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2권 - 15화
그리드와 일검을 교환하면서 발생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크리스.
이어서 날아오는 그리드의 연속 공격을 또 한 번 막아내는 그의 상체가 경미하게 흔들렸다.
미약하나마 힘에서 밀리고 있다는 뜻이다.
‘크리스가 힘 싸움에서 진다고?’
3라운드 진출자들에게 배정 된 1인용 선수 대기실 중 한 곳.
홀로 앉은 채 그리드와 크리스의 대결을 관람 중이던 크라우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크리스를 힘으로 이길 수 있는 플레이어가 존재할 줄이야.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크리스의 근력이 독보적인 줄 알았다.’
그들 중에서도 크리스를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그건 나조차도 마찬가지다.
한데 그리드는 이겼다.
‘알면 알수록 놀라운 인물…’
사람은 저마다 깊이가 다르고 그 깊이에는 한계라는 게 있는 법이다.
본인에 대한 걸 노출하면 노출할수록 결국 밑천을 드러내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도리어 반대다.
매번 새롭고 더욱 대단했다.
크라우젤이 전율에 휩싸였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바알의 계약자 처단> 퀘스트는 내가 아닌 그리드가 먼저 해내는 게 아닐까?
아그너스.
지금 이 순간에도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을 그 괴물의 유일한 대항마가 바로 그리드일지도 모른다.
물론.
“먼 훗날의 이야기일 테지만.”
그리드가 아그너스와 만난 적이 있을까?
크라우젤은 문득 궁금해졌다.
***
일반적인 대검의 디자인은 두꺼운 직선 구조다. 그 탓에 대검은 투박하다는 인상이 강했지만 특유의 야성적인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상어의 모습을 형상화한 그리드의 푸른 대검은 선이 얇고 유려하며 검날, 검등 곳곳에 곡선형 디테일이 들어가 있었다.
보다 입체적이고 아름다웠다.
일반적인 대검이 람보X기니라면 그리드의 푸른 대검은 페X리랄까!
심지어 강력하기까지 하다.
얼핏 봐도 <그리드의 대검> 이상이었다.
“근데 이름이 실패작이라고?”
내가 공격력에서 밀리다니.
쩌정! 쩡!!
그리드의 연속되는 공격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차츰 뒷걸음치기 시작한 크리스의 동공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만큼 정신적 충격이 큰 것이다.
‘나는 크라우젤처럼 될 수 없었다.’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없음을 알았으므로 한 길만 팠다.
가장 자신 있는 분야에만 열중했고 그게 바로 공격력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공격력만큼은 최고가 되리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세컨드 클래스 폭군과 그리드의 대검을 손에 넣은 순간 목표를 이뤘다는 확신이 생겼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리드의 템빨에 밀리고 말았다.
“그 무기는 뭐지? 고작 1년 전 구형 아이템이 어째서 그리드의 대검 이상인 거냐?”
크리스는 최고의 대검술사답게 대검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지식과 경험으로 봤을 때 현재 그리드가 무장하고 있는 푸른 대검이야말로 현존 최강의 무기였다.
납득하지 못하는 크리스에게 그리드가 설명해주었다.
“그리드의 대검의 모태가 바로 이 실패작이거든. 엄밀히 따지면 그리드의 대검은 실패작의 양산형이다.”
“뭣이…!”
바로 2분 전까지만 해도 현존 최강의 명품무기라고 믿었던 그리드의 대검이 고작 양산형이었다고?
크리스가 이를 갈았다.
“그렇군. 네가 그리드의 대검을 +9까지 강화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군. 고작 양산형 아이템 따위에 거액을 투자할 이유가 없었던 거구나.”
기껏 지존무기를 만들어 달라고 의뢰했더니만 양선무기를 만들어 줬던 것인가…
사기당한 기분이다. 뒤통수가 얼얼하다.
배신감으로 물든 크리스의 눈빛을 확인한 그리드가 당황했다.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양산형이라고 해서 그리드의 대검이 실패작보다 아래 등급은 아니야. 옵션적인 측면에서는 그리드의 대검이 오히려 더 뛰어나거든. 실패작은 공격력만 세다.”
“무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공격력이지 않느냐!”
쩌엉!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쉬지 않고 검격을 교환하는 중이었다.
대검이라고는 믿기지 않게도 예리한 검로를 자랑하는 실패작과 그에 맞서는 크리스의 정교한 검로가 맞부딪칠 때마다 파공성이 폭발하면서 대기가 격동했다.
“…뭐, 하긴 그렇긴 하다. 공격력 높은 게 장땡이지.”
하지만 실패작은 결국 실패작이다.
실패작의 사용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플레이어는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상품성이 아예 없었다.
‘하지만 크리스라면.’
1년 후쯤 실패작을 다룰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때쯤이면 난 이것보다 훨씬 더 좋은 무기를 쓰고 있겠지만.’
우월감.
그것은 사람의 기분을 들뜨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그리드의 입가로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평생을 패배감과 좌절감에 물들어 살아왔던 그에게 있어서 우월감이란 무척 반갑고 기쁜 감정이었다.
하지만 자만하진 않았다.
크리스라는 강적을 쓰러뜨리기 위해선 끝까지 신중하게 최선을 다해야할 의무가 있었으므로.
“파그마의 검무.”
쩌정! 쩡!!
검무의 과정을 공격으로 승화시킨 그리드.
두 발 앞으로 이동하면서 종베기와 횡베기를 선보인 그가 이어서 허리를 살짝 비틀었다.
“연살(聯殺).”
1년 전과는 다르다.
나처럼 다른 사람들 또한 성장했고 이들 모두 강하다.
그렇기에 그리드는 더 큰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진정한 강자를 쓰러뜨려야지만 비로소 자신의 가치가 오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퍼엉!!
쏘아지는 대포의 폭음과도 같은 파공성!
무시무시한 살기를 담고 날아오는 그리드의 찌르기에 대한 크리스의 대응은 단순하고 무식했다.
막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다.
민첩성이 낮은 크리스가 피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드의 공격속도는 녹록치 않았다.
그리드의 민첩성은 2천을 가뿐히 초월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분쇄!”
쩌어어어어엉엉!!
클래스 <파괴전차>의 고유스킬과 연살(聯殺)의 첫 번째 타격이 맞부딪치는 순간 발생한 충격파가 지축을 흔들었다.
마치 지진이라도 맞은 듯하다. 거대한 직사각형의 무대가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흔들렸다.
“두 사람의 공격력… 대체 얼마나 높은 거지?”
그리드와 크리스의 독보적인 파괴력 앞에 해설진은 물론이고 관중들과 시청자들 모두가 경탄을 금치 못하는 그때.
“200톤 검!”
쿠콰콰콰콰쾅!!
연살(聯殺)의 2회째 타격과 크리스의 스킬이 또 한 번 충돌하며 굉음을 터뜨렸다.
그리드와 크리스가 두르고 있는 망토들이 태풍에 휩쓸린 것처럼 요동쳤다.
“갓 핸드!”
3회째 연살(聯殺)을 꽂아 넣으면서 그리드가 소리쳤다.
이에 즉각 반응한 갓 핸드들이 각자 손에 무기를 쥔 채로 날아와 크리스의 몸을 베어버렸다.
이를 악 물고 고통을 견딘 크리스가 <300톤 검>을 전개하여 연살(聯殺)의 3회째 타격을 또 한 번 상쇄시켰다.
“큭…!”
그리드가 신음을 토했다.
크리스가 200톤 검을 전개한 시점부터 그는 크리스를 힘으로 압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300톤 검은 도리어 견디기가 어려웠다.
[실패작의 내구력이 20 손상되었습니다!]
‘무지막지한 놈!’
크리스에 대한 그리드의 감상이었고, 그리드에 대한 크리스의 감상은 그 이상이었다.
‘태산…!’
진즉부터 깨달았다. 내가 무너뜨릴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좌절감은 들지 않았다.
크리스는 도리어 즐거웠다.
누군가와 전심전력으로 힘을 겨룬다는 것, 뜨거운 피를 용솟음치게 만드는 벅찬 경험이었다.
“1,000톤 검!!”
연살(聯殺)의 4회째 공격에 맞춰서 파괴전차의 궁극기가 전개되었다.
그 기세가 살(殺)을 상회하는 수준이다.
과연 3차 전직 클래스답게 궁극기만큼은 레전드리 스킬 이상의 위력을 뽐내는 것이었다.
“이런 미친…!”
흑화를 사용할 걸 그랬나?
안색이 하얗게 질린 그리드가 충격에 대비하여 이를 악 물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연살(聯殺)의 4회째 공격을 파쇄시켜버린 1,000톤 검이 그대로 그리드의 가슴을 후려쳤다.
[25,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삼겹갑의 내구력이 55 손상되었습니다!]
[두꺼운 투구의 내구력이 21 손상되었습니다!]
[큰 장갑의 내구력이 15 손상되었습니다!]
[반짝 각반의 내구력이 34 손상되었습니다!]
“크악!”
파괴전차의 조건부 패시브 스킬 <방어 관통>과 유니크 세컨드 클래스 <폭군>의 패시브 스킬 <대상의 방어력에 비례한 추가 피해>가 폭발적인 시너지를 발생시키는 순간이었다.
물리 공격으로 받는 피해를 경감시켜주는 방어구를 부위별로 무장한 그리드조차도 큰 데미지를 피할 수 없었다.
몸이 넝마가 된 그리드가 살기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거 재밌네… 3연격이라도 터졌으면 나 그대로 골로 갔겠어? 그래, 누가 먼저 쓰러질지 어디 한 번 해보자.”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얻어맞았으면 똑같이 되갚아주는 게 인 인지상정!
자세를 수습한 그리드가 파그마의 검무, 극살(極殺)을 전개하려하는 순간이었다.
『크리스 패배!』
“…?”
크리스가 잿빛으로 산화하고 있었다.
그리드와 검격을 교환하는 내내 갓 핸드들의 공격을 얻어맞는가 싶더니 결국 생명력이 다 떨어져서 죽은 것이다.
“…아.”
그리드는 기분이 나빴다.
이겼지만 이긴 것 같지 않았다.
***
“조금만 더 버티다가 한 대 맞고 죽지 그랬어?”
겁나 세게 얻어맞았건만 되갚아주지 못한 게 어지간히도 억울한가보다.
씩씩거리는 그리드와 상반되게 크리스는 상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속임수 없는 정면승부를 마음껏 펼쳐본 게 대체 얼마만일까.
비록 졌지만 속이 다 후련해질 정도로 즐거웠다.
“다음에 기회가 온다면 또 겨뤄보도록 하자.”
“…”
싱글벙글 웃으면서 악수를 건네 오는 크리스였다.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그리드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가끔이라면 어울려주도록 하마.”
상쾌한 기분이다.
***
8강 진출자용 선수 대기실.
카츠에게 배정 된 그곳에 의외의 인물이 함께 있었다.
다름 아닌 라우엘이었다.
“그리드님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뭔지 알겠습니까?”
그리드와 크리스의 대결이 끝나자마자 라우엘이 질문했다.
그러자 카츠가 콧방귀 뀌었다.
“단순히 내가 더 강하니까 이길 수 있다.”
“…어련하시겠습니까마는. 제가 당신의 승률이 높아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몇 가지 조언을 해드리죠.”
라우엘이 설명을 시작했다.
그리드의 최측근으로서 누구보다 더 그리드를 잘 알고 있는 그의 말 하나, 하나가 카츠의 양식이 되었다.
설명을 끝까지 들은 카츠가 의문을 표했다.
“그리드의 약점을 너무 많이 노출시키는 거 아니냐? 만약 나중에 내가 그리드의 적이 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라우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드님의 아이템을 원하고 있는 당신이 굳이 그리드님을 적대할 가능성은 무척 낮고…”
그건 둘째다.
라우엘이 진짜로 믿는 구석은 따로 있었다.
“그리드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성장하고 계십니다. 남들은 상상조차 못할 정도로 빠르게요. 지금 당신이 알게 된 약점들 또한 그분이라면 조만간 필시 극복하실 겁니다.”
“…”
카츠는 라우엘에게서 데미안의 모습을 엿봤다.
그리드 빠돌이의 모습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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