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250화 (245/1,794)

템빨 21권 - 9화

『허허, 그리드가 지발과 같은 A조를 뽑고 말았군요.』

『하필이면 공성전 첫 번째 경기를… 그것도 미국을 상대로 치르게 되었네요.』

『그리드의 표정을 좀 보십쇼.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당하던 그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진귀한 모습이네요. 그만큼 자신감이 없다는 뜻이겠지요.』

공성전 중계방송의 시청률이 급속도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재 돌아가는 상황에 큰 재미를 느끼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어젯밤에 유라랑 지슈카가 그리드의 방에서 잤다면서?

-부정하고 싶지만 사실입니다… 그녀들이 아침이 되서야 그리드의 방을 나서는 모습이 파파라치에게 찍혔어요.

-크으… 혼자서 세계 최고의 미녀들을 독식하다니, 천벌 받을 만도 하지.

-미국한테 짓밟혀라!

-그리드의 불행은 나의 행복!

수억 명의 남성들이 질투로 눈이 먼 상태였다.

그들은 그리드가 무너지는 모습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

한국 국민들은 체념하고 있었다.

-뭐… 어차피 미국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공성전에선 메달 따기 어려웠을 테니까.

-좋게 생각해보면 차라리 일찍 탈락하는 게 나아요. 우리나라 선수들 오늘 하루 푹 쉬고 내일부터 열심히 싸울 수 있게.

-특히 그리드는 어젯밤에 힘 많이 썼을 테니까 푹 쉬어야함.

-그리드 일부러 미국 뽑은 거네.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기 위해서 큰 그림 그렸음.

-역시 갓리드.

조기 탈락이 확정 된 종목이다.

빠르게 미련을 접은 한국 국민들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자 노력했다.

그리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빨리 끝내고 캡슐 룸이나 가야지.’

다른 랭커들은 죄다 대회에 참가하느라 바쁜 와중에 혼자서만 사냥에 열중한다면?

‘조금이라도 앞서나갈 수 있으니까 이득이다.’

기껏 프랑스 파리까지 와서는 관광할 생각 않고 게임만 생각하는 그리드였다.

그의 곁으로 라우엘이 다가왔다.

“전쟁 연습한다고 생각하세요.”

“전쟁 연습?”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싱긋, 화사한 미소를 날렸다.

“부자가 되고 최고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당신의 궁극적인 목표 아닙니까?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왕이 되셔야하고요.”

왕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혈통이지만 플레이어에겐 혈통이란 개념이 없다.

그리드에게 필요한 건 명분이었고, 그에 앞서서 광활한 영토였다.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전쟁을 반복해야할 운명인 것이다.

“본래 모의전이란 막대한 인력과 자금을 필요로 합니다. 현재 템빨단의 여력으로는 실현시키기 어려운 영역이죠. 하지만 오늘, 우리는 공짜로 모의전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

“최선을 다해서 덤벼보세요. 당신에게 전략과 전술이 무엇인지 가르쳐드리겠습니다. 뭐, 두렵다면 일찌감치 포기하셔도 되고요. 거기까지가 당신의 한계인 거겠죠.”

템빨단 내에서 그리드를 비난하는 인물은 라우엘이 유일했다.

라우엘은 그리드의 허물을 늘 낱낱이 지적해왔고 그 탓에 때때로 그리드에게 수치심까지 안겨줬다.

이유?

오로지 그리드의 발전을 바라서였다.

그래, 지금도 같은 맥락이다.

명백히 위에서 내려다보는 말투를 구사하며 그리드를 도발하는 라우엘.

그는 알고 있었다.

현재 그리드가 의욕을 잃은 상태임을.

그렇기에 방관할 수 없었다.

“…”

과거의 그리드였다면 라우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분개했을 터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라우엘이 무슨 의도로 자신을 도발하는지 꿰뚫어보고 화답했다.

“좋아, 덤벼보마.”

내가 잠시 안일했다.

포기를 입에 담아?

요즘 배때기 불렀다고 헤이해진 게 분명하다.

‘정신 차리자.’

짝!

양손으로 스스로의 뺨을 때린 그리드.

잠시 빛을 잃었던 그의 검은 눈동자에 다시금 총기가 맴돈다.

‘이기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

늘 그랬듯이 말이다.

***

“그리드를 어지간히도 챙기는군.”

“설마 일부러 져줄 생각은 아니겠지?”

라우엘과 그리드의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된 미국의 대표들.

비꼬며 염려하는 그들에게 라우엘이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그럴 리가요. 그리드님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저는 최선을 다해 싸울 겁니다.”

무엇보다도 러시아를 만나기 전까지는 꼭 승승장구 해야만 한다.

라우엘은 한국에게 패배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한국이 지닌 변수는 군주의 망토와 3벌의 후드짚업이다.’

라우엘은 그리드와 템빨단의 아이템 보유현황을 대부분 파악하고 있었다.

우선 <군주의 망토>.

템빨 기사단과 템빨 마법 기사단을 창설한 날 그리드가 획득한 레전드리 등급의 아이템이다.

돌진 명령, 회군 명령, 군주의 목소리 총 3개의 스킬이 귀속 된 그 망토는 간단하면서도 효율적인 명령전달체계를 만들 수 있었다.

만약 그리드가 잘만 활용한다면 50명의 NPC를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을 터였고 이는 제법 위협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었다.

다음은 <후드짚업>.

그리드가 실피드의 비늘을 재료로 창조, 제작한 투명 망토로서 템빨단의 최정예들에게만 하나씩 지급 된 아이템이다.

한국에서는 그리드, 유라, 극검이 보유한 상태였으므로 은신을 상시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그 외에는.’

그리드의 기본 전투력만 주의하면 된다.

유라는 아직 미국의 대표들과 비견될 만큼 성장하지 못했고-지옥이 아닌 이상-, 극검은 미국 대표 한 명만 붙여도 발을 묶어놓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 외의 한국 대표들은 굳이 논할 가치조차 없다.

“가볼까요.”

공성전 첫 경기를 장식하게 된 한국과 미국.

수십만 관중들 중 대부분이 미국을 응원하며 환호하는 가운데, 양팀 선수들이 각자의 캡슐로 이동했다.

***

[안테라바 숲에 입장하였습니다.]

[공성전 개시까지 20분 남았습니다. 20분 동안 충분한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한국이라… 몸 풀기 상대로 딱 좋군.”

“몸 풀기 상대로도 부족한 게 아니고?”

“하하하!”

사실, 지발이 A조를 뽑았을 때까지만 해도 미국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맵의 형태와 간단한 규칙밖에 숙지하지 못한 공성전.

지급받게 될 50기 NPC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상황에서 첫 번째 경기를 장식하게 되었으니 부담감이 무척 컸던 것이다.

만약 처음부터 일본이라도 만나게 되면 어째야하나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리드가 지발의 뒤를 이어 A조를 뽑아줬다. 참으로 예쁜 녀석이다.

덕분에 한국을 만나게 된 미국 대표들은 여유가 철철 넘쳤다.

성벽 높이가 1미터에 불과한 작은 성으로 입장하는 그들의 발걸음이 가볍다.

“호오, 저게 바로 소문의 NPC들인가.”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지.”

성내의 정원.

50명의 NPC가 도열하고 있었다.

일열 15명은 중갑옷과 대형 방패를 무장한 탱커들이었고 이열 20명은 경갑옷과 날카로운 무기를 무장한 근접딜러들이었다. 그 후위에는 10명의 궁사와 5명의 마법사가 있었다.

“판미르, 저들의 아이템 상태부터 점검해봐라. 이후엔 간단한 대련으로 능력치를 측정한다.”

명령을 내리면서 NPC들의 면면을 살펴보던 지발이 흠칫 놀랐다.

“다짜고짜 우리의 장비와 실력을 엿보겠다는 건 무슨 예의지?”

“기껏 온 원군이라는 게 이토록 무례한 자들이라니…”

“실력은 있는 건가? 영 신뢰가 안 가는군.”

NPC들의 발언이었다.

그들의 태도에 지발을 비롯한 미국 대표 전원이 당황했다.

‘지급받는 NPC라는 게 우리의 부하가 아니라…’

‘우리와 동등한 입장이었나?’

‘우리가 NPC들의 원군 역할이었다고?’

주춤거리는 미국 대표들의 시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공동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공성전>

난이도:측정불가

안테라바 숲의 패권을 두고 2개의 국가가 전쟁 중입니다.

당신들은 A국의 원군으로 참전합니다.

A국 기사들과 긴밀히 공조하여 B국의 성을 점령, 안테라바 숲을 차지하십시오.

*본 퀘스트는 국가대항전용으로 개발 된 콘텐츠로서 Satisfy의 스토리와는 무관합니다. 단, NPC들은 Satisfy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승리 조건:B국의 성을 점령. 혹은 B국의 전멸.

*제한 시간은 2시간입니다. 제한 시간 내에 승부가 나지 않을 경우 생존자의 숫자가 많은 국가가 승리합니다.

*공세에 나서지 않고 수성만 할 경우, NPC들과의 호감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질 것이며 이는 전쟁의 패배로 직결될 것입니다.

‘이런.’

NPC라는 건 병사의 개념인 줄 알았다. 하지만 동등한 협력자라니?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르다.

절대적인 명령체계를 완성하기 어렵게 생겼다.

“어서 적의 성으로 진격하도록 하자. 너희 일곱은 우리의 작전에 따르도록 해라.”

역시나 NPC들이 멋대로 설치기 시작했다.

그들이 ‘본대’이며 그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없게 된 이상 기껏 준비해온 작전이 무용지물이 될 공산이 컸다.

어째야할까?

찰나의 시간 동안 혼란에 빠졌던 미국 대표들이 금세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라우엘, NPC들에게 어서 너의 작전을 설명하도록 해.}

{네 훌륭한 작전을 듣는다면 저들도 납득하고 우리에게 명령권을 넘겨줄 거라고.}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과연 작전 설명만으로 NPC 전원의 태도가 바뀔지는 의문이었다. 멍청한 놈이 껴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었으니까.

라우엘이 팀원들에게 질문했다.

{위엄, 통솔력, 매력 스탯을 개방한 분들 없습니까?}

‘아!’

미국 대표들이 라우엘의 의도를 알아챘다.

화색을 띄운 그들 중 지발과 스컬, 그리고 제퍼와 와치가 거수하며 앞으로 나섰다.

최상급 랭커로서 귀족의 작위를 비롯한 각종 칭호를 보유한 그들.

무려 300에 육박하는 위엄 스탯을 지녔으며 특히 지발과 스컬은 통솔력과 매력 스탯까지 개방했다.

그들의 필두에 선 라우엘이 NPC들에게 선언했다.

“나 라우엘은 고귀한 존재이다. 에트날 왕국의 백작이자 구국의 영웅으로서 그대들이 우러러 보기에 손색이 없다. 이번 전쟁에서, 그대들이 내 명예와 위상을 믿고 잠시나마 명령에 따라준다면 승전을 보장하겠다.”

라우엘의 뒤를 이어서 지발, 스컬, 제퍼, 와치 또한 NPC들에게 스스로를 과시했다.

그러자 술렁이며 눈치를 교환한 NPC 중 절반 이상이 그들에게 살짝 목례를 하였다.

“귀하신 분들이니 잠시나마 믿고 따라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무능하다고 판단될 경우 우리는 더 이상 당신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겁니다. 그때는 도리어 당신들이 우리의 명령을 따라야할 겁니다.”

“…좋다.”

라우엘과 지발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31명의 NPC가 간단하게나마 예를 표했고 나머지 19명의 NPC들은 잠자코 사태를 관망하는 상태.

그래도 명령체계를 나쁘지 않게 완성시킬 수 있는 수준이다.

긍정적으로 본 라우엘이 NPC들에게 작전을 설명하기 시작했고, 라우엘의 작전을 듣고 감명한 NPC들 전원이 차츰 라우엘에게 신뢰를 품었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전 세계 시청자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와, NPC들 상태보고 처음에는 개판될 줄 알았는데.

-미국 대표들의 위엄이 엄청나네요… 이제 NPC들이 순순히 따르고 있어요.

-라우엘이 일등공신임.

-라우엘 위엄 스탯 500넘을 듯?

-위엄 스탯도 위엄 스탯이지만, NPC들을 빠르게 감화시킨 건 작전 내용에 있겠죠. 역시 라우엘답게 대단한 작전을 준비해온 듯합니다.

한편, 한국의 사정은 어떨까?

미국 대표들이 NPC들의 장비를 점검하고 합을 맞춰보는 등 정비에 열중하는 사이, 방송화면이 한국의 성으로 전환됐다.

『그리드는 유저 최초의 공작으로서 라우엘 이상의 위엄과 매력 스탯을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그 외의 한국 대표들이 위엄 등의 특수 스탯을 개방했을 지는 미지수지요.』

『또한 한국에는 라우엘 같은 책사가 없습니다. 과연 NPC들을 그리드 혼자서 설득하여 명령체계를 만드는 게 가능한 일일지 우리는 고민해볼 필요가… 헉?』

『저, 저게 무슨!』

열심히 떠들어대던 해설진이 일제히 경악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시청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왜?

작은 왕관을 비뚤어지게 걸쳐 쓴 그리드 앞으로…

“충성을 맹세합니다!!”

“하명만 하십시오! 따르겠습니다!!”

그 콧대 높은 50인의 NPC 전원이 무릎을 꿇고 있었으니까!

비현실적인 광경에 세계가 커다란 충격에 빠졌고 그리드는 미소 지었다.

‘라우엘, 제아무리 훌륭한 전략과 전술일지라도.’

종국에는 템빨로 부숴버릴 수 있음을 증명해보임으로서 내 가치를 독보적으로 만들겠다.

<대영주의 검>을 뽑아 쥔 그리드가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NPC들에게 황당한 명령을 내렸다.

“장비 다 벗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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