해졌으므로 그리드와 크라우젤을 응원하는 각국 국민들의 염원이 뜨거웠다.
『그리드가 너무 자랑스러워요. 오로지 그리드 덕분에 Satisfy종주국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잖아요? 인터넷 상에서 한국을 우습게 여기던 외국인 플레이어들이 더 이상 찍소리 못하는 걸 볼 때마다 너무 통쾌해요.』
『대한민국이 종합순위 1위를 노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리드 덕분에 국대전 시청할 맛이 납니다!!』
『국대전 기간 동안 치킨 매출이 2,000퍼센트나 상승했어요! 그리드 선수가 다 망해가던 우리 가게를 살려주었습니다! 가문의 은인인 셈이죠!!』
『저희 부모님께서 연세가 꽤 있으셔가지고 Satisfy에 관심도 없으셨는데… 요즘 뉴스에서 하도 그리드와 국대전 이야기가 나오니까 관심을 갖기 시작하시더라고요. 덕분에 집에 캡슐 한 대 더 장만했습니다. 물론 혜성전자에서 구매했죠.』
『최근 70세 이상 연령대의 Satisfy회원가입률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노인들은 Satisfy 덕분에 제2의 삶을 살게 된 기분이라며…』
『S.A그룹과 혜성그룹의 주가가 연일 폭등하는 가운데 한국의 경제상승률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 현상을 ‘그리드 효과’라고 명명하였으며…』
『최근 일본인, 중국인 관광객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드와 템빨단원들의 명의로 건설되고 있는 서울 외곽의 빌딩촌을 방문하고 있는데요. 이곳이 새로운 번화가가 될 가능성을 시사하는 현상이라고 경제학자들은 입을 모아 말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케이팝그룹 <우린 레전드리 클래스>, 일명 우레클이 PvP 결승전에 앞서서 신곡을 발표하였습니다. 신곡의 제목은 <갓리드 찬양해>로, 그리드가 국가대항전에서 우승하기를 염원하는 내용의 가사가 호평을 받고 있는데요. 출시 후 단 2분 만에 각종 음원사이트 실시간 순위 1위를 차지했습니다. 우레클의 소속사 마조엔터테이먼트는 갓리드 찬양해가 빌보트 차트에도 진입하게 될 거라는 확신을 보였습니다.』
『귀여운 외모와 글래머러스한 몸매로 사랑 받고 있는 톱스타 송애교씨가 어젯밤 비밀리에 파리로 출국하였다는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평소 송씨는 SNS에 그리드를 응원하는 글귀를 남기곤 했었는데요. 네티즌들은 송씨가 그리드를 응원하고자 직접 파리로 출국한 것이라 보고 있으며, 그리드가 유라, 지슈카에 이어서 송씨마저 마수에 빠뜨리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여야 대표들과의 오찬에서 제2, 제3의 그리드를 육성해야한다고 말했고, 여야 대표들은 이례적으로 합심하여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정부와 국회의 뜻이 맞은 이상 Satisfy 랭커 육성 정책이 근시일 내로…』
그리드가 발생시킨 파장이 대한민국 전체를 뒤집어놓고 있었다.
그리드의 부모님과 여동생 세희는 사태가 너무 커지자 걱정이 앞섰다.
사람들의 과도한 관심이 혹시 그리드에게 부담감을 주는 건 아닐까, 별에 별 사람들이 그리드에게 들러붙어서 안 좋은 방향으로 현혹하진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었다.
그리드는 이미 레이단의 영주가 됐던 시점부터 대중의 관심에 익숙해진 인물이었고 더 이상 어리숙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잘 관리할 줄 알았다.
또한 사람이 변하면 환경도 변하는 법이다.
지금의 그리드 곁에는 수많은 인재가 모여 있었고 그들이 그리드를 적극적으로 보좌하고 있었다.
***
『결승전까지 쟁쟁한 우승후보들을 꺾으면서 올라온 그리드의 실력을 감히 누가 부정하겠습니까? 그리드는 최강입니다.』
『단, ‘크라우젤 다음가는’이라는 전제가 붙는 것 같군요. 결승전을 앞두고 다시 진행한 우승자 예측조사에서 그리드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은 여전히 5프로대에 불과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라우젤의 승리를 확신하는 분위기네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크라우젤의 무패신화는 유명하고 실제로 그가 보여준 무위는 그리드를 초월하고 있으니까요.』
『한 가지 변수는 그리드가 불사 스킬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크라우젤의 초감각을 그리드가 불사로 버티느냐, 버티지 못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 같군요.』
“…”
결승전 전까지 주어진 30분가량의 휴식 시간 동안 크라우젤은 대기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명상하는 그의 뇌리에 맴도는 존재는 오직 하나, 어머니였다.
‘어머니.’
그 어떤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
젊은 나이에 일찍 남편을 여의고, 혼자만의 힘으로 아들을 키우고자 평생을 희생하신 그분의 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
“이번 신약의 효과는 확실하오. 임상실험까지 완벽하게 끝났지. 단, 상용화 계획은 아직 없소이다. 왜냐고? 그 막강한 가치를 알고 있기 때문이지. 신약은 우리 러시아의 강력한 교섭 무기 중 하나가 될 것이오. 하하, 약은 사람의 병을 고치는데 쓰여야한다고? 맞는 말이지. 단, 가치 있는 사람에게만.”
얻고 싶다면 러시아의 위상을 높여라!
러시아 정부요인의 제안을 다시 한 번 상기한 크라우젤이 조용히 눈을 떴다.
그리고 늘 목에 걸고 다니는 펜던트를 열어 어머니의 초상을 시야에 담았다.
“어머니…”
크라우젤의 기억 속에 건강한 어머니의 모습은 없었다.
선천적으로 약한 몸을 이끌고 홀로 아들을 키우느라 젊은 시절을 희생하셨고, 이후 중년이 되어서는 병에 들어 고생만 하신 분이다.
내가 그분의 은혜에 보답할 기회 따윈 없었다.
그래, 이번이 유일무이한 기회다.
“…반드시.”
반드시 당신의 건강한 미소를 보고 싶습니다.
‘이긴다.’
결코 패배해선 안 된다.
마음을 독하게 먹은 크라우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승전 시작까지 5분 남았다.
***
“어째서 라우엘은 그리드에게 진실을 알리지 않는 거지? 그리드에게 크라우젤의 사정을 설명해주면 간단히 해결 될 문제잖아?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만큼 그리드는 패배를 선택할 거고 크라우젤은 템빨단에 가입할 테니까.”
반트너의 의문이었다.
지슈카가 어리석은 그의 의문을 간단히 해소시켜주었다.
“라우엘은 그리드에게 부담감을 안겨주고 싶지 않은 거야.”
라우엘이 크라우젤을 영입하려는 이유는 순전히 그리드와 템빨단을 위해서였다.
또한 그리드가 크라우젤과의 승부를 얼마나 고대해왔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크라우젤을 영입한답시고 그리드의 바람을 무너뜨림과 동시에 심리적 압박을 안겨준다?
이는 크라우젤 영입 의도에 반하는 일이나 다름이 없었다.
라우엘이 바라는 것은 그리드가 순응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객관적으로 보면 라우엘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걸 기원하는 게 옳겠지.”
하지만 지슈카의 마음은 달랐다.
“이겨, 그리드.”
크라우젤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크라우젤의 사정에 굳이 그리드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그리드가 얼마나 노력해온지 잘 알고 있는 지슈카였기에, 그녀는 그리드가 바라는 대로 최고가 되기를 기원했다.
***
『이 인물을 표현하는 수식어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만, 이 한 마디로 충분할 것입니다. 20억 유저의 정점! 크라우젤!!』
“우와아아아아!!”
“천외천! 천외천! 천외천!!”
“랭킹 1위의 위엄을 보여줘라!!”
무대 위로 오르는 크라우젤의 이름을 수십 만 관중들이 연호하기 시작했다.
정점을 향한 팬심에 국적 따위는 관계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드를 향한 함성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이에 맞서는 남한의 풍운아! 유일한, 최초의 레전드리 클래스 전직자! 그리드!!』
“가라, 그리드!”
“영원한 지존은 없다는 걸 보여줘!!”
“…”
두근! 두근! 두근!
평소에는 힘이 되었던 응원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내 격한 심장 고동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그렇다.
그리드는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티내지 않으려 노력한다.
라이벌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위축 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크라우젤.”
진행자가 경기 시작을 외치기 전.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크라우젤과 똑바로 시선을 마주한 그리드가 선언했다.
“최강의 칭호는 내가 갖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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