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1권- 11화
안테라바 숲에는 총 여덟 개의 길이 있다.
어떤 길은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있었고, 어떤 길은 장애물이 너무 많아 행군에 큰 지장을 줬으며, 또 어떤 길은 일렬이동만 가능할 정도로 좁았다. 물론, 대로처럼 넓게 뻗어 잘 닦인 길도 있었다.
하나 같이 다른 모양새의 길들.
각기 길이마저 달라 이동 시간이 큰 차이를 보이는 이 길들에는 딱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결국 그 끝이 적의 성까지 이어진다는 점.
그래, 어느 길을 선택하여 이동하든 적의 성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바로 그게 어려운 점이지.’
이동속도가 차이나는 여덟 개의 길을 어떤 식으로 이동하고, 방어해야 승리할 수 있을까?
경우의 수가 너무 많다. 확정적인 결과를 도출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라우엘은 달랐다.
환경적, 군사적 조건이 서로 비등할 경우 전략을 구상함에 있어서 가장 우선시되는 요소는 다름 아닌 적장의 성향.
그리드라는 인물을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자부하는 라우엘이었기에 승리를 확신한다.
***
안테라바 숲의 중앙을 관통하는 길.
최단 시간 내에 적의 성까지 도달할 수 있는 지름길임과 동시에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이동할 수 있는 평평한 대로다.
한국은 좌우로 숲이 길게 늘어선 그 대로를 진격 루트로 삼았다.
라우엘이라는 천재를 상대로는 어떤 식으로 잔머리를 굴려봤자 무의미하니, 차라리 힘을 한 곳에 집중시켜서 속전속결로 승부를 보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이는 라우엘이 예상한 바다.
“환영합니다.”
“……!”
대로를 달려 이동하던 한국의 군세가 흠칫 놀라며 멈춰 섰다.
좌우의 숲에서부터 미국의 복병들이 모습을 드러낸 까닭이었다.
탱커들이 곧바로 방패를 세워봤지만,
푹! 푸푸푸푸푸푹!!
퍼퍼퍼퍼퍼퍼퍼펑!!
“크악!”
“끅!”
이미 활시위를 당겨놓고 있던 미국측 저격수들의 화살세례와, 마법 캐스팅을 끝내놓았던 마법사들의 마법세례가 한국 군세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불시에 쏘아진 화살과 마법을 막거나, 피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적의 습격에 당한 한국군이 혼란을 수습하기도 전.
“쳐라!”
푸아악!!
지발을 필두로 삼은 미국의 탱커와 근접 딜러들이 돌격, 한국군에게 2차적인 피해를 입혔다.
지발은 이대로 한국을 짓밟을 심산이었지만…
‘뭐지?’
NPC들의 수준이 차이가 난다?
괴상한 일이다.
미국과 한국, 양측 다 동등한 스펙의 NPC를 지급받았을 터인데 어찌 된 일인지 한국측 NPC들의 실력이 더 뛰어났다.
완벽한 기습을 가하면서 전투를 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압도하기가 어려웠다.
“칫.”
3명의 NPC에게 발이 묶여버린 지발.
한국 진형 후위에서부터 유라가 마탄을, 마법사들이 마법을 날림으로서 역습을 가해오자 결국 병력을 뒤로 물렸다.
잠시간의 소강상태.
“어서 태세를 정비해!”
다급히 병력을 수습하는 한국 대표들 앞으로 라우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그리드님. 대영주의 검을 제대로 활용하셨군요.”
‘대영주의 검?’
영주의 검이란 것은 풍문으로 들어봤지만, 대영주의 검은 난생 처음 듣는 아이템이었다.
‘설마 공작에게만 지급되는, 보다 특별한 보검인 건가?’
지발이 의문을 품는 사이 극검은 치를 떨었다.
“라우엘… 우리의 이동경로를 마치 확신하고 있던 것 같구만? 무슨 배짱으로 여기에 병력을 집결시켜서 복병을 깔아놓은 거지?”
“공성전 시작에 앞서서, 저는 그리드님께 대단한 전략과 전술을 보여드리겠노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굳이 전략과 전술을 강조한 이유.
“그리드님께 한 가지 편견을 심어놓기 위함이었죠. ‘라우엘은 복잡할 책략과 용병술을 구사할 것이다.’라는 편견.”
이로 인해 유발 된 결과가 지금이다.
“그리드님께서는 제 책략을 예측하기를 포기하셨을 테고, 결국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타개책은 힘을 한 점으로 집중시켜서 빠르게 이동하는 것밖에 없었을 겁니다.”
단순하게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 그리드의 주특기라는 사실, 라우엘이 모를 리 없다.
기고만장하게도 말하는 그에게 극검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즉, 우리가 이 루트를 이용하게 된 게 결국 네가 의도한 결과대로였다는 건가?”
“바로 그겁니다.”
파파파파파팡!!
라우엘의 대답과 동시에 미국의 저격수들이 다시 한 번 활을 쐈다.
하지만 이번엔 한국의 탱커들이 방패를 세워 화살을 막아냈다.
방패에 막힌 화살들이 맥없이 바닥 위로 떨어지자, 그를 발로 짓밟아 뭉개버린 극검이 콧방귀 뀌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좀 불안했나본데? 너희들, 병력이 꽤나 빈다고. 우리보다 열 명가량이나 적잖아?”
극검의 입가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쩌면 우리가 이 루트를 이용하지 않을 수도 있을까봐, 불안해서 각 길목마다 한두 명씩의 방어병력을 배치해놓은 거 아니냐?”
라우엘이 반문했다.
“그렇다면요?”
“너희들, 이제 큰일 났다 이거지.”
라우엘의 얼굴이 흥미로 물들었다.
“어째서죠? 당신들의 숫자가 우리보다 많으니, 이 길을 돌파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 겁니까?”
“글쎄.”
그리드가 NPC들의 아이템과 역할군을 재분배하였고, 그 덕에 한국의 NPC들이 미국의 NPC들보다 한층 더 강해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양국 대표들의 수준 차이가 너무 컸다.
지발 등의 강자가 즐비한 미국을 상대로 한국 대표들은 숫자가 고작 10명가량 더 많다는 이유만으로 승리를 단언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극검이 믿는 구석은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그리드였다.
단독으로 본대로부터 이탈한 그리드.
그는 혼자서 다른 길을 이동경로로 선택, 이동하는 중이었다.
라우엘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길목마다 대기시켜놓았을, 혹은 한국의 성까지 진격시켜놓았을 한두 명의 적들?
그리드와 도중에 마주치게 되는 즉시 잿빛으로 산화하게 될 것이었고, 그리드는 누구보다 빠르게 미국 성까지 진격하여 점령해낼 터였다.
‘그때까지 어떻게든 버틴다.’
그리드가 행동하는 동안 이곳이 뚫리면 작전이 수포로 돌아간다. 반드시 버텨야만 했다.
이를 악 문 극검의 지휘 하에 한국이 철저한 방어태세를 갖췄다.
그들을 바라보며 라우엘이 중얼거렸다.
“그쪽은 딱 한 명 비는군요.”
예상대로다. 라는 말은 뱉지 않았다.
그래도 같은 길드원인데, 굳이 절망감까지 선사해가면서 잔인하게 짓밟고 싶진 않았으니까.
***
안테라바 숲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길.
무척 협소하고 장애물이 많은데다가 길다.
숲에 존재하는 여덟 개의 길 중, 적의 성까지 도달하는데 있어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하는 루트였다.
한데 이곳을 스컬과 여덟 명의 NPC가 이용하고 있었다.
이들의 임무는 이곳에 나타날 그리드의 발을 묶는 것.
만약 그리드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에는 그대로 한국 성까지 진격하여 점령하는 역할까지 맡았다.
하지만 라우엘은 이곳에 그리드가 나타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승리할 수 있는 계책이 없다면 도박을 걸어야하고, 어차피 장담할 수 없는 도박이라면 배당이 높은 쪽에 거는 게 사람의 심리라고 했던가.
‘또한 그리드에겐 플라이 마법이 있으니까 이곳의 복잡한 지형이 큰 장애가 안 될 거라고 했다. 반드시 이쪽으로 허를 찌를 거라고 했지만…’
스컬은 라우엘을 높이 평가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반신반의 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그리드가 이곳에 나타날지 의문이었다.
만약 녀석이 다른 루트를 이용한다면?
미국이 의지할 수 있는 건 판미르의 공성병기밖에 남게 되지 않는다.
“핫!”
일행에 포함 된 마법사가 은신 감지 마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최대한 천천히 이동하던 스컬.
답답함과 불안감에 휩싸여있던 그가 갑자기 실소를 터뜨렸다.
저 멀리, 그리드를 상징하는 각종 아이템을 무장하고 있는 존재가 날아오고 있었던 까닭이다.
뿔 솟은 투구를 깊이 눌러쓰고 안대까지 착용하여 머리 위에 아이디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누구겠는가?
당연히 그리드지!
희열에 찬 스컬이 일행에게 소리쳤다.
“적장이다! 놈을 쳐라!”
“알았다.”
대답한 NPC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쥔 뒤 도약, 그리드에게 덤벼들었다. 마법사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은신 마법을 유지해야했으므로 기본 공격 마법만 사용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채챙! 챙!!
과연 3차 전직자들다운 실력이다.
여덟 명의 협공을 견디지 못한 그리드가 금세 수세에 몰렸고,
“죽어라!”
기회를 엿보던 스컬이 그리드의 뒤를 쳤다.
푸욱!!
역시 템빨러.
그리드의 방어력이 막강하여 큰 피해를 입힐 수는 없었지만, 스컬은 당황하지 않았고 도리어 여유가 넘쳤다.
기껏 짠 작전이 수포로 돌아가자 평정심을 잃은 것인지, 그리드는 최근 표적 맞추기에서 보여준 것과 달리 솜씨가 형편없었다.
NPC를 굳이 여덟 명씩이나 데려올 필요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약했다.
‘나 혼자서도 충분히 잡았겠는데.’
지상으로 추락하면서도 검을 찔러오는 그리드의 발악적인 반격을 회피한 후, 그대로 발로 차 떨어뜨린 스컬이 이어서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그에 적중당한 그리드가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싶은 것인지, 미국 성이 있는 방향으로 뛰었다.
‘가소로운.’
병력을 이끈 스컬이 그리드의 뒤를 쫓았다.
그는 이제 이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
“헉… 헉… 진짜 오지게 세군.”
“괜히 미국이 아니네요.”
안테라바 숲 중앙대로.
혼전 끝에 한국이 수세에 몰렸다. 죄다 생명력이 바닥을 기었고 스태미나도 고갈 직전이라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들을 포위하는 형국을 완성시킨 미국이었으나 미국도 썩 여유가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NPC들이 한국의 NPC들과 비등한 피해를 입은 상황이다.
지발 등의 미국 대표들이 한국 대표들보다 활약하면 뭐하는가?
한국의 NPC가 미국의 NPC보다 평균 1.2배는 강했고 숫자도 많았으니 지금의 상황을 만들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을 소요하고 말았다.
‘당최 대영주의 검이 뭐기에 NPC들의 실력 차이가 이토록 벌어진 거지?’
또 어떤 템빨이란 말이냐, 그리드.
부러워서 치를 떤 지발.
그가 모두에게 명령했다.
“이제 그만 끝내자.”
척!
한국을 포위한 미국의 모든 병력이 일제히 무기를 세웠고, 그를 본 한국 대표들은 좌절감에 휩싸였다.
‘버티지 못했다.’
기껏 그리드가 NPC들을 강화시켜줬음에도 불구하고, 그리드가 적의 성을 점령하기도 전에 전멸하게 생겼으니 면목이 없다.
도움이 못되는 자신들의 무력함이 부끄럽고 짜증날 따름이다.
미국이 최후의 일격을 가하고자 한 걸음씩 앞으로 다가오는 그때.
아주 찰나의 적막이 맴도는 그때였다.
촥!
거친 숨소리만 울려 퍼지던 한국 진형에서 생뚱맞은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굉장히 낯설면서도 경쾌한 타격음이었다.
‘뭐지?’
미국 대표들은 물론이고 한국 대표들까지 당황하면서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모두가 당황했다.
웬 미친 마법사 하나가 같은 편을 도리깨로 때리고 있는 게 아닌가?
‘노, 농기구.’
욱씬!
갑자기 통증을 느낀 지발이 이마를 감싸 쥐었고.
“…드디어.”
도리깨에 얻어맞았던 기사가 중얼거렸다.
다른 NPC들과 달리 얼굴을 천으로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머리 위에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기사였다.
‘뭐지?’
한국 대표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법 크게 손실되어 있던 이름 모를 기사의 생명력 게이지가 갑자기 완전히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의문이 깊어지며,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너네가 신명나게 싸우는 동안, 나 혼자서만 가만히 서서 도리깨로 맞고, 맞고, 또 맞고 얼마나 기분이 나빴는지 아냐? 심지어 피도 엄청 달았어.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고.”
“…헉!”
한국과 미국 대표들이 동시에 굳어버렸다.
불만을 토로하면서 투구를 벗어던지는 기사의 머리 위로 떠오른 이름…
“그리드!!”
맞다.
그리드였다.
본래, 최초에는 혼자 외진 길로 이동해서 미국의 허를 찔러볼까 싶었지만 라우엘에게 간파당할 것만 같았고.
캐릭터 관찰을 통한 NPC강화만으론 미국의 무력에 맞설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그리드는 오로지 템빨에 의존해봤다.
방법은 간단했다.
행운 스탯을 보유한 러키가 휘두르는 <알쏭달쏭 도리깨>에 계속 얻어맞는 것이었다.
디버프가 터질 경우 저항하면 그만이었으니 최고의 버프가 터질 때까지 계속, 계속 맞았다.
생명력이나 마나를 1로 만드는 등의 최악 ‘확정 효과’에 당할 경우 그대로 끝장이 날 수도 있는, 무척 위험한 작전이었지만 어차피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미국을 이길 수 없었으므로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드디어.
[알쏭달쏭 도리깨의 효과로 커다란 축복을 받았습니다!]
[모든 자원이 100퍼센트로 회복됩니다!]
[2분 동안 공격력과 방어력이 2배가 됩니다!]
[2분 동안 공격 명중률이 100퍼센트가 됩니다!]
[다음 공격은 무조건 크리티컬이 발동합니다!]
“진심으로 말하는데, 나 지금 역대급인 것 같아.”
스완에게 잠시 맡겨둔 삼겹갑 등을 대신해서 <성스러운 빛의 무구 세트>와 <그리드의 부츠>, 그리고 <이야루그트>를 꺼내 무장한 그리드.
곧바로 흑화와 대장장이의 분노, 그리고 신속한 몸놀림을 사용하여 지발에게 달려든 그가 극살(極殺)을 전개하였다.
농기구의 농자를 떠올린 것만으로도 이마에 통증을 느끼고 있던 지발은 불의의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고.
[크리티컬!!]
[<성스러운 빛의 장갑>의 효과로 5연격이 발동합니다!]
그리드는 실로 오래간만에 반가운 효과를 맞이했다.
덕분에 지발은 새로운 오명을 뒤집어썼다.
동네북이라는 오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