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1권 - 7화
2일차 국가대항전에선 총 3개의 경기가 진행됐다.
첫 번째 경기는 <거점 지키기>.
무한대로 몰려오는 각종 몬스터들을 해치우고, 이를 토대로 얻게 되는 재화를 이용하여 방어용 포탑과 함정을 설치, 누구보다도 더 오랫동안 거점을 지키는 게 목표인 경기였다.
어떤 종류의 포탑과 함정을 어느 지점에 배치하느냐가 관건이었고, 이는 높은 전략과 순발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한국 대표로는 박종와가 참가한 이 경기의 결과는.
『미국의 라우엘이 금메달을, 프랑스의 봉드레가 은메달을 차지하였습니다!』
『게임 중반까지는 봉드레도 잘 버티는가 싶었지만 후반부에 급속도로 집중력이 무너졌죠.』
『대공포 설치가 부족한 상황에서 비행형 몬스터가 대규모로 출현한 게 치명타로 작용했습니다.』
『반면 라우엘은 대공포의 설치가 충분했죠. 경기 초중반에 비행형 몬스터가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포탑 목록에 대공포가 존재하는 이유를 간과하지 않고 꾸준히 대공포를 설치한 게 유효하게 작용했습니다.』
『동메달은 유난히 함정을 잘 활용했던 캐나다의 반트너에게 돌아갔습니다.』
『도발과 차징 스킬을 적절히 활용, 몬스터들을 연달아 함정으로 몰아넣는 모습은 감탄밖에 나오지 않더군요.』
『표적 맞추기에서 크리스의 발목을 붙잡았던 그 괴팍한 다혈질의 사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신중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음… 본래 탱커들은 팀워크가 훌륭한 법인데 반트너는 어째 개인전에 더 특화된 듯한 모습입니다. 템빨단 내에서도 변수로 작용할 것 같은 인물이군요.』
관계자석에 앉은 채 경기를 관람 중이던 스페인 대표 폰이 콧방귀 뀌었다.
“변수가 아니라 민폐지.”
비꼬면서도 미소 짓는 폰이었다.
반트너와 매일 다툰다고는 하나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온 친구인 바.
반트너의 활약을 폰은 진심으로 축하하였고 은근히 기쁜 마음도 들었다.
이후 이어진 2번째 경기는 <돼지 잡기>.
죄다 똑같이 생긴 수천 마리의 핑크색 돼지 중에서 엉덩이에 검은 점이 있는 돼지들만을 찾아내어 처리해야하는 경기였다.
점이 없는 돼지는 생명력이 무한이었으므로 처치가 불가능했고, 이로 인해 초원 위에는 계속해서 돼지가 득실거렸다.
목표물을 찾아내기 위한 관찰능력과 찾아낸 목표물을 놓치지 않기 위한 집중력이 관건이 되는 이 경기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사람은…
『브라질의 지슈카입니다!』
『엄청난 관찰능력이로군요. 죄다 똑같이 생긴 돼지들 중에서 수박씨만한 점을 달고 있는 돼지들만을 어찌 저리 잘 찾아낸답니까?』
『그야말로 매의 눈입니다, 매의 눈. 30미터 거리를 유지한 채 초원을 한 눈에 담아 목표물을 찾아내는 그 능력, 경이적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설령 목표물을 포착했다고 해도 다시 무리로 섞이게 되는데 그걸 또 안 놓치고 활을 쏴 맞추네요. 그것 참 기가 막힌 집중력입니다.』
『지슈카 혼자서 올린 점수가 2등부터 5등까지의 점수를 합친 것보다 더 높군요…』
『한 마디로 압도했습니다.』
2경기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국가는 브라질, 은메달을 차지한 국가는 영국, 동메달을 차지한 국가는 미국이었다.
뛰어난 궁사를 보유한 국가들이 점수를 독식한 결과였다.
“그리드, 보고 있지? 이따가 밤에 방으로 찾아갈 테니까 축하해 줘야해!”
경기가 끝난 후 기자회견장에서.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여성으로 손꼽히는 지슈카가 의미심장한 발언을 하자 엄청난 파장이 발생했다.
-방으로 찾아간다고?-_-;;
-다 큰 성인남녀가 한 방에서 대체 뭘 하려고…?
-하아… 그리드 부럽네요… 저렇게 섹시한 여자랑 밤에 이렇고 저런 일을 한다는 거 아닙니까…
-전생에 지구를 구한 사람일 거라고 추측해봅니다.
-빌어먹을 그리드…
“왜 이렇게 귀가 가렵지?”
그리드가 세계 남성들의 공적이 되어가는 가운데 대회의 열기는 더욱 더 뜨거워졌다.
그리고 오후에 세 번째 경기가 진행됐다.
<지옥 달리기>.
지옥의 일부를 구현한 맵에서, 각종 장애물과 마족들의 위협을 피해 목적지까지 가장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우승하는 경기였다.
이에 대한 Satisfy 플레이어들의 관심은 무척 높았다. 단체전이나 PvP에 버금가는 관심도였다.
지옥.
아직 그 누구도 방문하지 못했다고 알려진 그 미지의 땅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눈여겨 보셔야합니다. 지옥 정벌이야말로 Satisfy 궁극의 콘텐츠일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관계자 관람석.
한국 대표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불쑥 찾아온 라우엘이 그리드의 곁으로 앉으며 말한다.
“지옥 또한 당신이 군림하시게 될 무수한 땅 중 하나일지니.”
오글오글!
그리드와 극검을 제외한 나머지 한국 대표들이 슬금슬금, 라우엘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중2병에 대한 내성이 아직 그들에겐 부족했던 것이다.
“지옥이라… 거기 좀 이상하던데.”
현재 그리드는 통역기를 착용하고 있었다.
덕분에 라우엘의 말뜻을 이해한 그가 중얼거리자 라우엘이 화들짝 놀랐다.
“지옥을 방문한 경험이 있으신 겁니까?”
“아주 잠깐이지만.”
“헐.”
지옥을 방문했다니?
남의 말이었다면 농담, 혹은 허풍으로 치부했을 터였다.
하지만 상대는 그리드다.
라우엘이 그를 신뢰하지 않을 리 없었다.
“어떤 곳이었습니까?”
“흠.”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질문하는 라우엘로부터 그리드가 시선을 돌렸다.
한국에서는 유라가 출전한 지옥 달리기.
모두의 기대를 받고 있는 그 화제의 경기가 지금 막 시작되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라. 고작 몇 분밖에 체험해보지 못한 내게 설명 듣는 것보단 그게 훨씬 더 낫겠지.”
그리드 또한 지옥에 대한 관심이 컸다.
악마력 수치가 830까지 도달한 현재, 지옥이란 그리드에게 언제 방문하게 될지 모를 위협이었기에.
***
특정 콘텐츠를 남들보다 한 발 앞서 체험한다는 것은 무척 큰 의미를 지닌다.
남들보다 빠르고 정확한 정보를 확보하고 이를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옥 달리기는 무척이나 중요한 종목이었고 출전자들의 면면이 화려했다.
미국의 지발, 중국의 하오, 아르헨티나의 수에론, 영국의 레가스 등.
각국을 상징하는 최강자들이 이번 종목에 참가한 것이다.
이들의 참가 의도는 금메달이라기보다는 지옥을 최대한 오랫동안, 보다 확실하게 체험하는 것에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국가의 명예보단 개인의 발전을 우선순위로 뒀다는 뜻이다.
국민들의 비난?
최소한 이 종목에서만큼은, 이들은 괘념치 않았다.
지존을 꿈꾸는 이들답게 욕심을 챙길 수 있을 땐 확실히 챙겼다.
그리고 크라우젤은 이와 같은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다.
하여 그는 지옥 달리기에 직접 참가하지 않고 대신 알렉산더를 내보냈다.
알렉산더만으로도 충분히 금메달을 확보할 수 있으리란 판단에서였다.
지옥을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면서까지, 그는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지옥에 입장하였습니다.]
[강력한 마기가 폐부를 꿰뚫습니다.]
[몸에서 기운이 빠집니다. 공격력, 방어력, 민첩성이 30퍼센트 하락합니다.]
[생명력이 자연 회복되지 않습니다.]
[정신적인 타격을 입습니다. 마나 회복 속도가 50퍼센트 하락합니다.]
“디버프 엄청나네.”
“체력재생을 아예 없애버리면 뭘 어쩌라는 거야? 무조건 물약이나 회복 스킬에만 의지하라는 건가?”
“마나 회복 속도 보소. 스킬 함부로 썼다간 그대로 골로 가겠구만.”
“음… 지옥에선 솔로 플레이가 불가능하겠는걸.”
어마무시한 디버프를 당한 각국 대표들이 당황했다.
지옥이라는 장소로부터 원천적으로 거부당하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유라만큼은 사정이 달랐다.
[지옥은 데빌 슬레이어의 진정한 무대입니다!]
[모든 능력치가 20퍼센트 상승합니다.]
[모든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20퍼센트 감소합니다.]
[정화 관련 스킬들의 위력이 15퍼센트 상승합니다.]
[마력 탄환 생성 속도가 최대치가 됩니다.]
[생명력과 마나 회복 속도가 50퍼센트 상승합니다.]
‘나의 무대.’
데빌 슬레이어로 전직했을 당시.
유라는 노멀 클래스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한 레전드리 클래스의 위력에 감탄하고 전율했었다.
하지만 파그마의 후예와 놓고 비교하면 여러모로 뒤떨어지는 게 현실이었다.
물론, 그리드는 벌써 여러 개의 히든 피스를 개방한 반면 유라는 단 한 개의 히든 피스를 개방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그런 점을 모두 감안하더라도 명색이 ‘전투 특화’클래스인 데빌 슬레이어는 파그마의 후예보다 임팩트가 매우 약했다.
전직을 잘못한 게 아닐까, 유라는 불안감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데빌 슬레이에게는 진정한 무대가 따로 있었다.
그 이름에 걸맞게, 그리고 유라의 추측대로 지옥에서야말로 진정한 힘을 발휘하는 클래스였다.
이는 무척이나 긍정적인 소식이었다.
Satisfy 후반부를 책임질 콘텐츠로 예측되는 지옥에서 최강의 클래스로 손꼽히게 될 데빌 슬레이어.
훗날, 유라는 본인이 얼마나 무궁무진한 활약을 펼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각국을 대표하여 출전한 32명의 선수들이 출발선상에 섰습니다.』
『하나 같이 대단한 실력자들만 모였군요.』
『그중에서도 특히 기대가되는 건 데미안과 하오, 그리고 수에론, 지발, 폰, 레가스의 활약입니다.』
『지옥이라는 무대가 과연 어떤 변수를 만들어낼지는 모를 일입니다만… 현재로서는 그들이 가장 큰 우승후보라고 볼 수 있겠죠.』
『특히 데미안이 기대되는군요. 빛의 여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교황이라면 필시 마족들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을 테니까요.』
『저도 동의합니다. 최소한 이 지옥 달리기에서만큼은 크라우젤보다 데미안이 더 활약할 여지가 많아요.』
『크라우젤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이번 대회는 포기한 게 아니겠습니까?』
그 누구도 유라에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표적 맞추기에서 크라우젤을 상대로 나름 분투했던 그녀라고는 하나 대중이 그녀에게 갖는 기대치는 여전히 낮았다.
기껏 얻은 히든 클래스라는 것이 썩 대단치 않아 보였고 총사의 특성상 한계점이 명확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잠시 후, 세상 사람들은 전원 유라에게 주목하게 된다.
지옥달.
번헨 열도를 체험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확실하게 구분 지어주는 그 위험요소에 능숙하게 대처하면서, 유라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마족들을 처단해나갔고 장애물은 회피했다.
다른 참가자들은 지옥이라는 공간 자체를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는 이때.
오직 혼자서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던 알렉산더는 유라가 거슬렸다.
어째선지 그녀가 자신보다 앞서가고 있었으니 간과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계집.’
황인종 주제에 아름답고 능력이 뛰어나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제아무리 그래봤자 황인종이다.
크라우젤, 그리드라는 변종들은 어쩔 수 없다지만 그들 외의 황인종은 나보다 앞서나가선 안 된다.
왜냐?
인종 자체가 하찮으니까.
생각하면서 이를 간 알렉산더가 유라에게 기습을 가했다.
검 끝을 타고 경질화 된 오러가 길게 뻗어나가서 유라의 등을 찔렀다.
알렉산더는 강했고, 유라보다 훨씬 더 레벨이 높았으므로 객관적으로 봤을 때 알렉산더는 유라를 짓뭉갤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의외의 결과가 발생했다.
장소가 문제였다.
현재 알렉산더는 심각한 디버프를 안고 있는 반면 유라는 도리어 커다란 버프를 받은 상태였으니까.
“크아아아악!!”
무기를 검으로 변화시켜 알렉산더의 공격을 막은 유라가 곧바로 마탄을 쏘자 알렉산더는 끔찍한 고통을 맛봐야만 했다.
몸서리치는 그에게 몇 번의 마탄을 더 적중시킨 후 이동, 다시금 총을 검으로 변화시킨 유라가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이후.
지옥 달리기 금메달의 주인공은 유라가 됐다. 유라로부터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도망쳤던 알렉산더는 은메달에 그쳤다.
경기가 끝난 후.
기자들 앞에 선 유라가 카메라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말했다.
“그리드, 저도 밤에 당신의 방으로 찾아갈 테니까 칭찬…해주세요.”
표정은 담담하지만 목소리는 떨린다.
새하얀 얼굴에는 복숭앗빛 홍조가 머문다.
유라는 너무나도 부끄러웠지만 지슈카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용기 내어 말하고 있었다.
전 세계 인터넷이 또 난리가 났다.
-그리드 #[email protected]#
-양심도 없는 놈이 왜 하필 젤 예쁜 여자 둘을 독차지하냐.
세계 곳곳에서 질투의 화신이 탄생한 날이었다.
한동안 잠잠했던 그리드 안티카페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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