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239화 (234/1,794)

템빨 20권 - 21화

다구리 앞에 장사 없다.

이는 게임의 진리 중 하나다.

그야말로 불변의 법칙이었다.

이 법칙이 극단적으로 적용되는 콘텐츠가 바로 <보스 레이드>이다.

수백만 생명력을 자랑하는 보스몬스터?

수십 명의 플레이어에게 수천, 수만에 이르는 피해를 지속적으로 입으면 결국 쓰러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만약, 그 보스 몬스터가 플레이어를 일격에 해치울 수 있는 공격력을 보유하고 있다면?

진리가 깨질 공산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드가 홀로 연합팀 잔당 37명을 전멸시킨 것은 썩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

한국 VS 연합국.

유라와 극검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수적인 열세가 워낙에 컸으므로 한국은 점차 수세에 몰렸었다.

급기야 유라와 극검을 제외한 한국인 선수들 전원이 로그아웃 당하고 말았다.

한국은 끝이다!

세상 사람들이 동시에 생각하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주인공 등장.”

봉드레와 부바트를 연달아 격파하고 달려온 그리드가 드디어 전장에 합류했다.

늘, 언제나 그렇듯 참으로 절묘하고 극적인 타이밍의 등장이었다.

본래라면 그를 보면서 전율해야할 해설진과 관중들이었으나…

『그리드의 차림새가 참으로 독특하군요.』

『으음… 애매합니다.』

그리드의 모습을 확인한 해설진과 관중들이 당황하더니 급기야 하나, 둘씩 실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검은 미늘 갑옷과 망토, 황금색의 각반과 투구, 거기에 또 시뻘건 건틀렛.

종전과는 다른 방어구들을 무장하고 등장한 그리드의 모습이 워낙에 우스꽝스러운 까닭이었다.

“미적 감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군.”

“어떻게 저런 꼴로 돌아다닐 수가 있지? 창피하지도 않나?”

“초등학생인 내 딸조차도 그리드보다는 색을 잘 배열할 것 같다…”

그리드가 무장한 방어구들, 개별적으로 보면 디자인이며 색감이며 굉장히 멋지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색상의 조화가 엉망이다.

검은 갑옷에 적색 건틀렛까지는 그나마 괜찮았지만, 갑옷과 색상이 같은 망토에다가 또 황금색 각반과 투구라니…

더럽게 안 어울리고 촌스럽다.

막말로 벌칙 게임을 수행하는 코미디언들이나 입을 법한 차림새였다.

“그리드, 너 뭐냐? 우리들을 웃겨 죽이려고 작정한 거냐?”

“얼굴에 얼마나 두꺼운 철판을 깔아야 그런 꼴로 돌아다닐 수 있지?”

“나 같으면 차라리 홀딱 벗고 다니겠다.”

연합팀 잔당들의 기세가 올랐다.

가장 크게 경계하였던 그리드의 상태가 영 웃겼으니 긴장감을 잃었다.

애초에 그리드는 봉드레와 부바트를 상대하면서 상당한 스킬과 마나를 소진한 상태이므로, 연합국 잔당들은 자신들이 협공하면 그리드를 쉽사리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역으로 전멸당해 버렸다.

대부분 2차 전직자에 불과했던 연합팀 랭커들의 공격은 그리드의 방어력을 꿰뚫을 수 없었고, 반면 그리드의 공격력은 연합팀 랭커들의 방어력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10대 맞을 때마다 1대로 되갚아주기를 반복하는 그리드에게 37명 연합팀 잔당들은 막말로 도륙을 당했다.

맞고, 맞고, 맞고, 때리고.

오로지 능력치만을 앞세운 그 단순한 그리드의 전투법이 적에게 극한의 공포를 선사함과 동시에 뛰어난 효력을 발휘했다.

최강의 공격력을 보여줄 수 없게 된 이상 최강의 방어력을 보여주겠노라고 선언했던 그리드.

그는 선언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선언과 달리 최강의 공격력과 최강의 방어력을 함께 보여줬으니까.

그야말로 압도적인 템빨무쌍이었다.

수백만 템빨러 꿈나무 아저씨들에게 희열과 희망을 선사하는 모습이었다.

『대, 대단… 대단합니다!』

『지금의 그리드라면 혼자서 3차 전직자 2명도 거뜬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리드의 독보적인 활약 끝에 연합팀이 전멸하였습니다!!』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고 전율하며 그리드의 활약을 칭송한 해설진들이 연합팀의 전멸을 알린 그 순간.

“그리드…!”

폰에게 입은 강력한 데미지를 회복하고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던 지발이 이를 갈았다.

점수판을 노려보는 그의 눈이 붉게 충혈 됐다.

1등. 한국-83점

2등. 미국-68점

3등. 러시아-47점

4등. 캐나다-36점

..

꽈드득!

연합팀, 그 피라미 놈들 하등 쓸모가 없다.

당연히 한국을 궤멸시킬 줄 알았더니, 궤멸시키기는커녕 궤멸 당했을 뿐더러 한국의 표적 처리를 막지도 못했다.

혼자 앞서나가는 한국을 보면서 초조해하는 지발에게 라우엘이 다가왔다.

“그나마 연합팀이 발을 묶어준 덕분에 한국의 점수 획득 속도가 더뎠고, 우리가 뒤따라갈 수 있는 희망이 엿보였었습니다만 이젠 끝이군요. 이제 한국은 표적 처리에 집중할 수 있을 테고 우리는 이대로 2위를 사수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우리가 한국을 덮친다면?”

“충분히 우리에게 승산이 있겠죠. 한국은 지쳤고, 우리는 당신을 제외하면 건재하니까요.”

‘당신을 제외하면 건재하다’라는 부분을 묘하게 강조하는 라우엘이었다.

그에 눈살을 찌푸리는 지발에게 피식 웃어준 라우엘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님을 쓰러뜨리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솔직히 장담하기 어렵군요. 현재 그리드님의 방어력은 최소 3천 1백이 넘고 물리 공격에 대해서 극단적인 내성을 보유한 것 같습니다.”

“…”

3차 전직한 탱커들의 평균 방어력이 2,500이다. 한데 탱커도 아닌 대장장이 그리드의 방어력이 3천을 가뿐히 넘어설 것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방어력을 높여주는 패시브 스킬도 없는 주제에 말이다.

‘빌어먹을 템빨러놈.’

대장장이 랭킹 1위 판미르를 섭외한 지발 또한 훌륭한 템빨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기에 폰의 레일 스피어를 얻어맞고도 기절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왠지 그리드 앞에서는 초라한 심정이었다.

“괜히 우리가 한국과 싸워봤자 러시아와 캐나다에게 기회를 만들어주는 꼴밖에 안 됩니다. 그냥 2위로 만족하시죠.”

산 정상.

표적들을 처리함과 동시에 전장을 굽어 살피는 라우엘의 시선이 러시아팀에게 꽂혀있다.

크라우젤도 없이, 단 여섯 명이서 이탈리아와 대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선전하며 표적을 빠르게 처리 중인 러시아의 저력, 솔직히 말해서 놀랍다.

‘4명의 3차 전직자가 소문보다 더 뛰어난 기량을 자랑한다. 크라우젤의 존재감이 저들의 사기를 올려주고 있는 걸까?’

『소피아 로그아웃! 헝가리팀 전멸!』

“…괴물 같으니라고.”

숲과 산을 오가며 이름난 저격수들을 암살하고, 그 과정에서 저격수들이 속해있는 국가 전체를 송두리째 전멸시켜버리는 크라우젤의 파괴력이 상식을 초월하고 있다. 비현실적일 지경이다.

제아무리 그리드라도 크라우젤의 맹공을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긴다.

‘…가만.’

돌아가는 사태를 보아하니, 현재 전장에서 가장 적극적인 인물은 크라우젤이다.

어쩌면 그는 금메달을 노리고 있는 게 아닐까?

러시아의 전력을 간과하고 있던 라우엘이 뒤늦게 깨달았다.

‘그렇다면…!’

크라우젤의 다음 목표,

‘한국의 유라다.’

그리드VS크라우젤이라는 지상최대의 빅매치가 개막식부터 성사되는가?

템빨단의 라우엘, 혹은 미국의 라우엘이기에 앞서서 라우엘은 Satisfy를 즐겁게 플레이하는 유저다.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대결을 관람하고 싶은 것이 순수한 유저로서의 그의 솔직한 욕구였다.

이는 현재 국가대항전을 지켜보고 있는 수억 명 시청자들의 공통 된 바람일 것이다.

***

“…”

티라 섬 중앙에 솟은 3개의 산 중 가장 낮은 봉우리에서 중국과 일본이 대치중이었다.

자신들이야말로 아시아의 맹주라고 믿는 양팀 다 서로의 눈치를 살피면서 타국의 개입을 견제하느라 표적 처리에 열중하지 못하는 상태다.

한데 긴장감 없는 3명이 있었다.

일본의 데미안과 카츠, 그리고 중국의 하오였다.

“역시! 역시 그리드님은 멋지십니다!”

데미안.

최강의 성기사임과 동시에 유저 최초의 교황으로 등극한 그 괴물 중의 괴물은 그저 그리드의 활약을 지켜보면서 감탄할 뿐이었고,

“흥, 지루하군.”

카츠.

에픽 클래스 전직자이자 일본 최고의 랭커인 그는 의욕 없이 하품만 하고 있다.

“천외천…”

하오.

전투의 귀재이자 대륙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반용족은 오로지 크라우젤만을 의식할 따름이다.

“…어이, 이봐들. 우리도 슬슬 뭘 해야 하지 않아?”

한때 일본 최고의 랭커라고 칭송 받았던 궁사 요시무라.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겐 한없이 약한 그가 데미안과 카츠의 눈치를 살피며 묻는다.

그러자 카츠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하긴, 가만히 있는 것보단 미개한 떼놈들 때려잡는 게 그나마 덜 심심하겠지.”

중국인 랭커들의 얼굴이 일제히 붉게 달아올랐다.

“뭐? 미개하다고?”

“간악한 왜놈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천인공노할 놈!!”

과연 중국인들의 다혈질은 알아줘야만 했다.

카츠가 한 번 도발한 것에 홀딱 넘어가서는, 수십 분 동안의 대치가 무색하게도 일제히 달려들었다.

“큭큭.”

특유의 광소를 터뜨린 카츠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쥐더니 휘둘렀다.

매 공격마다 적의 생명력을 흡수하고, 본인이나 타인이 흘리는 혈액을 매개체로 삼아서 광역 스킬을 전개할 수 있는 <블러드 워리어>의 위용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카츠의 강함을 한 눈에 알아본 하오가 결국 직접 나섰다.

아시아의 맹주 자리를 건 두 국가의 사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가 동시에 열광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한데 이 와중에 데미안이 찬 물을 끼얹는 발언을 했다.

“어차피 최고는 한국인데.”

“…”

데미안 재일교포설이 더욱 더 힘을 얻는 순간이었다.

***

‘100억짜리 목이라 이거지.’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다크 게이머 집단 <블러드 카니발>에서 파견 나온 타르마.

그리스 소속으로 이번 국가대항전에 출전한 그의 목적은 크라우젤의 암살이었다.

그는 크라우젤과 대결할 수 있는 모든 종목에 참가, 매번 크라우젤의 목을 따버리는 게 목표였다. 금메달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PvP에서 죽이면 추가 수당 3배… 그 외의 네임드 랭커들을 죽여도 추가 수당 획득. 큭큭, 이참에 수백억쯤 벌어서 미국으로 이민 가면 되겠군.’

대저택에서 매일 미녀를 끼고 호화로운 생활을 만끽하리라!

찬란한 미래를 꿈꾸며 크라우젤의 이동 경로에 대기하고 있던 그의 등골이 문득 오싹해졌다.

웬 황금색 손 하나가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게 아닌가?

그 유명한 그리드의 <갓 핸드>였다.

‘그거 참 거슬리네.’

검을 무장한 채, 홀로 날아다니면서 표적을 처리하는 갓 핸드.

하필이면 왜 내 주변에서 이 지랄인지 모르겠다.

자칫하면 이놈 때문에 곧 나타날 크라우젤에게 위치를 발각당할 수도 있겠다, 싶었던 타르마가 신경질적으로 갓 핸드를 단도로 때렸다.

쩌엉-!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갓 핸드가 지잉, 울며 경직된다.

“어쭈?”

날아가라고 힘껏 때렸더니만 제자리에서 버텨?

“저리 꺼지라니까?”

쩡! 쩡! 쩡!!

얼굴을 찌푸린 타르마가 몇 대 더 갓 핸드를 때렸다.

그러자 사방에 흩어진 채 각자 표적을 처리하고 있던 갓 핸드들이 일제히 타르마의 곁으로 몰려왔다.

적으로 인식한 것이다.

“헐.”

홀로 움직이는 것은 물론이고 판단능력까지 지녔다니, 세상에 뭐 이토록 경이적이고 훌륭한 아이템이 다 있단 말인가?

그리드가 템빨러로 유명한 이유가 다 있었다.

라고, 생각하며 당황하는 타르마에게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뭔데 남의 아이템을 그렇게 막 폭행하고 그러냐?”

“…그리드?”

크라우젤조차도 이길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타르마 앞에, 크라우젤과 비교하면 애송이 중의 애송이인 그리드가 나타난 것이다.

타르마가 콧방귀 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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