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2권 - 17화
관계자석의 한쪽에서 스컬을 응원하고 있던 미국 대표들.
“말도 안 된다.”
그들이 데미안의 말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1년 8개월도 더 전에 그리드가 ‘혼자서’ 교황을 레이드했다고?
그들의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는 하이랭커들이 갓 2차 전직을 했을 무렵이라고.”
“그리드의 레벨도 200전후에 불과했을 터. 당시의 그리드가 네임드 보스를 일인 레이드할 스펙을 갖췄다고 보기엔 무리가 크다.”
그 시기, 체다카 길드가 말락서스를 레이드하여 유명세를 떨친 바 있다.
그리드가 체다카 길드 소속원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교황 드레비고 또한 길드 단위로 레이드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데미안은 그리드를 ‘신’이라고까지 표현하는 미치광이야. 녀석이 그리드에 대해서 말하는 것들은 대부분이 허풍이고 과장된 것이겠지.”
“나도 동의한다.”
미국 대표들의 현실부정은 타당했다.
200레벨대 유저가 교황을 1인 레이드한다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가?
하지만 의외로 지발은 데미안의 말을 믿고 있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전대 교황의 태생은 결국 사제.
레벨과 입지에 비해서 전투능력이 취약할 수밖에 없고 방어력 또한 낮다. 애초에 인간형 보스는 생명력 수치도 적었다.
‘그리드의 말도 안 되는 템빨과 공격력이라면 교황의 힐을 무력화시키고 순살했을 수도 있어. 물론, 일대일 상황을 만들었다는 가정이 붙어야 한다지만.’
미국 대표들이 웅성거리는 그때.
‘어리석은 사람들 같으니라고.’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라우엘은 혼자서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교황을 레이드했을 당시 그리드님의 레벨은 정확히 150이었습니다. 그리드님께 직접 들은 이야기에요.’
200레벨은 개뿔!
뭐, 당시의 그리드가 교황을 레이드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데미안의 버프 덕분이었다지만 그건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데미안에게 듣기로 교황과 실제로 싸운 건 그리드 혼자였다니까.
‘역시 그리드님이 최고시다.’
지나온 길, 지금 걷고 있는 길, 앞으로 나아갈 길 모두 독보적인 위업을 달성하고 있으며 달성해나갈 그리드다.
그리드라는 존재에게 새삼 다시 전율한 라우엘이 저도 모르게 솔직한 심정을 품었다.
‘저는 역시 당신께서 우승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리드에게 충성을 맹세한 몸으로서, 또한 그리드의 팬으로서 라우엘은 진심으로 바랐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천외천을 무너뜨리고 지존으로 등극하는 그리드의 모습을 그는 보고 싶었다.
하지만 라우엘은 그리드에게 정치를 일임 받은 몸이다.
템빨단과 그리드에게 영광을 안겨줘야 할 의무가 생긴 이상, 라우엘의 이성은 반대의 결과를 원해야만 했다.
‘…지세요.’
영원히 승승장구하는 사람이란 존재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좌절을 맛보게 되어있다.
그게 삶이다.
‘어차피 맛봐야할 좌절이라면, 기왕지사 타이밍 좋게 맛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크라우젤의 영입에만 성공하면 템빨단은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어진다.
7대 길드? 블러드 카니발을 비롯한 은둔 세력들?
경계할 가치도 없다.
뱀파이어의 도시, 동대륙, 지옥, 온갖 종족의 영토와 드래곤 레어, 그리고 사하란 제국에 이르기까지 보다 수월하게 도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라우엘은 상상해보았다.
유저 최초의 왕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는 그리드와 그의 오른팔이 되어있는 크라우젤. 그리고 함께하는 템빨단원들의 모습을…
그보다 더 이상적인 구도는 없으리란 확신이 생길 정도로 완벽한 미래다.
“부디… 부디 지세요.”
개인적인 감정을 억누르고 이성을 입에 담는 라우엘.
그가 이렇게까지 바랄 수 있는 이유는, 그리드가 좌절을 노력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유형의 인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라우엘의 그리드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인 것이다.
***
교황 드레비고의 존재를 없애버리고 레베카교를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도록 만든 수수께끼의 인물이 플레이어, 그것도 그리드였다고?
놀라운 진실을 알게 된 관중들과 시청자들이 한편으로는 의심하면서도 극도로 흥분하였다.
그들이 그리드를 바라보는 눈빛에 종전과는 차원이 다른 경외심이 깃들었다.
“그리드 선수!”
달아오른 분위기에 심취한 해설자가 본분을 망각하고 말았다.
PvP와 관련 없는 질문공세를 그리드에게 쏟아냈다.
“정말로 혼자서 드레비고를 레이드하신 겁니까? 그 과정에서 데미안 선수를 알게 되신 거고요? 드레비고를 레이드하게 된 경위는 뭐지요? 드레비고는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아! 드레비고 같은 거물은 도대체 어떤 아이템을 드롭했을지 너무나도 궁금하군요!!”
“…”
그리드는 진행자의 질문공세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답할 의무가 없었을 뿐더러 그의 정신은 이미 데미안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데미안.’
처음 만난 그날부터 지금까지 쭉 내게 동경의 시선을 보내오는 존재.
싫을 리 만무하다.
언제나 밝게 빛나는 미소를 머금은 채 진실 된 마음만을 전달해오는 그와 마주하자면, 마치 친동생을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데미안이 그리드보다 4살이나 연상이지만 그리드는 모른다.-
“데미안.”
“예!”
나지막한 그리드의 부름에 즉각 대답하며 환희 웃는 데미안이었다.
만약, 그리드가 항복을 요구한다면 그는 일고의 고민도 없이 즉각 그 요구에 따를 것이었다.
하지만 그리드가 바라는 것은 손쉬운 승리가 아니다.
“최선을 다해서 덤벼라.”
크라우젤에게 도전하기엔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그리드 본인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리드는 성장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고, 데미안은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강자였다.
데미안은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고 있었지만 그리드는 데미안의 강함을 무척 높이 평가했다.
크라우젤 다음하면 데미안이 떠오를 정도.
특히 명중률 80퍼센트를 상승시켜주는 그 말도 안 되는 버프… 시스템적으로 회피와 방어를 불가능하게끔 만드는 그것을 감당하기엔 벅찰 것이다.
“전심전력으로 도전하겠습니다!!”
데미안이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의 그리드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인 바, 자신이 날고 기어봤자 결코 그리드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하여 진정 전력을 다했다.
“성스러운 보호, 빛의 화신, 빛의 가호, 여신의 보호, 여신의 가호.”
<여신의 대행자>클래스와 <교황>직위의 스킬 이름들을 만든 놈, 필시 나태한 인물일 것이다.
무성의하게 지은 스킬 이름들이 죄다 비슷비슷하고 평범해서 임팩트가 약하다. 지나가는 사제1이나 쓸법한 스킬명이다.
하지만 실제적인 위력은 절대적이었다.
번쩍!
번쩍번쩍!!
초록빛과 하얀빛, 그리고 금빛의 기둥에 휩싸인 데미안의 공격력과 방어력이 중첩되어 상승하고 피해를 무력화시키는 실드와 명중률 버프까지 적용된다.
모든 버프의 지속 시간은 3분.
“딱 이 3분 동안이 제가 ‘교황으로서의 위엄’을 보여줄 수 있는 시간이죠. 그래봤자 당신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겠지만요.”
스킬 데미지 상승률 옵션이 귀속 된 <그리드의 대검>을 뽑아 쥔 그리드가 대검 중앙에 파인 소켓에 <암흑의 룬>을 박아 넣으며 웃었다.
“너, 자꾸 그러다가 나한테 실망한다.”
[<암흑의 룬>효과가 전개됩니다. 악마력이 영구적으로 10 상승합니다. 1분 동안 일반 공격, 스킬 공격 시 암흑 속성 공격력이 20퍼센트 추가됩니다.]
“흑화.”
[암흑 마력을 증폭시킵니다.]
[암흑 마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악마력으로 대체합니다.]
[흑화가 유지되는 동안 종족이 반마(半魔)로 변경됩니다.]
[반마 상태에서는 생명력 최대치가 50퍼센트 하락합니다. 공격력, 마력, 민첩성이 각각 20퍼센트씩 상승합니다.]
[모든 종류의 공격이 암흑 속성으로 전환됩니다.]
고오오오오-!
그리드의 주변으로 불길한 칠흑의 마기가 나부끼기 시작했다. 그에 동화 된 란스티어의 망토 또한 완연한 검정으로 물들었다.
“대장장이의 분노, 신속한 몸놀림.”
퍼엉-!
그리드가 모든 버프를 사용함과 동시였다.
흑화의 영향으로 피부가 하얗게 질린 그리드의 얼굴이 어느덧 데미안의 코앞까지 다다랐다.
“연속 찌르기.”
펑!
퍼퍼펑!
번헨 열도가 재현한 예비군 훈련에서 습득한 레어 스킬!
그리드가 파그마의 검무부터 사용하지 않고 이 다단 히트 계열의 스킬부터 사용한 이유는 데미안이 몸에 두르고 있는 ‘피해 1회 무효화’실드를 벗겨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풀 버프 상태의 데미안은 대단했다.
그리드의 광속에 완벽하게 반응하여 사각방패를 세우더니 그리드의 공격을 모조리 막아 무력화시켰다.
번뜩!
방패의 측면으로부터 날카로운 빛이 번쩍인다.
데미안이 피아로와 밭일하며 강화시킨 검술솜씨를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푸욱!
[9,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복부를 찔린 그리드가 끔찍한 피해를 입었다.
극강의 신성력을 발휘하는 데미안이 공격력 상승 버프까지 중첩시키고 있었으니 그 공격이 안 아플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침착했다.
공격하느라 방패 바깥쪽으로 노출 된 데미안의 오른쪽 손목을 노리고 연(聯)을 전개하였다.
이미 수백, 수천 번도 더 사용한 연(聯)에는 이미 충분히 익숙해진 바, 그리드는 최소한의 공간에서도 연(聯)의 보법을 밟을 수 있었던 것이다.
피피피피피피핏!!
쩌저저저저저정!!
서걱!
[<여신의 보호>가 적의 공격을 무효화시킵니다.]
[절대 보호막이 사라집니다.]
“과연 그리드님…!”
연(聯)의 수십 회 공격 중 대부분을 방패로 막아내고 단 ‘한 대’만 허용한 주제에 감탄하는 데미안이었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초록빛이 사라졌음을 확인한 그리드가 극살(極殺)을 전개, 데미안의 높아진 방어력이 무색하게도 큰 피해를 입히려다가 행동을 멈췄다.
문득 의문이 들었던 까닭이다.
‘보호막을 왜 미리 사용해놨던 걸까?’
데미안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보호막을 내 스킬 타이밍에 맞춰서 사용할 수 있고도 남다.
한데 왜 미리 사용해서 무의미하게 소모를…?
찝찝함에 극살(極殺)의 캐스팅을 취소하고 평타를 날리는 그리드였다.
그를 방패로 막아내고 반격한 데미안이 하하, 소리쳐 웃었다.
“역시 그리드님이십니다! 제가 뿌린 하찮은 미끼 따위는 물지 않으시는군요! 여신의 격노!!”
쿠콰콰콰콰콰쾅!
데미안이 그리드와 검격을 교환하는 사이.
데미안의 등 뒤로 빠르게 생성 된 두 개의 마법진으로부터 백색의 섬광 두 줄기가 솟구쳐나갔다.
표적은 당연히 그리드.
데미안과 검을 교환하면서 손발이 묶여있는 그리드였기 때문에 그 공격을 그대로 허용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리드에겐 갓 핸드가 있었다.
퍼펑!
2개의 갓 핸드가 백색의 섬광을 가로막으며 경직되었고, 나머지 2개의 갓 핸드는 매직 미사일을 발사하여 데미안의 손목을 관통시켰다.
이에 데미안의 검술이 일순간 무뎌졌고, 그 틈에 그리드가 극(極)을 전개하였다.
서걱!!
“큭…!”
하필이면 베여도 얼굴을 베인 데미안이 상태이상 ‘실명’에 걸렸다. 핏물이 눈에 들어간 까닭이다.
쩌정!
쩌저저저저정!!
실명의 지속시간은 다행히 2초에 불과했다. 2초만 버티면 됐다.
방패를 세운 데미안이 거북이처럼 그 안에 숨어들었고, 그리드는 방패를 가격하며 발생한 반발력을 활용하여 회전, 위치를 전환시킴으로서 데미안의 후위를 점령했다.
이어서 살(殺)을 정확히 꽂아 넣었다.
『…』
각국 방송사의 해설진이 침묵한다.
풀 버프 상태의 그리드와 데미안이 너무나도 빠르고 수준 높은 전투를 진행하였으므로 그 과정을 실시간으로 이해하고, 해설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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