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249화 (244/1,794)

템빨 21권 - 8화

『올해 국가대항전은 참가국을 대폭 늘리는 대신 각국의 참가자 숫자를 줄였는데요.』

『이로 인해서 공성전 시스템이 변경됐습니다.』

『공성전을 하루 앞으로 두게 된 지금, 그 변경 된 시스템을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성전은 단체전으로 분류된다.

32개국 참가자 전원이 참가해야할 의무가 있다.

토너먼트 형식으로 진행되며, 대진표는 제비뽑기를 토대로 짠다.

『여기까지는 작년과 같지만, 추가 된 사항이 있습니다. 각국에 300레벨의 NPC가 50기씩 지급된다는 점이죠. 공성전의 규모를 확대시킴과 동시에 전략의 다양성을 꾀하려는 주최 측의 의도로 풀이됩니다.』

『300레벨이라는 건 즉 3차 전직 NPC들이라는 뜻이군요. 224명의 국가대항전 참가자 중 3차 전직자가 단 47명밖에 안 된다는 점을 고려해봤을 때 NPC들의 존재감이 압도적이겠는걸요.』

『그렇죠. 공성전의 관건은 참가자 개인의 강함보다도 이 NPC들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용하느냐에 있습니다.』

『적을 전멸시키느냐, 아니면 적의 성을 점령하느냐. 승리 조건이 단 두 개뿐인 공성전에서 우승할 확률이 가장 높은 국가는…』

『미국과 일본을 꼽을 수 있겠죠. 미국에는 라우엘의 전략이 있고 일본에는 데미안의 버프가 있으니까요.』

『라우엘의 전략과 데미안의 버프라… 아무래도 데미안의 승산이 높지 않을까요? 라우엘이 뛰어난 전략을 구사하면 뭣합니까? 데미안의 버프를 받은 일본측 NPC들이 압도적인 힘으로 짓뭉개버릴 텐데요.』

『부바트가 있는 터키도 무시해선 안 됩니다. 비록 부바트가 PvP에선 매번 그리드에게 고배를 마셨다지만, 본래 부바트의 진가는 대규모 전투에서 발휘됩니다. 부바트의 진형파괴가 전장을 휩쓸 수도 있습니다.』

『캐나다도 빼놓을 순 없죠. 수호기사의 정점인 반트너는 광역 도발기와 최강의 탱킹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의 압도적인 공격력과 연계시킨다면 NPC들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식으로 일일이 열거하자면 다섯 개 국가 정도를 더 우승 후보로 꼽을 수도 있겠네요.』

『그 우승 후보국 중에 크라우젤이 있는 러시아와 그리드가 있는 한국도 포함되는 겁니까?』

『하하, 그럴 리가요. 크라우젤과 그리드가 대인전 최강의 실력자라는 건 반론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지만.』

『러시아와 한국에는 뚜렷한 버퍼와 디버퍼, 혹은 전략가가 없습니다.』

『3차 전직 NPC를 몇 기만 투자해서 크라우젤과 그리드의 발을 묶을 수 있다면, 러시아와 한국은 빠르게 붕괴될 겁니다.』

『특히 한국은 선수층이 얇으니… 대진 운이 어지간히 좋지 않은 이상 16강 진출조차 어려우리라고 봅니다.』

국가대항전 2일차 일정이 모두 끝난 후.

유라와 지슈카가 정말로 그리드의 방을 찾아왔다.

그녀들이 그리드를 방문한 목적은 사람들의 불순한 상상과 달리 무척 순수했다.

각자의 분야에서 활약하여 금메달을 쟁취한 바.

기왕지사 좋아하는 남자에게 축하받고 싶은 게 그녀들의 바람이었다. 단지 그리드와 축배를 들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다.

연애경험 전무한 여성들답게 이성에게 접근하는 방법이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리드 또한 유라와 지슈카의 방문 의도를 멋대로 오해하지 않았다.

첫사랑 아영이에게 순정을 무참하게 짓밟힌 이후 이성 관계에 있어서 자신감을 상실한 그리드.

그는 유라, 지슈카가 평소 자신에게 호감을 표출하는 이유가 친구로서, 혹은 동료로서의 의리라고 여겨왔다.

세계 최고의 미인이자 능력자인 그녀들이 설마 자신을 이성적으로 좋아하리라고는 꿈에도 꾸지 못했다.

하여 그녀들을 친구처럼 편하게 대했다.

그녀들의 방문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나란히 소파에 앉은 채 TV만 시청했다. 심지어 냄새 풀풀 나는 마른 오징어를 씹어 먹으면서 말이다.

“…”

아무리 그래도 너무 무드가 없는 거 아닌가?

발목까지 내려오는 순백의 원피스를 입고 청순미를 뽐낸 유라.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드레스를 입고 관능미를 뽐낸 지슈카.

그리드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으로 각자의 매력을 극대화시킨 그녀들.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소파에 반쯤 드러누운 채 배를 긁적이는 그리드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본다.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잠자코 뉴스에 열중하고 있던 그리드가 오래간만에 약한 소리를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공성전에서는 금메달 따기 어렵겠다.”

그리드는 라우엘과 데미안의 저력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최소한 공성전에서만큼은 그들을 이길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리드의 팔뚝에 은근히 가슴을 기대고 있던 지슈카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너무 쉽게 포기하는 거 아니야?”

그리드는 지존을 목표로 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지존이란 절대적으로 군림하는 존재이다.

최소한 그리드라면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최선을 도모하는 게 옳다고 보는 지슈카였다.

그녀의 부드러운 탄력을 느끼면서 콧구멍을 벌렁거리던 그리드가 유라의 차가운 시선을 느끼더니 헛기침했다.

그리고 마른 오징어 다리를 하나 뜯어 씹으면서 말했다.

“난 데미안의 버프를 직접 받아본 적이 있는데 그거 완전히 사기야. 녀석에게 3차 전직 NPC 50명이 주어진다면…”

호랑이에게 날개를 다는 격?

아니, 그 이상이다.

그대로 괴물 군단 탄생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영우씨는 공성전 우승 국가를 일본이라고 예상하는 건가요?”

유라의 질문에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아니면 미국.”

공성전의 무대로 선택 된 공간은 안테라바 숲이다.

우뚝 솟은 2채의 성이 커다란 숲을 사이에 낀 채 마주보고 서있다.

한데 이 숲이라는 것이 엄청 컸다.

결코 잘리지 않는 가시나무 길,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 길, 빠져나올 수 없는 늪지대 등.

시스템적으로 <이동불가> 판정을 받은 위험공간이 무척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숲을 관통할 수 있는 길이 총 여덟 갈래나 됐다.

활용가능한 지형지물이 차고 넘치며, 서로의 성을 침공할 수 있는 루트가 8개나 되는 공성전 맵.

라우엘의 전략이 빛을 발휘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대진이 꼬여서 미국과 일본이 초반부터 만나게 되지 않는 이상.’

결국 결승전은 미국과 일본이 장식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게 그리드의 추측이었다.

“한국의 성적은?”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는 그리드에게 지슈카가 질문한다.

이에 대한 그리드의 답변은…

“전문가들의 말대로 16강에 들면 운 좋은 거 같은데.”

이와 같았고 유라도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한국은 그리드 한 명에게 의지하는 경향이 너무 컸고, 3차 전직 NPC를 잘만 활용한다면 그리드 한 명의 발을 묶는 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뭐, 브라질도 마찬가지이려나.”

브라질도 Satisfy 약소국으로 분류된다. 더군다나 지슈카는 노멀 클래스 전직자였으므로 그리드만한 저력이 없었다.

스윽.

씁쓸하게 미소지은 지슈카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드가 배정받은 방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호기심과 흥미가 가득했다. 그리드의 취향과 성향을 파악하고자 노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헤에, 침대가 꽤 크네? 혼자 자라고 있는 침대가 아니잖아?”

어제도, 오늘도 조국과 템빨단의 명예를 위해서 싸우느라 너무 힘들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지쳤던 지슈카는 정말로 아무런 불순한 의도 없이 그리드의 침대 위로 누웠다가 그대로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헐.”

“…”

그리드는 당황했고 유라는 위기의식에 휩싸였다.

이대로는 지슈카에게 그리드를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유라가 결국 자신 또한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덕분에 그리드는 소파에서 잤다.

솔직히 말해서 유라, 지슈카와 나란히 누워 잠드는 사치를 누려보고 싶었지만 혹 성추행범으로 신고 당할까봐 참았다.

***

샹그X라 호텔 3층 복도.

한 사내가 복도 어귀에 숨은 채 그리드의 방문을 주시하고 있었다.

미국 대표이자 통합랭킹 2위인 지발이었다.

“크윽… 결국 자고 가는 건가? 그것도 둘 다?”

지발도 남자다. 여자를 좋아했고 특히 예쁜 여자를 좋아했다.

즉, 세상 대부분의 남성들처럼 유라와 지슈카에게 본능적인 호감을 품고 있단 뜻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무척이나 도도한 존재였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지만, 사실 지발은 그녀들에게 대쉬했다가 차인 경험이 있었다.

한데 그리드가!

어느 모로 보나 나보다 못한 것 같은 빌어먹을 그리드놈이 지금 이 순간 그녀 둘을 끼고 광란의 밤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유라와 지슈카가 그리드의 방을 찾아가고 벌써 3시간이 지났건만 나오질 않자 지발은 치가 떨렸다.

어째서 저토록 잘난 여자들이 동시에 그리드를 좋아하는지 그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저놈… 설마 엄청난 대물인 건가.’

게임에선 템빨이고 현실에선 정력빨이라?

부러워서 바득바득, 이를 가는 지발의 어깨 위로 누군가 손을 얹었다.

화들짝 놀란 지발이 뒤를 돌아보았고, 그곳엔 방글방글 미소지은 라우엘이 서있었다.

“한참 찾았잖습니까? 설마 당신씩이나 되는 사람에게 관음증이 있는 줄은 몰랐군요.”

“관음증이라니! 나 지발을 뭐로 보고 그딴 망발을…!”

“아아, 진정하세요. 사실 당신이 앓고 있는 병이 뭔지는 크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어서 방으로 돌아가기나 하죠.”

“방은 왜?”

“왜라뇨? 당신, 설마 밤새 여기에 숨어서 그리드님의 방을 훔쳐보려고요? 유라님과 지슈카님의 발목이라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큭큭?”

“그게 아니다! 내가 왜 네놈과 함께 방으로 돌아가야 하느냐, 이 말이다!”

“내일 있을 공성전을 대비해서 작전회의를 해야죠.”

“아…!”

질투에 눈이 멀어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였던 지발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황급히 승강기로 향하는 그를 뒤따른 라우엘은 생각에 잠겼다.

‘내일 공성전에서 가장 이상적인 흐름은…’

최대의 적수인 일본의 조기탈락, 그리고 러시아의 선전이다.

라우엘은 최대한 위에서, 그리고 위험요소가 최대한 배제 된 상태에서 러시아와 대면하고 싶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크라우젤에게 공성전 금메달을 미끼로 템빨단에 가입해달라고 제안할 수 있는 구조가 완성되길 바라서였다.

하지만 역시 걱정되는 건, 과연 러시아가 공성전에서 선전할 수 있느냐다.

크라우젤을 비롯한 러시아 대표들의 실력이 예상보다 더 대단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과연 그들에게 전략이나 전술에 대한 재능까지 있는지는 미지수였으니까.

‘만약 러시아가 일본이나 터키를 만나 조기탈락하게 된다면 뼈아픈데.’

지금 이 순간.

후로이, 데미안만큼이나 그리드를 인정하고 숭배하는 라우엘조차도 한국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공성전에서 한국이 활약할 여지는 적었다.

***

『전 세계가 주목하며 열광하고 있는 제2회 Satisfy 국가대항전! 그 3일차가 지금!! 시작됩니다!!!』

『3일차 종목은 공성전 하나죠?』

『네, 아무래도 단체전인데다가 토너먼트 형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일정을 길게 짤 수밖에 없었겠죠.』

『말씀드리는 순간 각국의 대표들이 단상 위로 올랐습니다.』

『대진표를 정하기 위한 제비뽑기가 시작되는군요.』

『상대팀으로 미국이나 일본을 뽑는 대표는 팀원들과 국민들에게 원망을 사게 되겠네요. 하하!』

누가 금손이고, 누가 똥손인가?

세계인들이 눈에 불을 켠 채 모니터를 주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세계최고의 똥손이 등장했다.

역대급 악운을 타고난 인물.

그야 당연히…

“…미안.”

그리드였다.

그리드가 미국을 뽑았다.

한국 국민들이 좌절했고, 그리드는 뻘뻘 식은땀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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