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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271화 (266/1,794)

템빨 22권 - 9화

“최선을 다 해서 도전하겠다, 크라우젤.”

그리드의 눈빛은 진중했고 또한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승패를 논하기에 앞서서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있음이 엿보였다.

크라우젤의 양심이 난도질당했다.

‘미안하다.’

그리드, 당신은 모르는 사실이지만 나와 라우엘은 이미 부당한 거래를 나눴다.

‘내게는 당신의 순수한 마음에 응해줄 자격이 없어.’

꾸욱.

주먹을 말아 쥐는 크라우젤의 얼굴이 분함과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그에게 있어서 Satisfy는 더 이상 게임이 아니다.

즐길 수 없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이런 자신을 목표로 삼고 있는 그리드를 비롯한 수많은 플레이어들에게 그는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죄책감에 무너질 여유 따위 없었다.

“…나는 오로지 이기기 위해서 싸우겠다.”

마음을 독하게 먹은 크라우젤.

어머니의 병을 고칠 수 있는 희망을 쟁취하고자 한 걸음, 두 걸음 무대 위로 오르는 그의 얼굴을 침식한 그늘을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했다.

하지만 오직 단 한 명.

“…”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의 한 병원.

오래간만에 제정신을 찾고 병실에 누워있는 크라우젤의 어머니.

그녀만큼은 TV 속 아들이 슬퍼하고 있음을 알아보고 눈물 흘렸다.

『조 추첨 순서는 국가 순위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진행자의 안내를 받은 그리드가 64명의 선수 중 가장 먼저 유리통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안에 담겨있는 형형색색의 공 중 하나를 고민 없이 집어 낚아챘다.

평생토록 자신을 괴롭혀온 악운을 기세만으로 쫓아버리겠다는 듯이!

그리드가 뽑은 공에 적힌 숫자를 확인한 진행자가 소리쳤다.

『32조. 그리드 선수가 32조로 배정되었습니다. 다음은 2위국 미국의 스컬 선수가 추첨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스컬 선수는 12조로 배정되었네요.』

『다음 차례는 천외천 크라우젤입니다.』

어마어마한 주목도!

크라우젤이 유리통 앞으로 다가서는 순간 TV를 시청 중인 시청자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그리고…

『1조! 크라우젤 선수는 1조입니다!!』

『허허, 이것 참 드라마틱해졌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최고의 우승 후보로 손꼽히는 크라우젤과 그리드 두 선수가 결승전 전까지는 만날 일이 없게 되었네요.』

『만약 두 선수가 결승전에서 만나게 된다면 시청률이 상상을 초월하겠는데요?』

『아마 전 세계 대부분의 도시 도로가 텅텅 비게 되지 않을까요?』

“우와아아아아!!”

해설진이 흥분하였고 관중들과 시청자들은 열광했다.

각국 방송사 관계자들은 만세삼창을 외칠 정도였다.

최고의 빅매치가 성사 될 가능성이 열렸고 이에 따라서 광고료 최고 기록을 갱신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들보다 더욱 더 기뻐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건 다름 아닌 그리드였다.

‘아싸!!’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그리드!

그는 결승전 전까지 크라우젤과 만나지 않게 되었음에 환호하고, 전율하며 스스로가 자신의 악운을 떨쳐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허… 또 다른 강력한 우승 후보인 중국의 하오 선수가 그리드 선수와 같은 32조로 배정되었군요.』

『1라운드부터 치열한 전투를 볼 수 있겠네요.』

『통합랭킹 3위 크리스와 영혼 약탈자 수에론이 31조에서 맞붙게 됐습니다.』

『둘 중 이기는 사람이 32조의 승자와 싸우게 될 텐데요.』

『우승 후보가 넷이나 한쪽 라인에 몰리다니… 저쪽은 완전히 죽음의 조군요.』

『허, 말씀드리는 순간 데미안이 29조를 뽑았습니다.』

“…”

잠시 후 완성 된 대진표를 확인한 그리드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이게 말이나 돼?’

하오, 크리스, 수에론에 이어서 폰, 레가스, 데미안, 카츠에 이르기까지.

쟁쟁한 우승 후보들이 모조리 그리드와 가까운 조로 배정됐다.

그리드는 한 경기를 이길 때마다 그 강력한 존재들과 싸워야할 신세가 된 것이다!

결승전에 도달하기까지 단 한 번도 쉬운 경기가 없을 정도!

“…이거 정신적으로 너무 지치겠는데.”

악운을 떨쳐낸다는 건 역시 불가능한 일인 듯하다.

새삼 깨달은 그리드가 치를 떨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뭐, 경험치 쌓기엔 좋겠군.”

***

‘이건 기회다.’

대륙의 기적, 하오.

스스로를 크라우젤 다음가는 강자라 믿어 의심치 않는 그가 저 멀리 서있는 그리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저자를 꺾으면.’

내 강함은 확실하게 증명될 테고 크라우젤 또한 나를 의식하게 될 터.

서로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크라우젤과 그리드를 번갈아 본 하오가 의욕을 불태웠다.

‘크라우젤, 당신의 그 시선을 앞으로는 내가 독차지하도록 하지.’

하오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강자가 바로 크라우젤이다.

하오는 늘 크라우젤을 의식했고 크라우젤을 목표로 삼고 살아왔다. 크라우젤에게 관심 받고 인정받고 싶은 것은 세계 제일 크라우젤 빠돌이로서 당연한 욕구였다.

그에게 그리드란 좋은 희생양에 불과했다.

‘완벽하고 화려하게 박살내주마.’

다짐하는 하오.

관중석에 앉은 채 그를 바라보는 라우엘의 입가에는 서늘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

“그리드 결승전까지 못 올라갈 것 같은데?”

“첫 경기부터 하오와 매칭된 것도 모자라서…”

“32강부터 4강까지 쭉 우승후보들하고만 싸워야하다니, 이건 말도 안 돼.”

“한 번 방심하거나 약점을 노출하는 순간 그대로 탈락일 듯.”

“뭔 대진표가 저따위냐…”

대한민국 국민들의 표정이 우중충하다.

국가대항전 1위!

오로지 그리드 덕분에 꿈꿔볼 수 있었던 대한민국의 위업이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으니까!

“이건 거의 조작 아닌가?”

“100프로 조작이지. 그게 아니면 그리드 혼자서만 저렇게 독박 쓸 리가 없지.”

“상대적으로 크라우젤을 보라고. 대진 운이 말도 안 되게 좋잖아? 저쪽 라인에서 크라우젤을 긴장시킬 수 있는 사람은 끽해야 스컬 정도네.”

“블러드 카니발인지 나발인지의 타르마는 처음 등장했을 때만 화려했지 정작 그리드한테 한 방에 죽은 호구였고.”

“러시아가 주최측한테 돈 먹였네. 자기들 우승 시켜달라고.”

대한민국 국민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대진표가 그리드에게 최악으로 설정 된 이유.

조작이 아니라 순전히 그리드의 악운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사실을 말이다.

***

‘차라리 잘 됐다.’

타르마.

통합랭킹 2위조차 암살한 전력이 있는 그.

표적 맞추기에서 그리드에게 일격에 사망한 이후로 쭉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처지였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도리어 작금의 처지를 긍정적으로 봤다.

암살대상 크라우젤에게 조금도 경계 받지 않았으니까.

‘100억짜리 목.’

확실하게 취해주마.

피식!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타르마가 대진표를 확인했다.

64강 제1조 경기.

크라우젤VS타르마.

“큭…! 큭큭큭! 좋아, 이거 아주 좋아!”

최강최악의 다크 게이머 집단 블러드 카니발!

그중에서도 대인전만 놓고 보면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강자인 내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리라!

살기를 피어올린 타르마가 무대 위로 올라섰다.

광활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거대한 무대 중앙에는 이미 크라우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흑발 사이로 가라앉은 눈동자가 엿보인다.

깊고도 탁한 눈.

뭔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다른 것 같지만 타르마는 신경 쓰지 않았다.

분위기 따위 어찌됐든 상대는 사냥감일 뿐이었다.

“천외천! 천외천! 천외천!!”

모든 관중들. 아니, 어쩌면 전 세계인들이 크라우젤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으며 열띤 응원을 펼친다.

하지만 타르마는 동요하지 않았다.

관중들의 목소리가 Satisfy에 접속하고 있는 그에겐 들리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는 본래부터가 응원보다 비난에 더 익숙한 인물이었기에.

‘크라우젤, 너를 쓰러뜨린 후.’

그대로 결승전까지 올라 그리드에게도 설욕해주마.

“킥킥.”

즐거운 계획을 짜며 음침하게 웃은 타르마가 복면을 고쳐 썼다. 평범한 복면이 아니라 은신 스킬을 강화시켜주는 아티팩트였다.

무대 위에 마주보고 선 그와 크라우젤을 확인한 진행자가 소리쳤다.

『제2회 국가대항전 폐막식, PvP! 그 첫 번째 경기를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PvP는 참가자들이 마음껏 싸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놓았다.

평평하고 넓은 무대.

한 경기가 끝날 때마다 초기화되는 스킬 쿨타임과 아이템 내구도.

그리드의 <동화>같은 경우 스토리상 재사용 대기 시간이 늘어난 것이라 이 시스템의 혜택을 받지 못했지만.

어쨌든 참가자들은 앞뒤 걱정 않고 마음껏 전력을 펼치면 되는 것이었고 타르마는 그동안 숨겨놓고 있었던 힘을 유감없이 개방했다.

파앗!

능숙한 솜씨로 그림자를 사방팔방 전개한 타르마가 그대로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다.

무대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그를 보고 시청자들이 긴장했다.

『타르마의 그림자 은신술이 발동했습니다!』

『그림자 은신술은 일반적인 은신보다 더 기척을 수월하게 감출 뿐더러 재등장 지점을 예측할 수 없어 골치 아픈 기술입니다.』

『시청자 여러분 집중해주십시오. 아마 곧 타르마는 크라우젤의 사각 부근의 그림자로부터 나타나 공격을…』

해설진이 열심히 상황을 설명하는 그때였다.

푸욱!

다짜고짜 자신의 백아도를 지면 위로 꽂아 넣은 크라우젤이 서늘히 읊었다.

“천지파열무.”

쿠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그것은 압도적인 물리력이었다.

마력으로 발생시키는 지진, 어스퀘이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렬하고 파괴적인 힘이 지면을 산산이 갈라놓았고 하늘마저도 짓눌렀다.

“크아아아아아악!!”

크라우젤의 돌풍 같은 검기가 휘저어놓은 지하로부터 상처를 입은 타르마가 비명을 내지르며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대단한 것이 그가 등장한 지점은 크라우젤의 측후면이었다. 끔찍한 고통 속에도 그는 냉정함을 잃지 않고 크라우젤의 사각을 찌르려고 시도한 것이었다.

하지만 PvP추가 데미지와 중독 옵션을 보유한 그의 강력한 황색 단도는 크라우젤에게 닿지 못했다.

타고난 혜안과 날카로운 감각으로 타르마가 어떤 식으로 대응해올지 미리 예측한 크라우젤이기에 손쉽게 회피한 후 도리어 반격을 꽂아 넣었다.

“쿨럭…!”

백아도에 심장을 꿰뚫리면서 크라우젤의 공허한 눈동자를 엿본 타르마가 이 순간 깨달았다.

‘이놈은 괴물이다…!’

단지 랭킹 1위라는 틀로 묶어놓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야말로 하늘 위의 하늘!

동네북 지발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천외천…!”

신음하는 타르마의 주변으로 펼쳐져있던 수십 개의 그림자가 일제히 일어서더니 크라우젤을 덮쳤다.

설마, 그림자가 직접적인 공격수단이 될 거라고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타르마는 크라우젤이 대응하지 못하리라 믿었고, 실제로 크라우젤은 타르마의 이 비장의 한 수에 당황했다.

공격을 허용했다간 위험할 수도 있단 사실을 그는 직감하였다.

그렇기에 <초감각>을 발동했다.

인간의 영역을 완벽히 초월하여 타르마의 그림자 공격과 그 틈새로 날아오는 비수의 폭우까지 피해내더니 이어서 타르마의 목을 베어버렸다.

『타르마! 로그아웃!』

순식간에 끝나버린 승부.

사용 된 스킬들의 이팩트가 무척 화려했다고는 하나 허무할 따름이다.

“…개사기.”

“저건 거의 무적이네.”

관객들이 술렁였다.

회피율과 명중률이 100퍼센트가 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한 크라우젤의 초감각 모드가 그만큼 사기적이었다. 몇 번을 봐도 경이적이었고 어떻게 공략해야 좋을지 그들로서는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건 PvP참가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승후보라고 거론되는 몇 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수들은 크라우젤의 초감각을 무척이나 두려워하고 있었다.

반면 그리드는….

“하음.”

지루하다는 듯이 하품이나 하고 있다.

애초에 이번 승부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는 듯이.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타르마를 강자로 인식하였던 그가 이제는 타르마를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었단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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