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2권- 13화
‘받은 피해의 150퍼센트에 해당하는 생명력을 일시적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건가.’
‘일회성이겠군.’
세상사람 모두가 그리드를 주목하고 있었다.
당장 PvP에 참가 중인 선수들도, 이번 국가대항전에 참가하지 않은 은둔고수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리드.
탑클래스의 전투력과 최고의 대장장이실력을 겸비하였으며 또한 템빨단의 수장으로서 막강한 권력까지 행사할 수 있는 존재.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고수와 세력들이 있었으므로 압도적, 독보적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아직 입증되지 않았지만 충분한 경계의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그리드의 강점과 약점을 분석할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자 PvP에 집중하였고 특히 크라우젤이 그랬다.
‘그리드…’
어머니를 생각하면 당신이 결승전까지 올라오지 못하길 바란다.
하지만 내 심장은 반대의 결과를 원하고 있다.
당신과 겨루고 싶다.
당신과 함께 느끼고, 즐기고, 발전하고 싶다.
‘…이기적인 욕심.’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마음을 억누른 크라우젤이 선수대기실을 떠났다.
30분 후 시작 될 2라운드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
우우!
우우우우우!!
관중들의 야유가 심해지고 있다.
관중석 곳곳에서 중국인들의 욕설이 들려왔다.
“니 취팔로마!”
저건 100프로 한국인이다.
어찌됐든, 관중들은 흥을 깬 하오에게 끓어오르는 분노를 숨기지 못했다. 심지어 쓰레기를 투척하는 사람도 있었다.
“왜 기권한 거냐!!”
로그아웃하고 무대를 벗어난 그리드가 진행자의 인터뷰를 거부하고 하오에게 달려와 따졌다.
20분 내내 사람을 개 패듯이 때려놓고서 이제와 기권을 해?
명백한 때리고 튀기가 아닌가!
이겨도 이긴 기분이 아니고 제대로 엿 먹은 심정이다.
무엇보다도 그리드는 동화의 쿨타임과 아이템 경험치 획득을 위해서 하오와 보다 더 오래 싸우고 싶었다.
퍽!
중국인 관중이 집어던진 페트병에 얼굴을 가격당한 하오가 그리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투지, 분노, 원망, 미련 등의 감정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깨끗한 눈동자가 그리드를 시야에 담는다.
“모든 패를 꺼내봤자 이길 수 없는 시합에 집착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잖은가.”
공식석상이 아니었다면 사정이 달랐을 것이다.
하오는 전력으로, 최후의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리드에게 대항했을 것이다.
‘배운다’는 심정으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국가대항전.
온갖 군상들이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고 모든 실력을 드러내기엔 위험부담이 컸다.
“20분 내내 나를 가지고 논 당신이 원망스럽기는 하지만 애초에 내 태도부터가 문제였지. 이제껏 당신의 실력을 알아보지 못했던 내 자신이 부끄럽고 당신에게는 미안하다.”
그리드가 나보다 위다.
진실을 알게 된 하오가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당신을 경외하게 되었다.”
생각해봤다.
그리드가 스스로를 둔재라고 칭하는 이유가 무엇일지.
그리고 돌이켜봤다.
그리드의 과거를. 그에 관한 모든 정보를.
그러자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리드가 이 자리까지 오른 것은 정녕 노력이 일궈낸 결과였으리라.
다른 랭커들이 ‘타고난 재능’이라는 무기를 기본적으로 탑재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당신은 특별해.”
내 열정에 불을 지폈다.
이런 인물은 크라우젤 이후 두 번째다.
심지어 크라우젤과는 성향이 완전히 반대였다.
‘천재 크라우젤이 태초부터 그 자리에 존재한 하늘이라면.’
둔재 그리드는 공든 탑이다.
차곡차곡, 돌멩이 하나씩을 쌓아올려 하늘을 향해가고 있는 탑.
경외할 수밖에 없다.
다만 걱정인 점은.
“무너지지 말기를.”
공든 탑은 결국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있다. 높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욱 위태로워지는 법이다.
만약, 그리드가 노력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재앙적 재능과 맞닥뜨리게 될 경우 그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나처럼 순순히 인정하고 정진할지, 아니면 그대로 도태될지 모르겠다.
‘지금 내가 누굴 걱정하는지 모르겠군.’
피식, 실소를 흘린 하오가 그리드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리드님께서 하늘을 무너뜨린다면 당신은 그리드님을 섬기셔야할 겁니다.”
강한 믿음이 깃든 라우엘의 목소리가 또 한 번 뇌리에 맴돈다.
하지만 하오는 이제 더 이상 불쾌하지 않았다.
***
2라운드에 진출한 32명의 선수들.
그중 강력한 우승후보를 꼽자면 러시아의 크라우젤, 캐나다의 크리스, 일본의 데미안과 카츠, 미국의 스컬, 스페인의 폰, 영국의 레가스.
『그리고 한국의 그리드가 있지요.』
『이야… 설마 중국의 하오가 1라운드부터 탈락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심지어 기권이라니요? 전대미문의 사건이군요.』
『그리드의 맷집과 회복능력이 하오의 예측을 초월하여 발생한 결과 같습니다. 아무리 때려봤자 좀비처럼 버티면서 심지어 공격력까지 강하니 어디 싸울 맛이 났겠습니까?』
『하지만 너무 쉽게 포기한 경향이 있죠. 어쩌면 하오는 스태미나가 약한 게 아닐지 추측해봅니다.』
해설진이 떠드는 동안 2라운드가 진행되고 있었다.
경기 내용은 무난했다.
각 우승후보들이 대전 상대를 꺾고 8강에 진출하는 형국이었다.
크라우젤은 단 한 번의 공격조차 허용하지 않고 여유롭게.
스컬은 미국을 반드시 우승으로 이끌겠다는 일념으로 사력을 다해서.
카츠는 자신의 힘에 도취된 채.
폰은 창술의 극의를 꿈꾸며 승리를 거머쥔다.
큰 이변이 없는 결과 탓인지 경기의 시청률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한 그때였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군요!』
『2라운드 15조 경기입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다소 잠잠해졌던 스타드 드 프랑스 국립 경기장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각국 방송사의 시청률 또한 급격히 상승하고 있었다.
15조 경기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가 얼마나 높은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모두가 기다리셨을 이번 경기의 주인공들은 바로!』
『데미안과 레가스! 레가스와 데미안입니다!』
플레이어 최초의 교황, 데미안.
검술과 마법에 일가견이 있으며 압도적인 탱킹력과 버프력, 거기에 또 회복력까지 갖춘 팔방미인이다.
완벽한 전투밸런스를 자랑하는 그의 존재감은 크라우젤, 그리드와 비견될 정도였다.
상대 레가스 또한 만만치 않다.
템빨단이 체다카 길드였던 시절부터 길드 내 최강자로 꼽혔던 존재.
오래 전부터 세상 모든 무투가들의 우상이었던 그는 현재까지 유일한 <아수라>클래스 전직자로서 이목을 끌었다.
『아수라 클래스의 전직 난이도가 상상을 불허한다죠?』
『3차 클래스를 통틀어서 가장 높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오죽하면 아수라를 얻느니 히든 클래스를 얻겠다는 말이 다 있을까요.』
『아수라의 4차 클래스가 히든 클래스로 연계될 것이라는 추측도 있죠. 그 탓에 수많은 무투가들이 3차 전직을 하지 않고 아수라 전직 퀘스트에만 목매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아수라의 위력은 굉장하죠… 스킬 하나하나가 변칙적이라 적중률이 높고 콤보를 달성할 때마다 추가되는 피해량이 최대 곱절까지 계산되니까요.』
『거기에 추가로 뇌전을 다뤄서 적을 감전시키고 암흑 속성 공격력까지 발휘하는 등 완전히 전투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
『하지만 과연 데미안에게 콤보를 꽂아 넣을 수 있을지…』
그 누구도 섣불리 승자를 예측하지 못했다.
무대 위의 데미안과 레가스는 서로에게 꾸벅 인사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만나니까 느낌이 새롭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싱글벙글 웃는 두 남자.
이들은 평소 사이가 무척 좋은 편이다.
오타쿠인 자신을 무시하거나 경멸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레가스를 데미안이 좋아했고, 레가스야 워낙 사람들에게 호의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전투 개시 신호와 동시에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매섭게 변했다.
“성스러운 보호, 빛의 화신, 여신의 가호.”
데미안이 처음부터 공격력과 방어력, 그리고 모든 능력치를 상승시키고 실드까지 생성하는 버프를 중첩해서 사용했다.
노버프 상태로 레가스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며, 이는 레가스의 호승심에 불을 지폈다.
“멋지네요! 하핫!!”
찬란한 광채를 내뿜는 금빛과 은빛의 오라에 휩싸인 데미안.
도통 빈틈을 찾을 수 없는 그에게 레가스가 돌진했다.
선수 대기실로 돌아와 경기를 관람 중이던 크라우젤이 드물게 놀랐다.
‘섣부르지 않은가?’
상대가 버프를 사용하면, 이쪽은 버프의 지속시간이 끝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게 기본이다.
특히 상대가 데미안 같은 강자라면 더더욱 신중해야만 했다.
한데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 레가스가 데미안에게 정면승부를 시도하자 크라우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조차도 풀버프 상태의 데미안은 섣불리 손대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리고 역시나.
선공을 가하는가 싶던 레가스가 도리어 반격을 당하더니 금세 수세에 몰렸다.
데미지를 흡수하는 실드를 앞세워 검을 휘두르는 데미안의 공격은 막강하고 정교했다.
방어력 최악의 천계열 방어구를 무장한 레가스의 몸을 가볍게 난도질하였다.
‘…설마.’
생명력 게이지가 빠르게 떨어지는 것을 개의치 않고 공격을 허용하면서 반격, 데미안의 실드를 깎아놓는 레가스.
그의 공격속도가 미세하게나마 조금씩 빨라지고 있다.
하지만 이를 감지한 사람은 크라우젤밖에 없었다.
실제로 레가스를 상대 중인 데미안조차도 레가스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하였고 어느덧 정신을 차렸을 때는 강력한 반격을 허용하고 있었다.
“쿨럭!”
방패를 세울 틈도 없이 꽂힌 공격에 복부를 얻어맞고 몸을 ㄱ자로 꺾는 데미안의 얼굴이 바닥을 향한다.
그 곱상한 안면으로 레가스의 무자비한 무릎치기가 꽂혔다.
“끅!”
첫 번째 타격과 두 번째 타격의 공격력이 다르다. 두 번째 타격이 더 아프다. 세 번짼 더 아플 것이다.
‘콤보를 허용해선 안 된다…!’
판단한 데미안이 황급히 방패를 들어올렸다. 어느덧 날아오고 있는 레가스의 주먹을 막아내기 위함이었고 그 타이밍과 각도는 예술에 가까웠다.
레가스의 주먹이 초대형 사각방패에 가로막히기 직전이었다.
퍼억!!
“컥!”
데미안이 또 한 번 피를 토했다.
사각으로부터 날아온 레가스의 발차기에 당한 것이다!
‘언제 발차기를…!’
팔과 다리를 시간차 없이 자유자재로 다루다니?
레가스의 실력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작년 국가대항전에서 통합랭킹 3위 크리스를 쓰러뜨리고 그리드와는 멋진 승부를 펼쳤던 레가스…! 그가 한층 더 진화하였습니다!!』
『하오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컨트롤 솜씨에 무투가 계열 직업 특성이 맞물리면서 그를 초월적인 존재로 승화시켜버렸군요. 감탄밖에 안 나옵니다.』
이대로 레가스가 승리하는 게 아닐까?
모두가 조심스럽게 추측해보는 그때 레가스의 다음 공격이 데미안의 턱을 강타하고 있었다.
“와…”
관중들이 탄성을 토했다.
콤보가 연계되면 연계될수록 레가스의 공격력이 증폭되며 데미안의 생명력 게이지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데미안에게는 교황의 특권이 있었다.
“여신의 숨결.”
절대적인 회복 스킬.
자신의 생명력을 100퍼센트, 파티원의 생명력을 70퍼센트 회복시키는 사상 최강의 힐이 데미안의 생명력을 가득 채웠고.
“여신의 보호.”
쩌어어어어엉!!
적의 공격을 1회 무효화시키는 방어막이 전개되며 레가스의 타격을 무력화시키킴과 동시에 콤보를 초기화시킨다.
이어서 데미안이 사용한 스킬은 여태까지와 달리 공격적이었다.
“여신의 격노.”
퍼어어어어어어어어엉!!
두 줄기 빛의 섬광이 레가스를 덮쳤다.
***
『승자 데미안!!』
데미안과 레가스의 대결은 1라운드와 2라운드 모든 경기를 통틀어서 가장 치열했다.
각자 지닌 패를 모조리 꺼내든 두 사람은 무려 31분 20초를 싸웠고 관중들과 시청자들은 대결 내내 열광했다.
해설진조차 역대급 명승부라고 표현할 정도로 두 사람의 대결은 볼거리가 풍부했고 심도 깊었다.
그래서일까?
세상 사람들은 여운에 잠긴 채 헤아려 나오질 못했다. 무대 위 진행자가 연신 떠들어봤자 부질없게도 집중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그리드와 크리스.
두 거물의 이름이 진행자의 입을 통해서 거론되는 순간 모두의 시선이 다시금 무대 위로 집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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