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2권 - 18화
Satisfy의 역사는 아직 짧다.
e스포츠가 최고의 대중문화로 자리매김한 것도 채 2년이 안 된 일이다.
각국 방송사 해설진의 경험이 미천하고 전문성이 부족한 건 아직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해설진 뭐하냐? 왜 전투내용 설명 안 해줌?
-완전히 꿀 먹은 벙어리네ㅎㅎㅎ 저래놓고도 월급은 꼬박꼬박 챙겨가겠지.
-하… 그리드랑 데미안이 너무 빨라서 눈으로 쫓지를 못하겠음. 화면이 자꾸 휙휙 전환되네요.;;
-경기 끝나면 리플레이 영상 슬로우로 재생하면서 분석해줄 듯…
세계 각국의 시청자들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방송국 해설진마다 하라는 해설은 안 하고 입을 닫아버렸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때 인터넷 곳곳에 이러한 댓글들이 나타났다.
-한국의 OGC는 해설 제대로 해주는 중.
세계 최초의 게임 전문 방송국 OGC.
e스포츠 문화를 발족시켰다고 봐도 무방한 역사와 정통의 방송사다.
그곳 해설진의 농후한 경험과 프로정신, 그리고 전문성은 타방송사 해설진과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
세계 각국의 시청자들이 OGC 인터넷 채널로 대거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의외의 인물을 목격하게 된다.
그건 바로 극검이었다.
OGC 채널에서는 파리 현지의 극검이 객원해설로 활약하는 중이었다.
『방금 데미안의 실명을 유도한 갓리드의 절묘한 스킬 사용 위치를 보셨습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은 앞서 선보인 갓 핸드의 제어 능력이죠! 4개의 갓 핸드에 각기 다른 명령을 내리는 한편 검술을 구사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여러분이라면 잘 아실 겁니다! 이게 바로 갓리드의 클라스죠! 두 유 노우 갓리드읏!!』
“…”
과연 하이랭커답다.
극검은 전투내용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설명하고 있었고 덕분에 시청자들의 갈증이 해소되었다.
단, 지독한 편파해설을 감수해야했지만.
***
“살(殺).”
푸욱!
풀 플레이트 아머를 무장하고 있는 데미안의 등을 그리드의 찌르기가 꿰뚫어버렸다.
1만 6천의 데미지를 확인한 데미안이 고통을 초월하는 전율에 휩싸였다.
“과연 그리드님…! 대단하십니다!! 쿨럭, 쿨럭!!”
피를 토하면서도 그리드를 찬양하기 바쁜 데미안이었다.
실명에서 벗어난 즉시 그리드에게 반격을 가한 후 자리를 이탈한 그가 생명력 게이지를 확인했다.
‘일격에 4분의 1 피가 날아가다니.’
성기사 계열의 유니크 클래스 <여신의 대행자>는 엄밀히 탱커로 분류된다.
기본적으로 높은 방어력과 생명력을 자랑하였고 현재는 풀 버프 상태로 추가 방어력이 중첩된 상태이기도 했다.
데미안이 유저에게 1만 단위 데미지를 입어본 경험은 이번이 최초였다.
‘심지어 지금은 PvP데미지 적용률이 50퍼센트밖에 안 되는데도 말이죠.’
상대가 그리드이기 때문에 납득할 수 있는 데미지.
너털웃음을 흘린 데미안이 힐을 사용했다.
생명력을 100퍼센트 회복시켜주는 <여신의 숨결>이 아닌 <교황의 자애>였다.
생명력이 5천밖에 회복되지 않았지만 이것만으로도 그리드에게 부담을 주기엔 충분했다.
‘역시 극살(極殺)밖에 없나.’
풀 버프 상태의 그리드.
심지어 스킬 데미지를 상승시켜주는 <그리드의 대검>까지 무장한 그는 어지간한 하이랭커들도 스킬샷 한 방에 해치울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PvP데미지 적용률이 50퍼센트로 줄어든 상황이라고는 하나, 살(殺)의 데미지가 16,000밖에 들어가지 않다니?
데미안의 터무니없이 높은 방어력과 캐스팅 시간이 짧은 힐의 연계가 그리드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독보적인 전투지속력…’
장시간 싸우면 승산이 낮아질 수도 있다. 속전속결을 꾀하는 편이 현명했다.
하지만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보호막을 미리 소모시킨 이유가 도대체 뭘까?’
적의 필살기를 확정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스킬을 무의미하게 소모시킨 것, 어떻게 봐도 유인책 같았다.
하지만 무엇을 의도하는 유인책인지를 그리드의 머리로는 추측할 수 없었다.
단지 누적 된 전투경험을 토대로 본능적인 위험을 감지하고 있을 뿐.
채챙!
채채챙!!
2초 남짓 되었을까.
그리드가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에도 4개의 갓 핸드는 데미안을 괴롭히고 있었다.
각자 무장하고 있는 검을 휘둘러서 공격을 가했다.
모조리 데미안의 방패에 가로막혀버렸지만 무의미하진 않았다.
[<갓 핸드>의 소드 마스터리 경험치가 상승하였습니다!]
[<이야루그트>의 경험치가 0.1퍼센트 상승하였습니다!]
‘…그냥 장기전으로 갈까.’
데미안의 방어적인 능력은 탁월했고, 덕분에 갓 핸드의 소드마스터리와 이야루그트의 경험치가 비교적 쉽게 올랐다.
1시간 풀로 싸운다면 이야루그트의 경험치가 99퍼센트까지 도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희망이 생길 정도.
하지만 그리드는 고개를 저었다.
‘위험해.’
아이템 등급을 올린답시고 데미안과 무리해서 싸우다가 만약 패배하기라도 한다면?
정작 목표인 크라우젤과는 싸우지 못하게 될 것이고 이는 본말전도였다.
퍼펑! 펑!!
전투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드의 물리방어력이 높다는 점에 주목한 데미안이 마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홀리 크로스!”
데미안의 근본은 성기사인 바, 데미안의 마법적 자질은 뛰어나지 못했다. 여신의 격노를 제외하면 기본적인 성마법 몇 개를 사용하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흑화 상태의 그리드를 위협하기엔 충분했다.
교황의 절대적인 신성력이 반마 그리드를 불태워버렸다.
[4,1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3,99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크윽…!”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
어깻죽지에 마법을 저격당한 그리드가 이를 악 물고 대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데미안의 방패에 또 한 번 쉽게 가로막혔다.
그렇다고 그리드에게 나쁜 구도는 아니었다.
데미안이 그리드의 공격을 방어하는 대가로 갓 핸드들의 공격을 허용하였으니까!
“으으으…”
등과 옆구리를 베인 데미안이 신음을 흘렸다.
갓 핸드의 기본 공격력이 그리드와 비교하면 월등히 낮다고 하지만, 갓 핸드들이 무장한 아이템은 무려 실패작과 이야루그트 등의 최상급 무구다.
뛰어난 공격력을 발휘하였으므로 제아무리 데미안이라도 갓 핸드의 공격을 우습게 여길 수 없었다.
‘크리스님이 갓 핸드에 맞아 죽은 이유가 있었네.’
납득한 데미안이 때마침 재사용 대기 시간이 되돌아온 <교황의 자애>를 사용했다.
그리고 당황했다.
[생명력이 2,500 회복되었습니다.]
“어라?”
힐의 위력이 절반밖에 작용하질 않는다.
갓 핸드가 무장하고 있는 이야루그트 때문이었다.
<공격 명중 시 대상의 치유력을 50퍼센트 감소시킨다>는 이야루그트의 기본 옵션 중 하나가 데미안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파그마의 검무, 파(派).”
쿠르르르르릉!!
당황하고 있는 데미안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보법을 밟고 검기의 파도를 불러일으킨 그리드!
그중 하나에 적중당한 데미안의 모든 속도가 저하되었다.
애초부터 그리드보다 속도가 느렸던 데미안에게 있어서 속도 저하 디버프는 무척이나 뼈아픈 것이었다.
츠카카카칵!!
커다란 호선을 그리는 그리드의 대검.
결코 심오한 검로는 아니었으나 호쾌하기는 이를 데가 없다.
“크…윽!”
방어에 실패하고 가슴을 크게 베인 데미안이 반격을 가해보지만 너무 느렸다.
가볍게 회피한 그리드가 이어서 대검을 찌른 후, 재차 베어버렸다.
흑청색의 검광이 아로새겨지는 지점마다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데미안이 흘리는 피였다.
이때 <암흑의 룬> 개방효과 지속시간이 10초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그리드가 승부수를 띄웠다.
“파그마의 검무.”
상대의 노림수가 두렵답시고 언제까지고 소극적일 수는 없는 법이다.
어떠한 결과를 이루기 위해선 희생을 감수해야한다는 사실을 그리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꾸드드드득!
기괴한 방향으로 팔을 비틀어버린 그리드가 스킬을 전개하였다.
“극살(極殺).”
궁극의 종베기에 이어지는 찌르기.
명중률 100퍼센트와 방어무시 옵션을 자랑하는, Satisfy 현존 최강의 스킬이 데미안의 몸을 관통하는 순간.
“신성불가침!”
데미안의 몸을 중심으로 볓빛과도 같이 날카로운 섬광이 번쩍이더니 그리드의 몸이 순식간에 넝마가 되었다.
반사 스킬의 효과였다.
[대상에게 40,6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이 공격을 반사하였습니다!]
[31,05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반사 스킬은 반격 스킬과 다르다.
반격은 적의 공격을 맞받아치고 되돌려주는 기술로서 스스로의 몸을 완벽하게 보호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반면 반사는 적의 공격을 허용하는 시점에서 발동하는 기술이다.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고 엄밀히 따지면 반격의 하위호환이었다.
하지만 사용 난이도가 훨씬 더 낮다는 장점이 있었다.
“크악!!”
“컥!”
동시에 비명을 토하는 그리드와 데미안.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린 둘 모두 생명력 게이지가 극단적으로 떨어졌다.
특히 그리드의 경우는 사망 일보직전이었다. 생명력이 100도 남아있지 않은 듯 보였다.
기적처럼 살아남았다고 표현해도 좋을 수준!
-와, 그리드 저걸 사네.ㅡㅡ;;
-운 겁나 좋음.ㄷㄷ;;
그리드의 불사 패시브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템빨단원들과 크라우젤 정도가 전부였다.
하여, 시청자들은 그리드가 살아남은 이유가 순전히 천운이 작용해서라고 보았다.
하지만 진실은?
[전설이 된 자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체력이 최소치가 되어 5초 동안 모든 공격에 저항합니다.]
“우오오오오!!”
“여신의 숨결!”
5초 안에 승부를 보겠다고 결정한 그리드가 돌진하였고 데미안은 사각방패를 세워서 그 기세를 늦춤과 동시에 힐을 사용했다.
[50퍼센트의 생명력을 즉시 회복합니다.]
“이런…”
이 침음, 그리드가 흘리는 것이 아니라 데미안이 흘리는 것이었다.
본래 여신의 숨결은 생명력 100퍼센트를 회복하는 힐이었지만 이야루그트의 영향으로 인해서 그 절반밖에 회복되지 않았으니 낭패였다.
‘위험!’
쩌정!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대검을 휘두르는 그리드의 기세가 무시무시하다.
굳이 정면승부에 응할 이유가 없었던 데미안이 공중으로 몸을 날린 후 마법을 연사했다.
‘데미안이 이긴다!’
크라우젤과 템빨단원들을 제외한 세상사람 모두가 확신을 품었다.
당연했다.
그리드의 현재 생명력은 바닥을 기고 있지 않은가!
마법에 스치기만 해도 사망할 것이 분명했고 승자는 데미안이 되는 게 당연한 순리처럼 보였다.
하지만 발생한 결과는 모두의 예측과 달랐다.
‘어?’
‘왜 안 죽어?’
퍼퍼퍼퍼퍼퍼퍼퍼펑!!
작렬하는 데미안의 마법을 꿰뚫고 공중으로 날아오른 그리드.
죽기는커녕 흉흉한 기세를 더욱 더 상승시킨 그의 검격이 데미안의 심장을 1회.
푸욱!
“역시…”
2회.
“당신은…”
3회.
“…신이십니다.”
푸욱!!
4회 꿰뚫어버린다.
연살(聯殺)이었다.
때마침 버프의 지속 시간이 끝나서 모든 능력치가 정상수치로 되돌아왔던 데미안이 연살(聯殺)의 위력을 견디지 못하고 잿빛으로 산화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리드에게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는 그의 모습이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강렬한 호감을 안겨줬다.
“수고했다.”
무대에 홀로 남은 그리드.
맥없이 지상으로 착지한 그가 데미안에게 경의를 표했다.
<티라멧의 허리띠>의 등급이 상승하였다는 알림창이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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