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1권 - 12화
드비리온.
몽크들이 섬기는 토착신 중 하나다. 사냥의 신으로 알려져 있다.
지발이 <드비리온의 사자>로 전직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오로지 랭킹 1위를 목표로, 레벨 업에 정진하기 위해서 사냥에 특화 된 클래스를 선택한 것이다.
PvP에 약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지녔지만.
본래 지발은 그 단점을 크게 체감하지 못해왔다.
타고난 전투 센스가 워낙에 탁월하였기에, 그는 스스로가 약하다고 인식하는 게 불가능했고 대인전에서 패배한 경험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계’에서의 이야기였다.
소위 ‘천상계’라고 표현되는 탑클래스들을 상대로는 단지 재능만으로 부족하다는 사실, 이제 지발은 확실히 깨달았다.
‘레이단 침공전부터…’
그래, 미친 농부에게 호미 한 방에 찍혀 죽은 그날부터.
지발은 쭉 패배의 역사를 써내려가는 중이다.
내가 호미에 찍혀죽다니!
그 믿기지 않는 현실에 시름하고 있을 때 타르마라는 암살자에게 뒤치기를 당해서 죽은 바 있고, 급기야 이번 국가대항전에 와서는 폰에게 중상을 입었으며 크라우젤로부터 패퇴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이 순간…
“극살(極殺).”
푸우욱!!
“……!”
[치명적인 일격을 당했습니다!]
[사망하였습니다.]
[국가대항전용 서버입니다. 사망 패널티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리드에게 죽어버렸다.
패배, 패배, 패배에 이은 또 패배.
스네이크 길드의 수장이자 미국을 대표하는 자신이 동네북 신세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지발의 수치심과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늘 칭송받아온 내가…!’
누구보다도 잘났다고 자부해온 내가 연달아 개망신만 당하다니!
이대로는 안 된다.
바닥까지 떨어진 명예를 반드시 수복해야만 한다.
흑백으로 변해버린 풍경을 보면서, 지발은 다짐했다.
‘강해지겠다!’
더 이상 랭킹 따위에 집착하지 않는다.
‘레벨의 개념을 초월하는 무력을 손아귀에 넣을 것이다!!’
오로지 재능만으로 싸워온 지발.
그가 이날을 계기로 노력이라는 발판을 갖게 되었다.
***
[파티원 ‘지발’이 사망하였습니다.]
그리드에게 일격을 허용함과 동시에 잿빛으로 산화하는 지발.
통합랭킹 2위가 허망하게 사망하자 전 세계인들은 물론이고 라우엘까지 당혹을 금치 못했다.
‘뭐지?’
라우엘은 지발을 여러모로 높이 평가해왔다.
과감한 결단력과 실행력, 독보적인 보스 레이드 능력과 레벨 업 능력, 타고난 센스 등.
지발을 상징하는 그 장점들을 모조리 차치하고, 단순하게 지발이라는 ‘캐릭터’의 능력치만 살펴보더라도 지발은 Satisfy 탑 10에 들 자격이 충분한 존재였다. 그만큼 강하고 밸런스가 뛰어났다.
한데 그리드에게 단 한 방에 죽어버린 것이다.
지발의 생명력이 비록 절반 이하밖에 남아있지 않았었다고는 하나, 지발의 장비와 레벨 등을 고려해봤을 때 이는 본래 발생할 수 없는 결과였다.
라우엘의 시선이 한국의 마법사 NPC가 손에 쥐고 있는 농기구로 꽂혔다.
‘저 도리깨…’
정황상, 큰 제약을 지닌 대신 로또적인 확률로 최강 버프를 발휘하는 아이템으로 보인다.
덕분에 현재 그리드의 공격력은 평소보다 최소 2배쯤은 상승한 것 같았고.
‘환장하겠군. 저런 괴상한 아이템은 또 언제 만드신 거지.’
그리드가 한동안 번헨 열도에 머물렀던 탓에, 그리드의 최근 스펙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게 치명적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안일했음을 자책한 라우엘이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전장을 한 눈에 담기 위함이었다.
푸욱!
콰작!!
“…이거 난감하네.”
비명이 쏟아지고 피가 난무하는 전장.
그를 관조하는 라우엘의 눈가가 씰룩인다. 그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너털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미쳐 날뛰는 그리드.
단신으로 미국의 진형을 헤집어놓는 그의 무력, 측정하는 게 불가능한 수준이었기에.
‘3차 전직 NPC들조차도 짚단처럼 베어 넘기다니.’
현재 그리드의 강함은 마치 초감각 상태의 크라우젤을 보는 것만 같다.
굳이 등급을 매겨보자면 재앙급.
인간이 항거할 수준이 아니다.
하지만 라우엘은 포기하지 않았다.
버프에는 제한 시간이라는 것이 있는 법.
특히 위력이 뛰어난 버프일수록 지속 시간이 짧다.
그리드가 저토록 날뛸 수 있는 시간도 최대 2분밖에 되지 않으리라.
판단한 라우엘이 군대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숲에 불을 붙여라!”
그리드에게 호응하여 날뛰기 시작한 한국군의 기세를 억제하기 위함일까?
NPC들에게 숲에 불을 지르게끔 만든 라우엘이 풍룡의 숨결을 소환, 일대를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들어버렸다.
“적장의 행동을 제약시켜라!”
라우엘은 쉴 새 없이 명령을 내렸다.
마법사들에게 돌의 장벽과 얼음 장벽을 소환하게끔 하여 그리드를 공간에 강제적으로 가둬버렸다.
하지만 마법사들이 요새처럼 쌓아올린 장벽조차도 그리드의 발을 묶는 건 찰나가 한계였다.
쿠콰콰콰콰쾅!!
“저, 저럴 수가.”
마법사들이 두 눈을 의심했다.
대량의 마나를 투자하여 연속적으로 소환한 장벽이 그리드의 일검에 산산조각 나버렸으니 그들의 상식으로는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결국, 라우엘은 극검과 유라의 견제용 패로 사용하고 있던 제퍼를 불러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곡예사 랭킹 1위, 제퍼.
민첩하고 변칙적인 행동을 발휘하며 적을 교란시키는 술수에 능숙한 인물이다.
크라우젤이 미국 진형을 습격해 들어왔을 당시, ‘제퍼가 마나만 있었어도 크라우젤은 날뛸 수 없었다.’라고 지발이 단언했을 정도로 제퍼의 능력은 출중했다.
“제퍼님, 그리드님의 발을 묶어주세요. 그 동안 저는 한국의 본대를 맡겠습니다.”
“알겠소이다.”
파앗!
통합랭킹 2위 지발과 3차 전직 NPC 6명을 삽시간에 잿빛으로 산화시킨 괴물, 그리드.
그에게 날아들면서도 제퍼는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본인의 솜씨를 믿었기에.
‘그 어떤 괴물일지라도 농락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곡예사지.’
시간을 버는 일 따위야 우습다.
“캬캬캬캬캬캬캬캬캭!!”
팽이처럼 회전하면서 그리드의 머리 위로 도약한 제퍼가 기괴한 웃음을 터뜨렸다.
무의미한 행위가 아닌, <곡예사의 웃음>스킬을 활성화시키는 것이었다.
이 웃음을 듣게 되는 적들은 청력을 일시적으로 상실하고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그리드는 저항했다.
제퍼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리드에게 상태이상 저항 능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미 숙지하고 있었으니까.
“킥킥킥킥킥!”
그럼에도 계속 웃는 이유, 스스로의 사기를 북돋음과 동시에 적들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뭘 자꾸 쪼개.”
상태이상은 저항했지만 웃음소리가 영 거슬린다.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접근해온 제퍼에게 이야루그트를 휘둘렀다.
파앗-!
혈빛의 검광이 보석처럼 흩뿌려지며 제퍼의 몸을 이등분한 그 순간.
퍼어어어어어엉!!
“큭!”
강력한 폭발이 발생하며 그리드가 신음을 토했다.
그리드가 벤 제퍼, 제퍼 본인이 아니라 폭발 능력이 귀속 된 분신이었던 것이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연기 너머로, 제퍼가 길게 찢어진 두 눈을 초승달처럼 휘었다.
“맹수의 링 넘기.”
퍼엉!
그리드를 중심으로 불타오르는 링이 생성되었고,
‘뭐?’
코끼리처럼 커다란 켈베로스가 나타나 링 중심부에 서있는 그리드에게 뛰어들었다.
그 기세가 무시무시하였기에 그리드는 반사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전달되는 충격이 없었다.
켈베로스의 환영은 그리드를 그대로 관통해서 링을 넘더니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이게 뭐야?’
단순한 눈속임이었다고?
뭐 이런 무의미한 스킬이… 라고 생각하던 그리드가 움찔했다.
자신을 중심에 둔 채 타오르고 있는 링이 부르르, 경기를 일으키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터진다!’
놀란 그리드가 뒤로 크게 물러섰고, 바로 그 지점으로 제퍼가 양손으로 굴리고 있던 12개의 공을 던져 직격시켰다.
퍼퍼퍼퍼퍼퍼퍼펑!!
“캬캬캬캭! 아프지 않소?”
또 한 번 폭발에 휩쓸려버린 그리드를 향해서 제퍼가 이죽거렸다.
그는 여유가 넘쳤다. 그리드를 해치울 순 없을지언정, 가지고 노는 일이라면 1시간이라도 해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물론, 그건 오만이었다.
“안 아파.”
저벅.
연기를 해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선 그리드.
그가, 이번에는 수백 마리의 비둘기를 소환하기 시작한 제퍼에게 한 마디 던졌다.
“너, 5초 뒤에 죽는다.”
그리드에게는 무수한 전투 경험이 있다.
비록 똑똑하진 못할지언정 적의 특징을 비교적 빨리 파악할 수 있었고 자신이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판단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캬캬캬캬캬캬!! 무슨 배짱으로 하는 말씀인지 모르겠소이다!!”
이번엔 정말로 웃겼다는 듯, 더욱 더 소리 높여 광소를 터뜨린 제퍼가 수백 마리의 비둘기떼를 그리드에게 날렸다.
펄럭이는 날갯짓에 그리드의 시야가 협소해졌고 수백 개의 부리가 그리드에게 위협감을 전달했다.
후두두둑, 비처럼 쏟아지는 새똥과 깃털이 혐오감까지 유발한다.
하지만 그리드는 동요하지 않았다.
온갖 버프 상태를 받아 상승한 이동력을 기반으로, 그저 제퍼가 있는 방향으로 돌진할 따름이었다.
‘상태이상을 죄다 저항해버리니 까다롭긴 하외다.’
혀를 찬 제퍼가 중절모를 벗었다. 그리드가 자신을 공격해오는 순간 거북이를 꺼내서 피회를 무효화시키고, 이어서 토끼를 꺼내 속도를 높인 뒤 반격에 나설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리드가 너무 빨랐다.
순식간에 도달해오더니만 검을 찔러왔으므로 제퍼는 토끼는커녕 거북이를 꺼낼 새조차 없었다. 필연적으로 <광대의 눈물>을 전개했다.
주변 대상에게 환각효과를 심어줌과 동시에 자신의 회피율을 무려 70퍼센트나 올려주는 궁극의 스킬이었다.
각종 아이템과 칭호, 직업 효과로 얻은 21퍼센트의 회피력까지 더해졌으니 현재 제퍼의 회피율은 총 91퍼센트인 셈.
심지어 타켓팅 스킬조차도 지금의 제퍼를 적중시키긴 어려운 일이었다. 거의 무적이나 다름이 없다는 뜻이다.
한데…
푹!
“쿨럭?”
혈빛의 마검에 심장을 꿰뚫린 제퍼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예상치 못한 고통에 이어서 의문이 피어올랐다.
‘왜 안 피해지는 것이오?’
그리드의 검격, 필시 피했다고 여긴 순간 갑자기 자석에라도 이끌린 것처럼 나를 따라와 찔렀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눈을 부릅뜬 채 피를 토하는 제퍼에게 그리드가 제2격을 날렸다.
푸욱!
“크헉…!”
왜?
당최 왜 공격이 안 피해진단 말인가!
강렬한 의문에 휩싸였던 제퍼가 문득, 가당치도 않은 가설을 세워봤다.
‘설마 이자의 명중률이 내 회피율을 상회한단 말이외까?’
말도 안 된다.
그런 사기적인 명중률이 존재할 리 없다.
‘그저 운빨이겠지요…!’
애써 부정해보면서, 제퍼가 잿빛으로 산화하였다.
“…”
전장에 적막이 찾아왔다.
지발에 이어서 제퍼까지.
최강이라 손꼽히는 랭커들을 허무하리마치 손쉽게 해치워버린 그리드의 무용 앞에 모두가 숨죽였다.
하지만 침묵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뭣들 해? 쓸어버려!!”
그리드의 외침을 신호로, 한국의 대표들과 NPC들이 일제히 미국군을 덮쳤다.
“쏴라! 쏴!”
미국의 저격수와 마법사들이 발악적으로 저항했다.
그들은 그리드를 최우선 제거대상으로 삼았으며, 모든 공격이 그리드에게 집중됐다.
하지만 현재 그리드는 방어력이 2배로 상승한 상태인 바.
제아무리 3차 전직 NPC들이 강하다고 해봤자 치명상을 입히기엔 무리가 있었다.
특히 마법사들의 마법 공격 같은 경우, <성스러운 빛의 무구 세트>가 일부 저항해버리기까지 했다.
정말이지 엄청난 템빨이다.
<엘핀스톤의 반지>에 귀속 된 흡혈 능력을 활용, 적의 폭격을 맞으면서도 생명력을 적정선으로 유지하며 미국의 진형을 관통해버린 그리드.
그와 1대1로 대면하게 된 라우엘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보통 템빨이란 말은 비하의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라우엘은 알고 있다.
템빨을 갖추고 활용하는 것 또한 그 사람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괜히 돼지 목의 진주목걸이란 말이 있겠는가?
특히 이번 전투의 경우, 그리드는 자신의 템빨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전략까지 구사해보였다.
그 극적인 성장에 라우엘은 감격할 따름이다.
“재능이라고는 쥐뿔도 없던 당신께서 설마 여기까지 성장해주실 줄이야… 어쩌면 바보이기 때문에 우직할 수 있었고, 그 덕에 계속해서 노력하실 수 있었던 거겠죠.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당최 얼마나 감동한 것인지, 라우엘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도리어 기분이 나빴다.
‘이게 칭찬이야, 욕이야.’
어찌됐든.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나, 너를 너무 좋아한다만 못 봐줘.”
지금의 그리드는 한국을 대표하는 입장이다. 또한 혼자 싸운 것이 아니라 동료들과 함께 싸웠다.
라우엘이 예쁘답시고 일부러 져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 사정, 라우엘은 이해했다.
본인 또한 그리드와 같은 입장이었기에.
“저도 못 봐드립니다.”
“…?”
대사가 이상하다?
마치 승자의 입장에서 말하는 듯한…
‘설마!’
그리드가 최악의 결과를 직감함과 동시였다.
[적에게 성을 점령당하였습니다!]
공성전의 패배를 전달하는 알림창이 그리드를 비롯한 한국의 대표 전원에게 떠올랐다.
라우엘은 빙그레 미소 짓고 있었다.
“숲에 불을 지른 게 스컬님께 보내는 신호였거든요.”
“…”
공성전은 파티 맺기나 귓속말 교환 시스템을 지원하지 않았다. 보다 실감나고 극적인 전쟁이 연출되길 바란다는 의도에서였다.
그래서 방심해버렸다.
그리드는 무척이나 아쉬웠다.
공성전 첫 경기 결과.
모두의 예상대로 한국이 졌다.
하지만 세상사람 그 누구도 한국을 조롱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인종과 국적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한국 대표들, 특히 그리드를 칭찬했다.
“잘 싸웠다!”
어찌 된 게 금메달을 땄을 때보다 더 주가가 오른 그리드였다.
그만큼 그리드가 보여준 모습이 멋졌다는 뜻이다.
지금의 그리드, 누군가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될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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