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2권 - 10화
‘나하고 싸웠을 때도 그러더니만, 이번에도 은신을 공격수단으로 활용했다가 된통 당하는군. 스펙은 뛰어난데 아쉽네. 암살자라는 태생적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건가?’
놀랍게도, 이는 크라우젤과 타르마의 전투를 지켜본 ‘그리드’의 감상이었다.
국가대항전 기간 동안 각국을 대표하는 랭커들과 수준 높은 무력과 지략을 겨루고 복기한 그리드의 의식수준이 또 한 단계 진화하였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암살할 때면 또 몰라도 전면전에서의 공격수단으로 은신을 활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결국 다시 나타나리라는 사실을 뻔히 예상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서 등장지점을 예측할 수도 있으니까 은신의 강점이 미미해진다. 방금처럼 광역기 맞으면 그대로 끝이고.’
심지어 타르마는 그림자 어쌔신이다.
공격수단과 방어수단으로 그림자를 활용할 수 있었으므로 은신은 공격수단이 아닌 비장의 한 수로 남겨두는 게 맞았다.
언젠가 윈스톤에서 만났던 그림자 어쌔신처럼 말이다.
그림자의 왕, 카심이라고 했던가?
본인의 그림자뿐만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모든’ 그림자를 공수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활용했던 NPC.
‘은신을 활용하는 능력 또한 대단했다고 후로이가 말했었지…’
<그림자의 왕>이라는 광오한 이명을 처음 들었을 때는 허세덩어리라고 콧방귀 뀌었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카심은 진짜배기 강자였다.
‘…네임드급 NPC였군.’
만약, 그 당시의 카심이 내게 끝까지 칼을 겨눴었다면?
‘100퍼센트 확률로 내가 지고 죽었다. 놈이 자리를 피했던 이유는 두려워서가 아니었어.’
나를 봐줬던 거다.
그게 의문이다.
‘왜지?’
깊이 생각해보는 그리드였지만 진실을 알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
과거에 비해서 전체적인 스탯이 상승하고 통찰력까지 오른 지금까지도 그리드는 모르고 있었다.
그 대단한 그림자의 왕이 내 아들 로드의 곁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PvP.
그 누구의 개입도 허락되지 않는 1대1 진검승부의 영역. 오로지 개인의 역량만이 승부를 좌우한다.
PvP의 승리자들은 충만한 희열과 자부심을 만끽할 수 있었고 반면 패배자들은 뼈아픈 자괴감에 빠졌다.
희비가 교차하는 현장.
“우와와아아아아아!!”
관중들의 함성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각국을 대표하는 최강자들의 화려한 전투가 관중들을 흥분시키고 있었다.
“이여, 이게 누구야? 일전에 내게 꼬리를 내리고 도망쳤던 랭킹 3위가 아니신가?”
수십 명의 대진이 끝나고 이어서 진행 된 31조 경기.
크리스VS수에론.
7대 길드의 마스터라는 공통점을 지닌 두 사람이 무대 위에서 마주했다.
영혼약탈자 수에론이 이죽거렸다.
“약해빠진 너를 보면서 랭킹의 개념은 무의미함을 새삼 다시 실감했다. 그렇지? 실력은 상관없이 오직 레벨만 높으면 장땡인 게 바로 랭킹이니까 말이야.”
몇 개월 전 개최됐던 7대 길드 마스터 모임 당시.
수에론과 크리스가 시비 끝에 자웅을 겨룬 일이 있었다.
결과는 수에론의 일방적인 승리.
크리스는 수에론에게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수에론이 크리스보다 강했기 때문에?
아니다.
크리스가 힘을 숨겼기 때문이다.
당시의 크리스는 7대 길드 연합 가입을 거부했었고, 또한 그리드와 한통속이라는 의심까지 사고 있었으므로 적진 한가운데 고립되어 있는 셈이나 다름이 없었다.
자칫 날뛰었다간 다구리 당해서 사망할 위험이 있었고 그 탓에 치욕을 감수하며 반격을 삼갔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이곳은 적진 한가운데가 아니며 1대1 승부의 장이다. 그 누구도 전투에 개입할 수 없다.
“뭐, 네 말대로 랭킹은 강함의 절대적인 척도가 아니다. 당장 지발만 봐도 랭킹 2위답지 않게 여기저기서 깨지고 다녔으니까. 하지만 나는 많이 다를 거다.”
“큭큭, 이미 내게 일방적으로 짓밟힌 전력이 있는 주제에 뭘 믿고 까부는지 모르겠군.”
“그때는 내가 봐준 거고.”
철컥!
크리스가 12억 원을 들여서 +9까지 강화시킨 <그리드의 대검>을 꺼내들었다.
안개처럼 희뿌연 백색 예기에 휩싸인 흑청색 대검은 거대하여 위압적이었고 그러면서도 검날이 수려하여 아름다웠다.
눈살을 찌푸린 수에론이 살기를 드러냈다.
“네놈, 역시나 그리드와 같은 무기를 쓰는구나! 그리드와 한통속이라는 소문이 사실이었어!”
“내 무기가 그리드의 무기와 같다? 아닌데? 전혀 다른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서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일삼는 크리스였다.
그에 가증스러움을 느낀 수에론이 언성을 높였다.
“개소리! 누가 봐도 그리드가 사용하는 대검 중 하나와 지금 네가 무장한 대검의 생김새는 똑같다!! 그게 같은 무기가 아니라면 뭐냐!!”
크리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다르지. 그리드의 대검은 8강짜리에 불과하고 내 무기는 무려 9강이니까.”
“…”
선수 대기석에 앉은 채 경기를 관람 중이던 그리드가 뜨끔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아.”
그리드는 한숨밖에 안 나왔다.
전설의 대장장이 <파그마의 후예>는 <아이템 강화 확률 상승>이라는 패시브를 지닌 바.
그리드는 누구보다도 고강화 아이템을 많이 보유해야 정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8이상까지 아이템을 강화한 경험이 15회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특히 +9 아이템을 띄워본 경험은 단 3번밖에 없었다.
맥시멈 강화라고 알려진 +10강화?
상상 속의 산물이다.
“…재수도 참 오지게 없지.”
부끄럽고 분하여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리드.
다른 선수들이 그에게 측은지심이 담긴 눈빛을 보내는 사이 무대 위 크리스와 수에론은 서로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전투 특화 유니크 클래스의 위력을 보여주마!!”
이미 내게 한 번 짓밟힌 경험이 있음에도 기세 좋게 까부는 크리스를 향해 분노를 담고 소리치는 수에론.
반면 크리스는 차분할 따름이다.
“직업빨도 실력이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부질없지.”
더 이상 긴 말은 필요치 않았다.
퍼엉!!
경기 시작을 알리는 진행자의 외침과 동시에 <영혼 폭발>을 사용, 폭발력을 추진력으로 이용한 수에론이 찰나지간에 크리스와의 거리를 좁혔다.
동시에 연계되는 검격은 광속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빨랐다.
아마 수에론의 이 기습적인 선공에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은 국대전 참가자 중에서도 손에 꼽을 것이었다.
하지만 크리스는 통합랭킹 3위다.
지발처럼 사냥에 특화된 클래스를 얻어서 빠르게 레벨을 올린 것도 아니다.
크리스는 지발이 아닌 크라우젤과 비교해야할 존재였다.
오직 검 한 자루만으로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온 인물이었고 그 실력은 경이적이었으니까!
쩌어어엉!!
“……!”
수에론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걸 막아?’
그리드라는 돌연변이는 논외로 치고, 대부분의 대검술사는 공격속도가 무척 느렸다.
대검술사의 정점이라는 크리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민첩성보다는 근력과 체력 위주로 스탯을 분배하기 때문이며 대검이라는 무기 자체가 공격속도 하락을 유발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한데 크리스에게는 공격속도라는 개념이 무의미해보였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내는 검술을 구사함으로서 단점을 극복하고 있었다.
살짝 검을 세워 수에론의 광속 찌르기를 막은 것으로 모자라, 검과 검이 충돌하는 순간에 근력을 집중시켜 수에론의 몸을 뒤로 튕겨내는 동시에 반격을 가했다.
‘검로 자체가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염두에 두고 있던 건가…!’
경탄을 금치 못하면서 <영혼 갑옷>을 소환, 크리스의 반격으로 입은 피해를 최소화시킨 수에론이 그대로 <영혼 화살>을 소환하여 쏘아댔다.
퍼퍼퍼퍼퍼퍼펑!
뒤로 이동하면서 원거리 공격을 날리는 것은 적을 견제하기에 무척이나 효과적인 방법이다.
심지어 공격모션이 없다면 더더욱 그렇다.
영혼을 매개로 삼는 수에론의 공격 스킬들은 대부분 모션 없이 전개가 가능했고 캐스팅 시간 또한 빨랐다.
괜히 전투에 특화 된 클래스가 아닌 것이다!
“흡!”
따라붙지 못하고 대검을 세워 영혼 화살들을 막아내는 크리스.
그 사이 원하는 간격을 확보한 수에론이 <영혼전이>를 전개하여 흉악한 총명검을 강화시켰다.
우우우웅-
크리스의 무기처럼 +9까지 강화되어 백색 예기를 내뿜던 흉악한 총명검이 강한 옥빛에 휘감기더니 이어서 빛살처럼 쏘아졌다.
쐐애애애액!!
그리드가 확신했다.
‘저건 무조건 피해야 된다.’
탱커가 방패를 세워 막아도 온전히 피해를 흡수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다. 크리스가 대검으로 막아봤자 검의 내구력만 손상되고 치명상을 입을 게 뻔했다.
제아무리 그리드라도 정면으로 맞설 생각은 못하고 무조건 피하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회(回)로 반격 타이밍을 잡기가 어려울 정도로 빠르고 예리한 공격이었으니까.
한데 크리스의 판단은 달랐다.
애초에 민첩성이 낮은 대검술사에게 있어서 회피란 능숙하지 못한 영역!
회피와 방어를 과감히 포기하고 대검을 휘둘러서 도리어 반격을 가했다!
서걱!
푸욱!
“크윽…!”
“흡!”
크리스와 수에론이 동시에 신음을 토했다.
하지만 더 큰 피해를 입은 쪽은 누가 봐도 크리스였다.
수에론의 검은 크리스의 심장을 정확하고 깊숙하게 찌른 반면 크리스의 대검은 수에론의 어깨를 살짝 파고드는 수준에 그쳤다.
이 순간 수에론은 자신의 승리를 장담했다.
찔렀던 검을 회수함과 동시에 <영혼 창>을 소환, 크리스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추가적인 피해를 입히며 이때 자신은 재차 검을 찔러 넣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유니크 등급의 세컨드 클래스 <폭군>을 보유한 크리스의 터프함이 상상초월이었다.
치명상을 입은 대가로 감수해야만 했던 상태이상 <경직>을 기합으로 극복하더니 영혼 창의 폭격을 무시하고 대검을 쥐고 있는 양손에 더욱 더 큰 힘을 실었다.
꾸두둑!!
“크아아아악!!”
크리스의 대검이 어깨 깊숙이 파고들자 비명을 내지른 수에론의 무릎이 구부려졌다. 그 탓에 앞으로 찔러 넣고 있던 검의 궤도가 비틀렸고 이는 크리스에게 닿지 못했다.
이후 전황은 급격하게 기울어졌다.
<폭군의 탄압>을 전개한 크리스가 멈추지 않는 콤보를 넣어 수에론에게 치명상을 입혔고 수에론은 <영혼 감옥>을 전개하여 크리스를 봉쇄한 뒤 사태를 수습하고자 시도했지만 크리스의 공격력이 워낙에 강력한 탓에 빠르게 생명력이 고갈되고 말았다.
『승자! 크리스!!』
“와아아아아아아!!”
“저게 바로 하이랭커지!”
“지발이랑은 다르구만!!”
파괴적인 전투가 스타드 드 프랑스 국립경기장의 열기를 한층 더 뜨겁게 달궈놓은 그때.
『자! 다음으로 1라운드의 대미를 장식시켜줄 선수들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대륙의 기적! 중국의 용! 전투의 귀재, 하오!!』
『단신으로 네 개의 금메달을 획득하고 한국을 종합순위 1위로 끌어올린 괴물! 최초의 레전드리 클래스 전직자! 파그마의 후예, 그리드!!』
“주인공 등장.”
그리드가 무대 위로 올랐다.
아름다운 마검 <이야루그트>가 보석과도 같은 혈빛 검광을 흩뿌리며 관중을 현혹시켰다.
콧방귀 뀐 하오가 선언했다.
“10분. 내가 널 10분 내로 쓰러뜨리겠다.”
그리드가 새로운 하늘이 될 거라고?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다.
크라우젤만이 유일한 하늘이며 언젠가 그를 무너뜨릴 존재는 다름 아닌 나다.
의욕을 불태우는 하오에게 그리드가 흰 이를 드러내보였다.
“난 1시간. 제한시간이 끝나기 직전에 맞춰서 너를 때려눕혀주지.”
“…?”
어째 두 사람의 대사가 바뀐 것 같다?
늘 단시간 내에 적들을 쓰러뜨려온 그리드가 하는 선언치고는 매우 이상했기에 해설진과 관중들 모두가 어리둥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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