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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261화 (256/1,794)

템빨 21권 - 20화

화르륵!

석양이 지고 어둠으로 물든 세상에 한 줄기의 거대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회광반조라 하였던가!

사그라지기 직전의 촛불이 한 차례 큰 불꽃을 일으키듯, 상처 입은 드레이크가 화염을 몸에 두른 것이었다.

“쿠워어어어어어어!!”

미약하게나마 용의 피를 이은 존재.

거체를 움직이며 포효하는 드레이크의 위압감은 필시 대단했다. 인간들이 우러러보기에 부족함이 없는 상위종으로서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뽐냈다.

하지만 그를 마주하고 선 사내에게 있어서 드레이크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나보다.

사내는 조금도 긴장한 기색 없이 날아올라 푸른 대검을 휘둘렀다.

서걱!!

어둠 위로 푸른 검광이 은하수처럼 아로새겨진다.

드레이크의 거대한 머리통이 두 쪽으로 갈라져나갔고 갈 곳 잃은 불꽃과 비산하는 핏줄기가 사방으로 난무하였다.

후둑!

후두둑!!

드레이크를 일격에 반으로 갈라버린 푸른 대검의 흑발 사내.

비처럼 쏟아지는 드레이크의 잔해를 망토로 막아내는 그의 이름은 그리드였다.

잿빛으로 산화하는 드레이크를 확인하고 시선을 카메라로 돌린 그가 입을 열었다.

“혜성 그룹.”

?

혜성 그룹이 뭐 어쨌다고?

그리드의 발언에는 두서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지금 이 순간 그리드에게 집중하고 있는 전 세계 수억 명의 시청자들이 혜성 그룹을 인식했으니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혜성 그룹은 그리드의 단 한 마디 덕분에 천문학적인 광고효과를 누린 것이다!

“훌륭해…!”

중계방송을 시청 중이던 혜성 그룹 임직원 일동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갈채를 보냈다.

특히 회장 육덕판은 덩실덩실 춤까지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드의 말 한 마디 덕분에 혜성 그룹이 세계적인 인지도를 쌓았고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할 발판이 마련되었으니 감격적이었다. 너무 고마운 나머지 자신의 외손녀라도 소개시켜주고 싶은 심정이다.

이날.

마지막 순간까지도 ppl을 잊지 않은 그리드의 프로정신은 자본주의 사회의 귀감이 되었다.

***

미국팀 선수 대기실.

“저건 순전히 운빨이잖냐!!”

그리드의 레이드 영상을 처음부터 돌려본 지발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템빨이란 소리는 안 했다.

단지 템빨이라고 비하하기에는 그리드의 아이템 활용 능력이 무척 뛰어났고 그 부분은 인정하는 지발이었다.

하지만 인정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드레이크의 생명력 절반을 일격에 날려버린 그리드의 말도 안 되는 공격력 말이다.

“저건 분명히 크리티컬에 약점 공격이 터지고 아이템의 옵션과 칭호 효과까지 모조리 발동해야지만 선보일 수 있는 공격력이다!”

모든 잠재력이 극한까지 끌어올려졌다는 뜻이다.

이는 로또 1등에 당첨된 것과 비견되는 행운이 작용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현상이었다.

지발은 분했다.

“저… 저 빌어먹을 자식은 게임의 신에게 축복이라도 받은 건가…!”

그리드가 평소에 얼마나 재수 없는 인간인지 지발은 몰랐기 때문에 이렇듯 함부로 말하는 것이다.

잠자코 듣고 있던 라우엘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드님께서 정녕 게임의 신에게 축복을 받은 존재였다면, 지금쯤 그리드님의 아이템은 레전드리 등급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겠지.’

레전드리 등급 아이템과 유니크 등급 아이템의 가치는 수십, 수백 배까지도 차이가 난다.

라우엘이 봤을 때 레전드리 등급 아이템을 만들지 못하는 전설의 대장장이 그리드는 세상에서 가장 불운한 인물이었다.

가끔씩 발동하는 행운도 악운이 누적되어야지만 발생하는, 일종의 반동 같았기에 라우엘은 그리드가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당신께서는 전생에 나라를 몇 개나 팔아먹으신 겁니까…’

아니, 어쩌면 하나의 세계를 절멸시킨 마왕 출신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당신과 나는 전생에 적이었겠군요. 뭐, 좋습니다. 전생의 악연은 현생의 인연으로 거듭나는 법이니까요.’

라우엘이 흑염룡과 함께 대륙을 종횡무진하였던 전생을 떠올려보는 그때였다.

『저런!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분전했던 태국이 결국 레이드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로서 32개국 참가국 중 레이드에 성공한 국가는 23개국으로 정해졌군요.』

레이드가 막을 내렸다.

최종 순위는 1등 한국, 2등 미국, 3등 일본이었다.

‘레이드에 실패한 국가 중에 템빨단원이 속한 국가는 없군.’

템빨단원 전원 드레이크의 드롭템을 통한 이득을 취하게 되었으니 경사나 다름이 없다.

정작 1등한 한국의 유라와 극검은 눈곱만큼의 이득도 챙기지 못했다는 사실, 라우엘은 상상조차 못하고 안도하며 기자회견장으로 향했다.

***

“드레이크를 구속했던 그 거대한 작살 세트는 본인이 직접 만드신 겁니까?”

“어떻게 그런 초대형 보조무기를 제작할 발상을 하실 수 있었죠? 또한 보조무기의 한계를 극복할 수리도구까지 함께 제작하시다니, 그 철두철미함에는 솔직히 감탄만 나왔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작살 세트의 제작과정과 얽힌 에피소드를 들어볼 수 없을까요?”

“대체 갓 핸드는 못하는 게 뭡니까? 갓 핸드의 옵션을 공개해주십쇼!”

“두 개의 검을 합칠 경우 위력이 얼마나 증폭되는 건지 알려주실 수 없을까요?”

“드레이크의 생명력이 정확히 48퍼센트 남은 시점에서 일격에 해치우셨는데요. 전문가들은 그리드님께서 2천만가량의 데미지를 띄웠을 거라고 예측하더군요. 이게 사실입니까?”

“드레이크의 생명력이 50퍼센트 이상이었을 당시, 타국의 하이 랭커들은 드레이크에게 일격을 허용할 때마다 생명력을 4분의 1씩 잃은 반면 그리드님의 생명력은 10분의 1가량밖에 떨어지지 않는 걸 확인했습니다. 방어력 수치와 생명력 수치를 대략적으로나마 공개해주실 수는 없는지요?”

“흑마법사도 아닌데 흑화를 발동할 수 있는 원리가 뭐죠? 아티팩트의 힘인가요?”

기자회견장에는 한국, 미국, 일본의 대표 선수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하지만 수백 명 기자들이 질문하는 대상은 오직 하나 그리드였다.

세계인의 관심이 그리드에게 집중되어있음을 증명하는 대목이었다.

함부로 자신의 능력치를 공개할 수 없었던 그리드가 연신 노코멘트를 외치는 그때였다.

“오늘부로 단체전 일정은 전부 끝났고 개인전만 4개 남았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대장장이 제작 승부인데요. 그리드님께서는 대장장이 제작 승부에는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던 바가 있죠. 아직까지도 그 선언은 유효한 겁니까?”

만약.

정말로 만에 하나라도 그리드가 개인전 종목에서 3개의 금메달을 따게 된다면 한국이 종합 순위 1등을 노려볼만한 경우의 수가 생긴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그리드는 금메달을 딸 확률이 높은 종목에 참가하는 게 맞았고, 그리드가 금메달을 딸 확률이 가장 높은 종목이 바로 대장장이 제작 승부였다.

한국인 기자들은 제발 그리드가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꿔서 대장장이 제작 승부에 참가하겠다고 선언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리드의 뜻은 확고했다.

“대장장이 승부엔 참가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대체 왜?

그리드의 쓸데없는 고집에 혀를 내두른 기자들이 술렁이는 그때였다.

미국 대표 중 하나인 대장장이 랭킹 1위 판미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리드 당신은 나와의 승부가 두려워서 피하려는 거요?”

명백한 도발이다.

이 순간 미국 대표들과 국민들의 가슴이 철렁였다.

굳이 그리드가 대장장이 대회에 참가하게끔 만들어서 미국이 금메달을 놓칠 가능성을 만들려는 판미르의 어리석음에 적잖게 놀란 것이다.

하지만 판미르는 장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있었다.

운 좋게 레전드리 클래스로 전직해서 아무런 노력도 없이 좋은 아이템을 찍어냈을 그리드 따위보다야 자신이 훨씬 더 훌륭한 대장장이임을, 판미르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내라면 덤벼보시오, 그리드. 작년처럼 도망치지 말고.”

판미르는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초급 대장장이 과정부터 차근차근 밟아온 자신의 견고한 실력을! 그간 쌓아온 노력과 열정을!

그렇기에 계속해서 그리드를 도발했다.

“당신이 이름뿐인 전설이라는 사실을 이 내가 만천하에 공개해보이겠소!”

“…”

판미르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사내였다.

나름 연배가 있으니 그리드는 우선 참고 잠자코 듣고 있으려고 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무리다.

이름뿐인 전설?

“이것 참 어이가 없네.”

스윽

정면으로 향해있던 그리드의 얼굴이 미국 팀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높은 콧대와 다부진 턱 선이 부각되는 그리드의 옆모습, 무척이나 남성적인 매력을 발산하여 여성들에게는 기대고 싶다는 욕망을, 남성들에게는 닮고 싶다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찰칵찰칵!

심상찮은 기류가 흐르는 가운데 카메라 셔터가 일제히 터지기 시작했다.

꿀꺽!

어떤 특종이 생길까?

각국 기자들이 긴장하고 기대하며 그리드와 판미르를 주시하는 그때 드디어 그리드가 입을 열었다.

“격의 차이를 보여드리죠.”

“……!”

미국 대표들과 국민들을 제외하면 세상사람 모두가 기대했던 대결이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좋았어!’

미국 대표석의 라우엘이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라우엘의 시선이 저 멀리, 외로이 홀로 벽에 등을 기대고 서있는 크라우젤에게로 향했다.

‘축하드립니다, 크라우젤.’

소중한 어머니의 병을 고칠 수 있는 희망을 얻었음에.

***

대장장이 제작 승부의 주제는 ‘장검 제작’이다.

어떤 특별한 장검을 제작하라는 게 아니다.

300레벨 제한의 평범한 장검.

주최 측에서 제공하는 제작법과 재료를 참가자 전원이 공통되게 사용하여 승부에 임하는 내용의 게임이었다.

그리드가 대장장이 제작 승부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아이템 제작이란 결국 운이 크게 작용하는 바!

악운의 아이콘인 그리드의 입장에선 ‘운빨 X망 겜’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평범한 장검>

등급:노말~레전드리

“…노말로 뜨면 개망신인데.”

그리드가 직접 창조한 아이템들의 경우 최소 등급이 에픽~유니크부터 시작하는 반면 평범한 제작법은 이렇듯 노말~레어 등급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악의 사태를 염려하며 두려워하던 그리드가 이내 마음을 다스렸다.

‘내가 그동안 제작한 장검의 개수가 3천 개는 넘는다.’

장검은 밸런스가 뛰어난 무기다.

모든 무기를 통틀어서 가장 수요가 높았고 그리드 또한 장검을 제작한 경험이 많았다.

특히 레이단의 1천 병사… 아니, 지금은 2천 명에 육박하게 된 병사들에게 무기를 보급하기 위해서 그리드는 꾸준히 장검을 제작해왔다.

솔직히 말하면 눈 감고도 만들 수 있는 게 바로 장검이었다.

그리드는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믿었다.

‘증명해보이마.’

내가 전설의 대장장이로 전직하게 된 것은 의지와 상반되는 참극이었을지언정, 전직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역할에 소홀히 한 적이 없음을.

누구보다 운이 없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왔던 그리드의 긍지는 판미르보다 높으면 높았지 결코 낮지 않았다.

“로그인.”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캡슐로 향한 그리드가 Satisfy에 접속했다.

우선 드레이크가 드롭한 아이템들의 정보부터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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