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274화 (269/1,794)

템빨 22권 - 12화

하오가 혼란에 휩싸였다.

‘이 상태로 싸웠다가는 판단력이 저하되어 위험할 수도 있다.’

명석하게 판단한 하오가 뒤로 힘껏 도약, 그리드와의 거리를 크게 벌렸다.

혹시라도 그리드가 따라붙을까 염려하며 경계하였으나 그리드 또한 반격을 걱정했는지 따라붙지 않았다.

안전거리를 확보한 하오가 생각해보았다.

‘1초 만에 새로운 무기를 꺼냈다고?’

스왑도 아니고, 단순하게 새로운 아이템을 꺼내서 무장하는 방법이야 간단하다.

우선 인벤토리를 연 후, 그 다음 허공에 생성되는 인벤토리에 손을 뻗으면서 ‘원하는 아이템’을 떠올리면 된다.

하지만 이 일련의 과정에 소요되는 시간은 평균 2.5초다. 이것도 하이랭커들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의 이야기다.

인벤토리를 열고 손을 뻗는 과정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약 1초, 거기에 추가로 원하는 아이템을 명확하게 상기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약 1.5초.

집중력이 매우 높은 플레이어의 경우 그 시간을 최대 2초까지 단축시킬 수 있다고 들었지만 1초라니?

이는 결코 불가능한 수치다.

한데 그리드는 해냈다.

‘당최 무슨 수를 쓴 거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납득할 수 없었던 하오가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

“버그냐?”

솔직히, 웃기는 질문이라는 건 누구보다도 하오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Satisfy는 오픈 이래 지금까지 단 한 번의 버그도 발생하지 않은 게임이었으니까!

흔들리는 하오의 눈동자를 고요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그리드가 피식 웃더니 말문을 열었다.

“내가 옛날부터 멍청해갖고 말이야.”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해도 남들보다 잘할 수 없었다. 심지어 평균조차 유지하지 못했다.

특히 공식이나 요점을 이해해야만하는 과목들은 시험에서 늘 30점 미만을 받았었다. 심할 경우 빵점을 받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단순암기 과목에 집착했지. 매일 달달 외우고, 또 외우고, 외우고…”

그 결과 단순암기 과목들만큼은 최고 80점 이상을 받을 수 있었다.

‘돈만 내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표현되는 어느 대학교에 간신히 턱걸이로 입학하는데 성공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후 대학수업을 따라가기란 무척 힘든 일이었다.

“그러던 도중에 가상현실게임이 출시됐고, 난 이 게임을 생업으로 삼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

하지만 부족한 재능은 게임에서조차 발목을 붙잡았다.

그리드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온종일 Satisfy에 매달렸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평균에 도달하지 못했고 돈벌이는커녕 빚쟁이 신분이 됐다.

“멍청해서 맨날 저렙 몹만 사냥하다보니 도태됐던 거야. 남들이 고렙 몹 10마리, 20마리 잡는 동안 난 저렙 몹 1,000마리를 넘게 잡았다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 레벨도, 아이템 수준도 발전하지 못하고 캡슐비도 못 갚아서 결국 공사판을 전전하는 신세가 됐지.”

여기서도 처음엔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하면 뭐하는가?

“이해력이 딸려서 기술을 배울 수가 없더군.”

그래서 단순작업에만 집중했다.

삽질, 자재 나르기, 청소 등의 잡역만 끊임없이 반복했다.

“늘 지루했어.”

공부도, 게임도, 일도.

단순한 것밖에 해낼 수 없으니 도통 재미를 느낄 수 없었고 자괴감에 빠졌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반복했다.

부족한 재능을 원망하면서, 그저 평균은 되고 싶다는 생각에. 더 이상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는 일념으로!

그 결과 그리드가 얻은 것?

불굴의 끈기다.

목표만 정해지면 그리드는 그것을 해낼 때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집중했다.

즉, 그리드는 집중력이 매우 단련되었다는 뜻이며 이는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한 후에도 꾸준히 증명된 사실이다.

아이템 하나 만들 때마다 수십 시간씩 제자리에 앉아 망치질을 해왔고, 각종 시련과 마주했을 때도 극복하기 전까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다보니까 집중력이 남들보다 더 뛰어나진 것 같다.”

그리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그의 집중력은 이미 인간의 범주를 초월한 수준이었다.

인벤토리를 소환함과 ‘동시에’ 원하는 아이템을 명확하게 상기하고 꺼내들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그것도 전투 도중에 말이다.

물론 이 또한 쉽게 해낸 일은 아니었다.

번헨 열도에서 자신의 분신과 싸울 당시.

아이템을 필요에 따라서 스왑하며 사용하는 분신을 보고 영감을 받은 후부터 꾸준히 단련해낸 결과 이룰 수 있던 일이다.

“뭐, 노력의 힘이랄까.”

“…?”

무슨 개소리인지 하오는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리드의 말이 황당무계했다.

바보가, 바보이기 때문에 노력했고, 노력했기 때문에 인간을 초월하는 집중력을 얻게 되었다고?

‘그건 바보라기보다 천재의 영역이 아닌가?’

노력만으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많지 않다.

하오가 봤을 때 그리드는 천재였다. 한데 자꾸만 본인을 둔재라는 듯이 말하자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다.

한편 그리드는 카메라를 의식하고 있었다.

“과연, 혜성그룹의 다이아몬드 클래스 캡슐은 동화율이 굉장하구나. 생각하는 그 즉시 모든 시스템이 반응하니까 인벤토리도 즉각 열리고 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네?”

“…”

이 와중에도 ppl이라니?

‘내가 그토록 우습단 말이냐!’

바닥에 떨어져있던 이야루그트를 수습하고 다시 거머쥐는 그리드를 바라보는 하오의 눈빛에 살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그래, 네가 바보든 천재든 상관없다. 어쨌든 승자는 내가 될 테니까! 내 진짜 실력을 보여주마!”

쩌적!

쩌저저저적!!

소리치는 하오의 피부가 갈라지면서 그 속으로부터 붉은 비늘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용족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몸 곳곳에 솟아난 붉은 비늘과 등 뒤로 솟구친 거대한 한 쌍의 날개가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드디어 용족의 힘이 개방되었군요!』

『저 상태의 하오는 엄청 강하죠. PvP의 강력한 우승후보 중 하나인 카츠를 상대하고 지친 상태로 또 데미안과도 잠시나마 호각을 겨뤘을 정도니까요.』

흰자위와 눈동자가 온통 황금색으로 물들어 기이한 느낌을 주는 하오가 송곳니가 돋아난 입을 쩍 벌렸다.

그러자 화염의 브레스가 직선으로 뿜어지며 그리드를 덮쳤다.

퍼엉!!

그리드가 피했다.

물리공격이야 삼겹갑 등이 피해량을 경감시켜주므로 맞는데 부담이 적었지만 마력이 섞인 브레스는 경우가 달랐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기고만장할 수 있을까!”

브레스를 피하고자 허리를 뒤로 젖히고 있는 그리드에게 날갯짓 한 번으로 접근한 하오!

광속의 이동속도를 선보인 그가 소리치며 양손을 전광석화처럼 휘둘렀다.

쩌정! 쩌저정!!

용족으로 변신하면서 검을 버린 이유가 있었다.

하오의 날카로운 발톱이 그리드의 삼겹갑을 두드리는 파괴력이 검을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3,23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3,26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티라멧의 허리띠>의 경험치가 0.3퍼센트 상승하였습니다!]

‘대박!’

맞으면 맞을수록 그리드는 쾌감에 휩싸였다!

살면서 이토록 행복했던 순간이 과연 몇 번이나 있었을까 싶을 정도!

상처투성이가 되어가는 도중에도 웃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해설진과 시청자들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맞으면서 웃다니…’

그리드는 변태가 아닐까?

공성전에서 NPC에게 도리깨질을 당할 때부터 떠돌던 추측이 기정사실화되어가는 그때였다.

“격의 차이가 느껴지느냐!!”

하오가 소리쳤다.

때리면 때리는 대로 족족 얻어맞는 그리드를 보면서, 하오는 자신과 그리드의 클래스 차이가 하늘과 땅이나 다름없다는 확신을 품고 있었다.

실제로 그리드의 생명력은 벌써 절반 가까이 떨어지고 있었다.

검을 버리고 사지 전부를 공격수단으로 삼고 있는 하오의 공격속도가 워낙 빨랐기 때문에 그리드의 생명력이 떨어지는 속도 또한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촤악-!

“……!”

하오의 날카로운 발톱이 그리드의 가슴을 크게 베었다.

크리티컬이 발생하면서 그리드가 큰 타격을 입었지만 놀란 건 그리드가 아니라 하오였다.

삼겹갑의 미늘 틈새로 발톱이 끼어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용의 발톱>이 공격대상의 갑옷에 구속당합니다!]

[<반용의 발톱>을 강제로 뽑아냅니다!]

[<반용의 발톱>의 내구력이 3 손상되었습니다!]

‘별 황당한…!’

용족으로 변신하고 있는 동안만 사용할 수 있는 발톱의 내구력은 10.

수리가 불가능하며 내구력이 다 떨어지면 마모되어 소멸한다.

다시 재생하기까지 무려 하루의 시간이 필요했다.

한데 하오는 발톱의 내구력이 떨어지는 경험을 해본 바 없다.

반용의 발톱이 워낙 단단했기 때문이다.

고렘 계열 몬스터를 사냥하거나 하이랭커의 무기와 수십 회를 맞부딪쳐도 발톱은 늘 멀쩡했다.

‘엄청난 갑옷이다…’

그리드의 템빨에 새삼 경악한 하오가 공중에서 회전, 발의 뒤꿈치로 그리드의 턱을 정확히 가격했다.

이 순간 그리드의 생명력 게이지가 3분의 1까지 떨어졌다.

그리드가 슬슬 갓 핸드와 흑화를 활용하리라고 판단한 하오가 경계하면서도 더욱 더 강력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브레스를 토하고, 온갖 궤도로 발톱을 휘둘렀다.

반면 그리드는 반격조차 못했다. 공격을 막거나 피하기에만 급급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공격을 허용하고 있었으니 하오의 컨트롤 솜씨가 얼마나 출중한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너무나도 일방적인 전투 내용에 해설진이 당혹을 금치 못했다.

『하오가 그리드의 카운터격인 존재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수준 차이가 날 줄은 몰랐군요.』

『지금 그리드는 단지 맷집으로 버티고 있을 뿐입니다.』

“흑화를!”

퍼억!

“사용할!”

퍽퍽!

“틈조차 잡지 못하겠지!”

콰쾅!!

한껏 기세가 상승한 하오의 일방적인 폭력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드는 맞고, 맞고, 또 맞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급기야 생명력이 4분의 1까지 떨어진 그를 확인한 하오가 마무리 일격을 준비했다.

“이걸로 끝이다.”

경기 시작 후 어느덧 20분이 지나버렸다.

10분 내로 쓰러뜨리겠다는 선언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하오는 심히 아쉬웠지만 어쩌겠는가?

그리드의 방어력과 생명력이 터무니없이 뛰어난 것을!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다. 종지부를 찍을 때다.

“용의 발톱.”

키이잉.

하오의 손끝에 솟아난 발톱들. 즉, 반용의 발톱이 기성을 토하며 한층 더 단단하고 날카롭게 변했다.

이 순간 하오의 발톱은 진짜 드래곤의 발톱과 비견될 정도로 강력해졌다.

“죽어라!”

하오의 할퀴기가 좌우로 교차하며 그리드를 때리는 순간이었다.

뒤로 물러서며 보법을 밟은 그리드가 파그마의 검무, 회(回)를 전개하였다.

해설진과 시청자들은 이를 그리드의 최후의 발악이라고 보았다.

여태껏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했던 그리드가 반격기 타이밍을 잡을 수 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치 못했다.

하지만 정작 그리드를 마주하고 있는 하오의 등골은 오싹해졌다.

그리드의 반격기 타이밍이 너무나도 완벽하였기에!

쩌저저저저저정!!

“크아아아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른 하오가 붉은 피를 토했고…

[크리티컬!]

[대상에게 25,6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엘핀스톤의 반지>효과로 생명력 1,280을 회복하였습니다!]

단 일격에 하오의 생명력을 절반 가까이 깎아버린 그리드는 도리어 생명력을 회복해버렸다.

후속타를 염려한 하오가 집어던진 쇠사슬을 <란스티어의 망토>로 막아 튕겨낸 그리드가 <도란의 반지>를 은밀하게 착용하며 도발했다.

“앞으로 40분. 버틸 수 있겠어?”

“이 새끼가…!”

반격기의 재사용 대기 시간은 길다. 또한 반격기를 2개 이상 보유한 플레이어는 드물다.

감안한 하오가 아직 지속 시간이 남은 용의 발톱을 재차 휘둘러 그리드의 안면을 베어버렸다.

[크리티컬!]

[대상에게 12,59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됐다!’

어째서인지 그리드의 방어력이 급감한 것처럼 보였지만 좋은 징조이므로 괘념할 필요가 없다. 이로서 다시 승기를 잡을 수 있다.

타격에 성공한 하오가 회심의 미소를 그렸다. 하지만 그 미소가 유지되는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대상이 18,885의 생명력을 회복하였습니다!]

“뭐라고!!”

무슨 원리로 작동한 효과란 말인가!

귀신에 홀린 표정을 지은 하오가 주춤주춤 뒷걸음쳤다.

어느새 얼굴이 핼쑥해진 그를 보면서 이죽거린 그리드가 앞서 쇠사슬을 방어하고자 몸에 둘렀던 란스티어의 망토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드러나는 것은 삼겹갑이 아닌 <성스러운 빛의 갑옷>.

삼겹갑보다 물리 방어력은 훨씬 더 낮지만 ‘회복 계열 스킬의 효과를 300퍼센트 상승시킨다.’는 터무니없는 옵션을 보유한 갑옷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다시 덤벼.”

빛의 갑옷의 효과를 보고자 착용했던 도란의 반지를 빼서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그리드가 갑옷을 삼겹갑으로 교체하며 손을 까닥인다.

그를 넋 잃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하오가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기권이다.”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하오를 응원하고 있던 중국의 14억 인구가 일제히 귀를 의심하였다가 이내 좌절하였다.

하지만 중국인들보다 더 크게 좌절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왜!”

그건 바로 그리드였다.

“아직 40분이나 남았는데! 왜!!”

이날.

그리드의 비장의 패 중 하나가 또 전 세계에 노출되었다. 썩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