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2권 - 11화
“난 1시간. 제한시간이 끝나기 직전에 맞춰서 너를 때려눕혀주지.”
“…?”
늘 순식간에 적들을 제압해온 그리드의 선언이라기엔 이상한 구석이 있다.
어리둥절해하던 해설진과 시청자들이 일제히 깨달았다.
‘그리드가 하오의 실력을 무척 높이 평가하는구나.’
‘하긴, 그건 당연한 일이지. 하오의 컨트롤 솜씨는 이미 궁극에 이르렀다는 게 세간의 평가이니까.’
오죽하면 대륙의 기적, 전투의 귀재라고 불리겠는가?
‘대인전에서 천외천 다음으로 거론되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하오다. 최근 그리드의 컨트롤 솜씨가 하이랭커와 비견될 정도로 성장했다지만 하오보다는 한 수 아래야.’
‘더군다나 하오에게는 무기와 갑옷을 벗기는 스킬이 있다. 그리드의 가장 큰 강점인 템빨조차도 하오에겐 통용되지 않아.’
‘한 마디로 최악의 상성… 그리드가 운이 없군.’
그리드 또한 강력한 우승후보임을 사람들은 잊지 않았다.
하지만 우승후보라는 단어가 무적을 뜻하는 게 아니다.
우승후보라도 상성에 따라서 취약점을 보일 수밖에 없었고 공교롭게도 하오가 그리드의 카운터였다.
1라운드부터 하오를 만나게 된 그리드는 한 마디로 재수 오지게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리드를 바라보는 시청자들의 시선에 측은지심이 머물렀고 하오는 자신감을 표출했다.
“네가 내게 1시간 동안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심지어 나를 때려눕히겠다고? 불가능한 말만 입에 담는군. 곧 현실을 깨닫도록 만들어주지.”
“어라!!”
하오의 도발적인 발언을 잠자코 듣는가 싶던 그리드가 갑자기 화들짝 놀랐다.
눈을 최대한 동그랗게 뜨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엿보였지만 안면근육이 딱딱하게 굳은 상태라 쉽지 않은 듯하다.
‘뭐지?’
갑자기 놀라고 어색한 표정을 짓는 그리드를 보고 하오와 관객들이 의아해하는 그때!
“이야! 혜성그룹에서 출시한! 다이아몬드 클래스의 초호화 캡슐에 장착 된 최고급 사운드 시스템이! 훌륭하구나! 하오의 말소리가 똑똑히 들리는 건 기본이고 숨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리네! 이건 마치 현실에서 마주보고 앉아서 대화하는 것 같은 기분이야! 이야! 이것 참 놀랍구나! 나도 꼭 구매해야지!!”
“…”
그리드가 ppl을 전개했다.
더듬더듬, 국어책 읽기로 외치며 얼굴을 붉히면서도 끝까지 대본을 다 읊었다.
남에 돈 받아먹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현재 대회를 시청 중인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몸소 주지시켜주는 모습이다.
“…어차피 질 게 뻔하니까 광고료라도 챙기려는 속셈이군.”
하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공식석상에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돈만 밝히는 고작 이런 놈이 언젠가 크라우젤을 넘어설 거라고?
라우엘의 미친 헛소리가 뇌리를 맴돌면서 하오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싹을 밟아놓겠다.’
그리드가 강하다는 사실은 하오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크라우젤과 비견될 정도는 결코 아니며 자신의 선에서 정리할 수 있는 상대라고 믿었다.
그만한 자부심을 지닐 자격이 하오에게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하오가 누군가?
과거, 레이단 침공전 당시 혼자서 템빨단원 15명의 발을 5분 동안 묶은 괴물이다. 그 강함에 경탄한 라우엘은 반드시 하오를 영입하겠노라고 다짐했던 바도 있다.
“너는 절대로 하늘을 부술 수 없다. 하늘에 오르기도 전에 내게 박살날 테니까!”
하오의 선언.
그리고…
『1라운드 마지막 경기! 32조 그리드 대 하오, 하오 대 그리드의 대결이 지금! 시작됩니다!!』
진행자가 소리쳤다.
이게 신호였다.
타앗!
이를 악 문 하오가 경기 시작과 동시에 돌진했다.
단순하게도 직진으로 이동하여 그리드는 대처하기가 무척 쉬웠다.
도살귀의 안대와 이야루그트, 거기에 높은 통찰력까지 이용해서 하오의 공격지점을 예측하고 이야루그트를 휘둘러서 대응하고자 시도했다.
한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야루그트가 일러주던 하오의 검로가 삽시간에 세 가닥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뭐지?’
세 개의 검로 중 무엇이 진짜란 말인가?
그리드가 당황하는 사이,
서걱!
하오의 검격이 그리드의 허리를 베어버렸다.
‘이럴 수가!’
하오에게는 대상의 방어력을 일부 무시하는 패시브가 있는 듯하다.
예상보다 큰 피해를 입은 그리드가 떠오르는 알림창을 보고 경악했다.
그 표정을 읽은 하오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엄살이 심하군.”
“…”
그리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앞에 떠오른 알림창에 시선을 빼앗긴 채 그저 입만 뻥긋거렸다.
충격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하오의 공격에 너무 큰 피해를 입어서?
아니다.
[2,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3천의 피해량.
삼겹갑과 큰 투구 등이 물리데미지를 감소시켜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피해가 들어온다는 것, 솔직히 굉장했지만 최대 생명력이 무려 7만에 육박하는 그리드를 위협할 수준은 아니다.
솔직히 그리드의 입장에선 간지럽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였다.
한데, 그리드는 왜 이렇게까지 놀라는 걸까?
이유는 따로 있었다.
[<티라멧의 허리띠>의 경험치가 0.1퍼센트 올랐습니다!]
‘대박!!’
그리드가 희열에 휩싸였다.
등급 성장형 아이템, 티라멧의 허리띠.
방어구라는 특성상 공격을 맞을 때마다 경험치가 오르는 이 에픽 등급의 아이템은 뱀파이어에게 공격을 100대쯤 맞아야 경험치가 0.1퍼센트 오르는 수준에 불과했었다.
한데 하오의 공격은 단 한 대 맞은 것만으로 경험치가 차오른 것이다!
이건 거의 드레이크와 싸웠을 때와 비견되는 수준!
‘그만큼 하오의 공격이 수준 높다는 뜻이겠지?’
그리드는 하오의 솜씨에 재차 감탄하면서 전율했다.
이거 어쩌면…
‘이번 라운드 내에 티라멧의 허리띠 등급을 올릴 수도 있겠어!’
그리드가 하오를 상대로 1시간 동안 싸울 계획을 짠 이유는 크게 2가지다.
첫째, 동화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최대한 벌기 위해서였고.
둘째, 이야루그트와 엘핀스톤의 반지, 그리고 티라멧의 허리띠 같은 등급 성장형 아이템의 경험치를 최대한 누적시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경험치가 잘 오를 줄은 몰랐다.
‘클래스가 다르긴 다르군.’
그리드가 나름 인정하는 실력자들.
봉드레, 알렉산더 등에게 공격을 허용했을 때도 이 정도로 경험치가 많이 쌓이진 않았다.
확실히, 하오는 그들과 격이 다른 존재인 듯하다.
실제로 이야루그트도 긴장하고 있었다.
피아로, 크라우젤과 대련했을 때를 제외하면 거의 말문을 열지 않았던 놈이 오래간만에 떠들어댔다.
[저자의 공격에 실린 묘리가 무척 뛰어나다. 검로를 예측하기 어려워.]
‘매번 느끼는 거지만, 진짜로 강한 상대와 싸울때는 너 정말 쓸모가 없구나.’
[이익…! 어쩔 수 없잖느냐! 힘이 봉인되어서 본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을!]
지옥제일검사 출신답게 자존심 강한 이야루그트가 소리칠 때마다 검신이 웅웅, 기성을 토해내며 혈빛 마기를 꽃잎처럼 흩날렸다.
그 아름다운 이팩트가 시청자들은 물론이고 하오마저도 현혹시켰다.
“네겐 너무 과분한 검 같군.”
“이 녀석이 이렇게 멋져진 건 순전히 내덕분이라고.”
기껏 큰 돈 들여서 연금술 시설을 이용했건만 귀속 된 옵션이 <멋짐>이다.
참으로 치 떨리는 결과를 상기하며 몸서리친 그리드가 하오에게 손을 까닥였다.
“언제까지 쉴 거야? 어서 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하오가 이번엔 지그재그로 이동하여 그리드에게 접근하더니 검을 찔렀다. 한데 앞서 공격과 달리 검로가 단순하였기에 그리드는 쉽사리 막아낼 수 있었다.
채앵!
검과 검이 충돌하는 순간이었다.
촤르륵!
힘의 충돌로 인하여 그리드의 행동이 일시적으로 멈추는 순간을 노리고 하오가 뻗은 쇠사슬이 그리드의 허리를 휘감아버렸다.
“……!”
물리적인 구속에는 상태이상저항 패시브가 작용하지 않는 바.
그리드의 몸이 하오의 앞으로 당겨짐과 동시에 검에 찔렸다. 그것도 2연격이었다.
[2,83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2,91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티라멧의 허리띠>의 경험치가 0.2퍼센트 올랐습니다!]
“크아…! 그것 참.”
아이템 경험치가 오르는 건 좋지만 일방적으로 얻어맞으려니 불쾌하다.
또한 피해가 누적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엄청 세네.’
방어력을 무시하는 패시브가 삼겹갑의 효력을 저하시키고 있다. 아니, 어쩌면 PvP추가데미지 패시브까지 보유한 건지도 모르겠다.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쇠사슬을 풀어낸 후 반격을 시도했다.
하오가 피할 시도를 못하도록 직선으로 내리꽂는 공격을 가한다.
최단 검로가 하오를 위협했지만 하오는 검을 들어 쉽사리 막아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리드의 근력이 터무니없이 높다는 점이었다.
끼릭! 끼기긱!!
‘이게 무슨…!’
오우거에게 짓밟히는 느낌이 이럴까?
그리드의 강한 근력이 실린 이야루그트의 무게를 감당 못한 하오가 검째 짓눌리기 시작한다.
촤르륵!
주춤주춤, 뒷걸음치던 하오가 다시 한 번 쇠사슬을 꺼내 던졌다.
하지만 전투경험이 농후한 그리드가 똑같은 패턴에 당해줄리 만무했다.
하오가 쇠사슬을 던지는 순간 이야루그트를 옆으로 흘려 하오를 떨쳐낸 후 좌로 한 보 이동, 아슬아슬하게나마 쇠사슬을 피해버렸다.
이때 하오는 충격으로 비틀, 균형을 일었으므로 반격을 시도하지 못했다.
우선 물러서려는 그를 뒤쫓으면서 보법을 밟은 그리드가 파그마의 검무, 살(殺)을 전개한다.
‘야쿠르트 경험치도 올려보자!’
쿠오오오오오오!!
극도의 살기가 집약 된 궁극의 찌르기!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터뜨리며 날아오는 공격을 마주하고 마른 침을 삼킨 하오가 다급히 움직였다.
‘허용하면 안 된다!’
반용족 하오는 액티브 스킬이 별로 없는 대신 다양한 패시브 스킬을 보유하고 있다.
PvP 공격력 상승과 방어력 상승, 대상의 방어력 일부 무시, 받는 피해 일부 흡수, 빠른 체력 회복 등.
쉽게 말해 전투에 최적화 된 육체를 지녔다.
플레이어간의 전투에서 공격을 허용하고 1만 이상의 데미지를 입은 경우가 손에 꼽을 정도.
상황에 따라서, 적의 공격을 일부러 허용한 뒤 이를 반격의 발판으로 삼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의 공격력은 너무 부담스럽다.
한 대라도 맞았다간 다른 랭커들이 그랬듯 골로 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하오는 필사적으로 손을 앞으로 뻗었다.
터억!
실로 완벽한 타이밍!
날아드는 이야루그트의 검날을 하오가 손 끝으로 붙잡아 살짝 비틀어버렸다!
[<이야루그트>가 해제됩니다!]
[스킬로 인한 결과입니다. 아이템 소유권을 잃지 않습니다. 12초 후, 아이템이 인벤토리로 되돌아옵니다.]
무기 흘리기의 발현이었다.
시스템적으로 표시되는 지점을 정확히 집어야지만 발동되는 비기!
반격기보다 사용난이도가 훨씬 더 높은 최고난이도의 기술이 이야루그트를 지면 위로 맥없이 떨어뜨렸고,
“흐아압!!”
용의 숨결을 소환하여 검에 두른 하오가 그리드의 심장을 찔렀다.
빈손이 되어버린 그리드는 그 공격을 막을 수 없었고 피해야만 했지만 피하기엔 너무 빠른 공격이다.
이 순간 하오는 그리드에게 치명상을 입힐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갓 핸드로 대처하더라도 문제없다.’
이미 놈들을 제압할 쇠사슬의 전개 준비는 끝난 상태다.
지금 상황에서 그리드가 반항할 수 있는 수단은 끽해야 매직 미사일로 반격하는 것.
그 정도 피해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
“뭣이!!”
자신하며 회심의 미소를 그리던 하오가 경악하며 두 눈을 부릅떴다.
쩌어어엉!!
대체 어느 틈에 새로 꺼낸 것일까?
놓쳐버린 이야루그트를 대신해서 흑청색 대검을 무장한 그리드.
그에 공격을 가로막혀버린 하오의 흔들리는 시선이 카메라에 클로즈업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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