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0권 - 18화
『…』
국가대항전을 중계 중이던 각국 방송사의 캐스터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그리드의 전투 능력에 충격 받아 할 말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프로로서 언제까지고 침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급히 정신을 차린 캐스터들이 자료를 확인한 후 재차 진행에 나섰다.
『기본적으로, Satisfy는 플레이어의 방어력이 높을수록 입는 피해가 백분율로 경감되는 시스템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국가대항전에서는 PvP데미지 적용률이 50퍼센트 감소했죠.』
『참가자들의 수준 높은 방어력을 고려해봤을 때, 국가대항전에서 실질적으로 적용되는 PvP데미지는 평균 30~35퍼센트에 불과하리라는 전문가들의 관측이 있었습니다만…』
『…그리드는 타국 대표 여덟 명과 봉드레를 순식간에 제압해버렸군요.』
『그리드의 공격력이 너무나도 막강한 나머지, 참가자들의 방어력으로도 그의 데미지를 경감시키기엔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패치조차도 감히 그의 극딜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단지 공격력만 높은 게 아니죠. 그리드는 반격기를 실전에서, 그것도 봉드레라는 하이 랭커를 상대로 완벽하게 활용하였습니다. 이게 단지 우연일까요? 아니죠. 그리드는 작년과 다릅니다. 이제 그리드는 수준급의 컨트롤 솜씨까지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
앵커들은 칭송했고, ‘한국은 꼴찌를 안 하면 다행이다.’라고 예측했던 전문가들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만큼 그리드가 보여주는 활약이 놀라웠다. 모두의 예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갓리드.
한동안 유행했던 그 오만방자한 별명이 세계인들의 뇌리에 새삼 다시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한편, 터키팀 대표 부바트는 의외로 여유 넘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봤을 때 현재 그리드의 수준은 딱 예상한 정도에 불과했다.
‘역시 패치의 영향이 크군.’
그리드가 연살파(聯殺派)라는 새로운 스킬을 선보였을 때, 부바트는 연살파(聯殺派)에 적중당한 인원 전부가 사망에 이르리라고 예측했었다.
하지만 결과는 4명 사망, 3명 중상, 1명 경상에 그쳤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각국을 대표하는 실력자들을 스킬 한 방으로 휩쓸어버릴 수 있는 존재, 이 세상에 몇 없었으니까.
하지만 상대는 그리드가 아닌가?
그리드는 작년 국가대항전에서 초연(超聯)만으로 수십 명을 궤멸시켰던 괴물이다. 작년과 비교하면 확실히 포스가 떨어졌다.
‘지금의 놈으로서는 내게 위협을 주지 못한다.’
급기야 봉드레조차 일격에 해치우지 못하는 그리드를 보면서, 부바트는 이렇듯 확신했다.
그리고 부바트의 자신감에는 합당한 근거가 있었다.
<무패왕의 보구 세트>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으므로 무패의 왕이라고 추앙받았던 인물, 마드라.
지금은 사하란 제국에게 흡수당한 루반나 왕국의 9대 왕이다.
그가 재임하고 있었을 당시 루반나 왕국은 무적이었다는 전설이 있다.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사하란 제국조차도 마드라가 수호하는 루반나 왕국을 끝끝내 점령하지 못했고, 결국 마드라가 서거하기 전까지 루반나 왕국은 안전할 수 있었기에.
‘적기사단의 맹공을 홀로 견뎌냈다는 무패의 왕.’
그 전설적 존재가 생전에 사용했다고 알려진 최강의 방어구 세트가 지금, 부바트에게 있었다.
안 그래도 최고의 탱킹력을 자랑해온 부바트에게 날개가 달린 격이었다.
‘내가 이걸 손에 넣기 위해서 치룬 희생을 너는 감히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그리드.’
세월의 풍파를 겪고 빛이 바랬다고는 하나, 무패왕의 보구들은 여전히 화려하고 견고했다.
푸른빛이 감도는 갑주를 전신에 무장하고, 방벽과도 같은 대형방패를 손에 쥔 부바트가 돌진해오는 그리드를 향해서 소리쳤다.
“내가 너를 막아 보이겠다!”
유니크 등급의 무기, <세러스의 망치>를 꺼내면서 부바트는 판단한다.
‘지금 그리드는 초조할 것이다.’
최초의 연살파(聯殺派)로 4명을 해치웠고, 이후 봉드레를 꺾음으로서 프랑스팀 선수들을 모조리 퇴각시켰다고는 하나 연합팀의 숫자는 여전히 압도적으로 많다.
한국팀은 60명이 훌쩍 넘는 적에게 포위당한 채 압박을 받는 중이었다.
그리드가 한시라도 빨리 당도하지 않는 이상 언제 전멸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한국은 위기였고, 그리드는 조급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그 조급함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흑화.”
퍼엉!!
칠흑의 마기를 폭발시킨 그리드가 반마(半魔)로 변했다.
생명력이 낮아지는 페널티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리드는 작금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공격력을 높인 것이다.
‘역시 내 예상대로군!’
초조해하는 그리드를 보고 회심의 미소를 그린 부바트가 포효했다.
“덤벼라!!”
쿠웡-!!
[도발의 외침이 발동합니다.]
[적을 반드시 도발합니다.]
레어 히든 클래스, 크러셔.
스탯은 전형적인 탱커이지만, 이 클래스의 가장 큰 장점은 분쇄기라는 이름에 걸맞게 진형 파괴에 있었다.
3미터 이내의 대상에게 ‘무조건’ 접근할 수 있는 확정 돌진기와 연계되는 CC기 콤보는 적을 순식간에 와해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작년 국가대항전에서 그리드에게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리드가 상태 이상을 죄다 면역해버린 까닭이었다.
‘허나 이젠 다르지!’
부바트가 310레벨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습득한 스킬 중에는 ‘반드시’ 적을 상태 이상에 빠뜨리는 종류의 스킬들이 있었다.
이는 본래 보스 레이드를 용이하게 만들어주는 용도의 확정 CC기였으나, 지금 이 순간 그리드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부바트’의 도발에 당합니다.]
[저항할 수 없습니다.]
그리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라우엘의 우려대로 됐군.’
‘밸런스를 위해서라도 상태이상 면역을 무시하는 기술이 언젠가는 반드시 등장할 것이다.’라고 확언했던 라우엘이다.
당시에는 콧방귀 뀌었던 그리드이지만 결국 라우엘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적의 공격을 반드시 방어하는 실드>라는 캐시 아이템을 팔아놓고, 이후에는 또 <적의 공격을 반드시 방어하는 실드를 반드시 부숨>이라는 캐시 아이템을 더욱 비싼 가격에 판매했던 어느 게임 회사의 만행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리드의 일그러진 얼굴이 클로즈업 되면서, 현재 중계를 시청 중인 수억 명의 시청자들은 사태가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던 중 문득, 입을 다물고 있던 일부 전문가들이 침까지 튀겨가면서 소리쳤다.
『부바트가 무장하고 있는 저 방어구…! 고서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저건 무패왕 마드라의 보구로군요!』
『무패왕 마드라는 전설적인 탱커입니다. 적기사들의 맹공을 혼자 견디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니까요!』
『부바트의 탱킹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제아무리 그리드라도 부바트를 결코 쓰러뜨릴 수 없겠지요.』
『결국 그리드는 한국팀 구원에 실패하고 말겠군요.』
설레발치는 전문가들 탓에 한국인 시청자들의 불안감이 증폭됐다.
-와, 진짜네. 무패왕 마드라 검색해보니까 부바트가 입고 있는 갑옷이랑 똑같은 갑옷 입고 있네요.
-최고의 탱커 중 하나인 부바트가 최강의 방어구를 무장한 셈인데… 아무리 갓리드라도 저건 어떻게 못 하려나.
-안 그래도 이미 그리드는 많은 스킬들이 재사용 대기 시간에 걸려있는 상태일 테니… 아쉽지만 힘들지 않을까요.
심지어 한국인들의 반응조차 이러한데 타국인들의 반응은 어떻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드가 부바트라는 태산을 넘지 못하고 가로막히리라 믿었다.
한데.
“파그마의 검무.”
도발에 의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바트에게 도달한 그리드.
어느덧 대장장이의 분노와 신속한 몸놀림까지 사용한 그가,
“하하! 어디 한 번 실컷 때려봐라! 그래봤자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해라!”
끝까지 도발해오는 부바트를 향해서 베기의 극의를 선보인다.
도살귀의 안대 너머 적안이 일순 번뜩였고, 이야루그트는 기성을 토해냈다.
“극(極).”
<극(極)> Lv.4(0.5%)
천상의 무신을 표현한 검무를 춥니다.
대상에게 물리 공격력의 800% 피해를 입힙니다. 이 스킬은 대상의 방어력을 64% 무시합니다.
서걱!
“…어?”
공격 속도가 갑자기 무척 빨라졌다?
심지어 공격 궤도조차 읽기가 어렵다.
무엇보다도…
[17,05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아프다?’
아니, 왜?
손에 쥔 방패가 무용지물이 되게끔 가슴을 크게 베인 부바트가 휘청거린다.
“어, 어어?”
두 눈을 껌뻑이면서, 작금의 사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바트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크러셔>는 Satisfy에 존재하는 무수한 클래스 중에서도 최상급의 고유 방어력을 보유했으며, 무엇보다도 <무패왕의 무구 세트>는 부바트가 알기로 최강의 방어구였다.
근데 왜 이렇게 아프지?
휘청거리면서 연신 눈을 껌뻑이는 부바트, 마치 상태이상 혼란에 빠지기라도 한 듯한 모양새이다.
반격한답시고 망치를 휘둘러오는 그의 모습, 신속한 몸놀림의 영향으로 극도의 민첩성을 자랑하고 있는 그리드의 시야에 명확하게 들어왔다.
도살귀의 안대와 이야루그트가 회피할 수 있는 방향과 방어할 수 있는 궤도를 알려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무시했다.
극탱인 부바트의 공격력,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는 판단에서였다.
퍼억!
[대상에게 1,09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엥?”
부바트의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명색이 유니크 등급의 망치를 무장하고 있건만, 데미지가 왜 이것밖에 안 들어가는 걸까?
‘뭐지? 지금 이거 버근가?’
아니면 설마, 그리드의 방어력이 내 예측을 초월하는 수준이라고?
‘탱커도 아니면서? 서, 설마!’
“패치로 인해서 최강의 공격력을 재현할 수 없게 된 이상 최강의 방어력을 선보이겠습니다. 패치를 철저히 이용해서 작년보다 더 멋진 모습을 보여드리도록 하지요.”
라는, 기자회견장에서 그리드의 발언이 떠오른다.
그렇다.
부바트는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리드는 아직 <삼겹갑>을 꺼내지도 않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혼란스러워하는 부바트의 이마에 그리드가 손가락을 겨냥했다.
“매직 미사일.”
번헨 열도에서 끊임없이 숙련도를 쌓아올린 매직 미사일(강화)의 레벨, 공교롭게도 아직 2에 불과하다. 경험치도 60퍼센트밖에 안 쌓였다. 레전드리 클래스의 마법답게 숙련도가 참 더럽게 안 올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레전드리 클래스의 마법답게 위력이 강했다.
적의 마법 저항력을 무시할뿐더러 ‘현재 마력의 2배’에 해당하는 피해를 선사한다.
그리고 여전히 <성스러운 빛의 무구 세트>를 착용하고 있는 그리드의 지력은 <성스러운 빛의 왕관>의 영향으로 200 상승한 상태였다.
엘릭서로 지력을 400이나 올렸기도 하다.
그 피해량, 부바트가 화들짝 놀랄 정도로 높았다.
퍼엉!!
“커윽?”
매직 미사일에 힘껏 얻어맞은 부바트의 머리가 뒤로 크게 젖혀졌다.
쓸데없이 푸른 하늘을 보면서, 부바트는 상황이 최악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확실하게 인지했다.
커다란 빈틈을 드러내고 있는 그를 2회 평타로 가격하는 그리드의 시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크리티컬!]
[<이야루그트>의 옵션 효과로 대상에게 출혈을 발생시킵니다.]
[3콤보 달성!]
[<이야루그트>의 옵션 효과로 대상의 출혈 효과를 극대화시킵니다. 대상에게 입히는 피해량이 1초 동안 200% 증가합니다.]
여기서 그리드가 회심의 일격을 선보였다.
바로 극살(極殺)이다.
<극살(極殺)>
지정한 대상의 방어력을 완전히 무시하고, 물리 공격력 2,000%의 피해를 입힙니다.
*검의 궤도를 도중에 바꾸는 동작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시전자에게 무리를 줍니다.
서걱!!
“크아아아아아악!!”
탱커로서 대부분의 스탯을 체력에 투자해온 부바트, 민첩성이 매우 낮다.
하지만 여태껏 낮은 민첩성으로 인한 불편함을 거의 못 느껴왔다.
민첩성이 낮아서 적의 공격에 반응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상관없다. 어차피 방어력이 높으니 맞아주고 견디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리드의 공격은 완전히 예외였다.
터무니없이 아팠다.
경기를 일으키는 그에게, 그리드는 마지막으로 <나락의 검>을 연계시켰다.
등급 성장형 마검 이야루그트에 귀속 된, 레전드리급 공격 스킬이었다.
이로서 또 하나의 별이 졌다.
채 1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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