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240화 (235/1,794)

템빨 20권 - 22화

그리드.

최초의 레전드리 클래스 전직자인 그는 비공식 랭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워낙에 많은 화제성을 몰고 다녔기 때문에, Satisfy에 무관심한 사람조차도 그리드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가는 양분된다.

능력 없는 인간이 운 좋게 레전드리 클래스로 전직해서 인생 폈다. 혹은 레전드리 클래스를 획득한 것 자체가 능력이다. 등등.

그리드처럼 칭송과 비난을 동시에 받는 인물도 아마 드물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를 칭송하는 사람들도, 비난하는 사람들도 그리드를 평가할 때 공통되게 동의하는 부분이 있었다.

어찌됐든 그리드는 강하다. 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타르마의 생각은 달랐다.

‘제아무리 강해봤자 대장장이.’

실제로 그리드의 전투 영상을 몇 회 시청한 타르마였지만, 전투의 스페셜리스트인 그의 시각으로 봤을 때 그리드는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전투 관련 스킬들이 죄다 공격적이었고 방어적인 측면이 부족했는데, 그 부족한 방어력을 충당할만한 컨트롤 솜씨가 전무했다.

‘뭐, 일반인들의 수준으로 볼 때는 잘 싸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피식, 조소한 타르마가 그리드에게 훠이훠이 손을 휘저었다.

“피라미는 꺼져라. 너 따위 상대할 시간 없다.”

아직 국가대항전이 시작되기 전, 세상은 그리드가 활약하지 못하리라 예측했었고 그건 타르마의 의뢰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여 타르마의 의뢰인은 그리드의 목에 현상금을 붙이지 않았다.

즉, 타르마에게 있어서 그리드는 표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쓸데없이 충돌해봤자 에너지 낭비였다.

그는 순순히 그리드를 보내줄 생각이었지만 말투가 문제였다.

피라미는 꺼지라니?

위협적으로 눈을 치뜨며 함부로 지껄이는 타르마의 태도가 그리드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불이냐? 꺼지게?”

“뭐? 그게 무슨 말이야?”

한국식 언어유희를 이해하지 못하는 타르마.

어리둥절해하는 그에게 그리드가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거나 처먹으라고.”

주변인들에게는 누구보다 상냥해지기 시작한 그리드였으나, 타고난 성격만큼은 온후함과 거리가 멀다.

인성 최악이라는 말을 밥 먹듯이 듣고 살아온 타르마와 동격이면 동격이지 결코 꿀리지 않았다.

“이 새끼가…”

타르마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그리드에게 손가락 욕을 당한 건 둘째 치고, 그리드에게 시간을 잡아먹히는 사이 크라우젤이 예상한 지점을 지나가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드 탓에 완벽한 기습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이다.

“이것 참 용서할 수가 없군…”

타르마가 꽈드득, 이를 갈았다.

“너 따위 피라미가 나한테 맞아죽을 기회를 얻은 걸 영광으로 알아라.”

세상은 최강의 어쌔신을 페이커라고 알고 있다.

페이커는 7대 길드의 한 축을 담당하는 아이스 플라워 길드를 단신으로 도륙하고 살신(殺神)이라는 칭호까지 얻은 어쌔신의 정점이었으니까.

하지만 타르마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페이커보다 타르마가 한 수 위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비공식 랭커 어쌔신 타르마.

그가 어둠의 세계에서 보여 온 활약들은 페이커가 보여준 활약 이상이었기에.

『타르마? 저자는 누구죠?』

『음, 어디 보자… 그리스 소속의 3차 전직 어쌔신이군요. 클래스는 그림자의 주인… 비공식 랭커인지라 레벨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현재 티라 섬에는 수백, 수천 대의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고 이는 참가자들의 움직임을 실시간을 포착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각국 방송사들이 송출할 수 있는 영상은 한정적인 바, 딱히 유명하지 않은 참가자들의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노출되지 않았고 그중 하나가 바로 타르마였다.

한데 지금 이 순간.

연합국을 전멸시킨 그리드가 표적 처리에 열중하고자 갓 핸드가 있는 구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타르마와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 타르마는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타르마? 3차 전직자면 80위권 랭커랑 최소 동레벨이라는 뜻인데도 처음 보네.

-언론에 노출된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음. 밥 먹고 사냥만하는 유형의 인물인 듯.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타르마를 몰랐다. 각국 방송사의 해설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Satisfy라는 세계를 보다 심도 깊이 알고 있는 사람들은 타르마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타르마는 어쌔신계의 전설과도 같은 인물입니다.』

『타르마가 암살한 랭커의 숫자가 무려 100명에 육박한다는 소문이 있죠. 심지어 랭킹 2위 지발조차도 타르마에게 암살당한 전력이 있습니다.』

『블러드 카니발이라는 다크 게이머 집단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타르마는 그 악명 높은 집단에 소속 된 괴물 중 하나입니다.』

『‘진정한 살신(殺神)은 페이커가 아닌 타르마다.’라는, 뒷세계의 말이 있죠.』

전문가들의 충격적인 발언으로 인해서 인터넷이 술렁거렸다.

각국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순위가 타르마와 블러드 카니발로 도배됐다.

-와… 블러드 카니발이라는 곳 처음 들어보는데 전력이 엄청 화려하네요.

-엄청 악독한 집단임… 오죽하면 별명이 Satisfy계의 삼합회겠음?

-13개의 왕국이 블러드 카니발에게 현상금 걸어놨는데 본거지조차 파악 못하는 실정ㄷㄷ

-타르마가 지발 암살했던 거 단순 루머가 아니라 사실 같은데;; 그리드 잘못 걸린 거 아닌가? 위험해 보이는데?

지이잉-

숲 곳곳에 흩어져 있던 드론 카메라 수십 대가 그리드와 타르마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현재 세계가 두 사람을 주목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대목이었다.

“하, 이것 참.”

카메라를 보고 미간을 좁힌 타르마가 머리를 긁적였다.

오로지 크라우젤을 암살하기 위해서 국가대항전에 참가한 그의 입장에선, 보다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일을 피해야만 했었다.

하지만 그리드 때문에 망친 것이다.

“이제 내가 널 죽이면, 국대전에 참가한 모든 국가들이 날 경계하게 되겠지. 별 같잖은 피라미 새끼 때문에 귀찮게 됐네.”

스윽.

투덜거린 타르마가 품에서 <라이온 그룹>의 로고를 꺼냈다.

라이온 그룹.

세계 10대 기업 중 하나이자 타르마에게 기업 홍보를 부탁한 스폰서의 정체다.

“그래도 뭐, 이 정도 주목도면 너 따위 피라미의 목에도 몇 억 정돈 책정되겠지.”

큼지막한 라이온 그룹의 로고를 가슴에 부착한 타르마.

음침한 기운을 내뿜기 시작한 그가 두 자루의 황색 단도를 꺼내 쥐었다.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유저들이 구경조차 못한 동대륙의 모래왕국, <가야>에서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획득한 PK전용 무기다.

“이건 미개한 서대륙의 아이템들과는 수준이 다른 최강의 무기지. 템빨? 풋! 그조차도 나를 표현하는 단어 중 하나다!”

자신만만하게 외친 타르마가 그림자를 사방으로 전개했다.

지면, 수풀, 나무, 바위 등.

온갖 곳으로 뻗어나간 타르마의 그림자가 시청자들의 시선을 현혹하였고,

“그림자 이동!”

타르마의 신형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야말로 감쪽같았다.

최강의 은신기술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한 수준이었으므로 각국 방송사의 해설진과 전문가들, 그리고 전 세계 시청자들이 동시에 경탄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달랐다.

과거, 이미 카심이라는 이름의 그림자 어쌔신을 목도한 경험이 있는 그리드다.

그는 타르마의 그림자가 조금 꿈틀거리기 시작한 시점부터 타르마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미리 <마력 탐지(강화)>Lv.2를 캐스팅했다.

일반적인 마력 탐지Lv.2는 캐스팅 시간이 무척 길었으며, 은신을 사용한 뒤에도 실시간으로 이동하는 어쌔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간파할 수 없었으나 그리드의 마력 탐지는 무려 대마법사 브라함이 발동 공식을 완전히 뒤엎어버린, 전설급 마법이다.

그 기능이 상식을 초월했다.

더군다나 그리드는 높은 통찰력과 <도살귀의 안대>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모든 조건이 맞물리면서, 그 오만방자한 타르마에게 재앙을 선사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뭣이!!”

그리드의 측면에 서있는 나무 아래의 그림자를 통해서 솟구쳐 오른 타르마.

그리드가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죽여 버릴 심산이었던 그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경악했다.

자신이 등장한 지점으로, 그리드의 손아귀에 쥐어진 칠흑의 대검이 날아오고 있었기에.

“연살(聯殺).”

푸욱-!

푹! 푹! 푹!!

“……!”

어쌔신의 취약점은 낮은 생명력과 방어력에 있다.

뛰어난 은신 능력과 살상력을 자랑하는 대신, 모든 근접 딜러를 통틀어서 가장 몸이 약했다.

단지 공격력만 놓고 따지면 연살파(聯殺派)를 상회하는 위력을 발휘하는 연살(聯殺)Lv.2에 적중당하고도 생존할 수 있는 어쌔신?

운 좋게 회피가 잘 터지지 않는 이상 없다.

타르마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잿빛으로 산화하였고…

『헐.』

각국 방송사의 해설진과 전문가들이 일제히 헛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 1위가 <3초>로 갱신 됐다.

작년 국가대항전에서 미국 대표 휴렌트를 5초 만에, 그리고 프랑스 대표 봉드레를 4초 만에 로그아웃시켰던 그리드가 또 새로운 기록을 세운 것이다.

무척이나 진부한 표현이지만, 세상은 또 한 번 경악했다.

국가대항전 첫날부터 그리드는 세상을 몇 번이나 뒤집어 놓고 있었다.

***

‘터무니없이 강한 놈이었군.’

타르마의 등장 지점을 읽고 연살(聯殺)로 가격할 당시, 그리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타르마라는 놈, 그 찰나의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반격을 가하여 내 손목을 베어버렸으므로.

‘피가 3천이나 달다니…’

저항하기는 했지만, 심지어 중독과 마비 유발까지 귀속 된 공격이었다.

저력이 엄청나다. 만에 하나 연살(聯殺)의 타격 횟수가 3회 이하로 터졌다면, 타르마를 스킬 한 방으로 해치울 수 없었을 테고 그대로 반격을 연달아 허용해서 위험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그리드였다.

그렇다.

그리드는 단 일합을 교환한 것만으로도 상대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안목마저도 갖춰가는 중이었다.

무수한 강자들과의 전투가 누적되면 누적될수록 모든 면에서 발전하는 것이다.

지금의 그리드는 진정한 강자로서 거듭나고 있었다.

『미국의 점수가 한국을 바짝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한국의 생존자는 단 세 명밖에 안 되기 때문에 표적처리 속도가 타 팀보다 느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미국에게 1등을 빼앗길 수도 있겠는데요?』

“이런.”

경기의 흥을 돋우려고 노력하는 MC들의 발언이 그리드에게 경각심을 심어주었다.

점수판을 확인한 그리드가 플라이를 전개, 표적이 밀집되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가 파(派)를 전개했다.

그러자 표적 수십 개가 연달아 폭발하는 장관이 일어났다.

하지만 마나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갓 핸드들과 함께 공중에서 표적들을 베어 넘기던 그리드가 급기야 마나가 고갈되어 지상으로 떨어졌다.

그를 본 한국인 시청자들이 좌절했다.

지상에서는 표적 처리가 어려웠기 때문에, 원거리 딜러가 유라 한 명 뿐인 한국은 이제 미국에게 점수를 따라잡히리라 본 것이다.

어쩌면 러시아와 캐나다에게도 점수를 따라잡힐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리드가 누군가?

전설의 대장장이로서 모든 무기를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인물이다. 번헨 열도에서 웨폰 마스터리 스킬까지 습득해 왔다.

활을 꺼내서 무장하는 그를 보면서, 해설진과 시청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활? 활을 왜 꺼내는 걸까요?』

『글쎄요… 설마 대장장이가 활을 쏘려는 것도 아닐 테고…』

파그마는 전설의 대장장이이자 검호였던 바.

파그마의 후예인 그리드가 검을 무기로 사용하는 건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설마 활까지 쏠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