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233화 (228/1,794)

템빨 20권 - 15화

“그리드씨, 당신은 이번 패치로 인해서 일방적인 피해를 입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발을 하지 않으셨는데요. 본인이 너프를 당한 일을 합당한 처사라 인정했다고 해석하면 되는 겁니까?”

작년 국가대항전에서 그리드가 활약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직업빨과 템빨이다. 그리드의 실력으로 인한 결과가 아니었다.

이번 패치는 그 불합리함을 없애기 위한 결과였고, 그리드도 양심이 있다면 이번 패치에 불만을 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라고, 기자는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고 있었다.

영우의 입장에선 불쾌할 수밖에 없는 태도였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은 있되 사고력과 책임감은 부족했던 1년 전의 영우였다면 기자에게 당장 화를 냈을 것이다.

당신,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으로 말을 그딴 식으로 하느냐며 따지고도 남았다.

하지만 지금의 영우가 그럴 리 없다.

자신이 템빨단과 대한민국을 대표하고 있다는 점, 현재 이 기자회견이 전 세계로 생중계 중이라는 점 등을 상기한 영우가 우선 심호흡한 뒤 기자를 관찰했다.

기자가 가슴에 매달고 있는 ID카드에는 소속 언론사와 국가, 그리고 이름이 명시되어 있었다.

‘프랑스인이군.’

제1회 국가대항전에서 프랑스는 우승후보국 중 하나로 꼽혔다.

또한 프랑스인들은 조국에 우승을 견인할 인물로서 봉드레를 지목했었다.

하지만 봉드레는 영우와 PvP에서 만나 4초 만에 패배하는 치욕을 겪었고, 그 충격적인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는 우승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원한으로 생긴 적의와, 혹 이번 대회에서도 같은 일이 재현되지는 않을까 싶은 불안감에 생긴 경계심이 프랑스인 기자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리라.

깨달은 영우는 기자가 괘씸하다기보다 도리어 측은하게 느껴졌다.

‘자존감이 낮군.’

옛날의 나처럼 말이다.

강자로서, 승자로서의 시각으로 기자를 굽어볼 수 있게 된 영우가 침착한 어조로 답변했다.

“왠지 다들 오해하는 듯한데, 저는 이번 패치의 피해자가 아닙니다.”

“예?”

프랑스인 기자가 당황했고, 장내가 술렁였다.

혼란을 틈타서 일어난 중국인 기자가 질문했다.

“그리드씨, 당신의 가장 큰 강점은 일격필살의 공격력이 아닙니까? 이번 패치로 인해서 당신은 그 강점을 잃게 되었고 필연적으로 PvP를 장기전으로 이끌어 나가야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다른 랭커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컨트롤 솜씨가 부족한 당신에게 있어서 장기전은 불리할 텐데요?”

“어째서 제 강점을 공격력이라고 보는 거죠?”

“그야 미국의 휴렌트를 단 5초, 프랑스의 봉드레를 단 4초 만에 로그아웃시킨 당신입니다. 당연히 공격력을 가장 큰 강점으로 꼽을 수밖에 없지요.”

“흠.”

영우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어떤 의미의 미소인지, 방송을 시청 중인 사람들과 장내의 기자들은 함부로 해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라와 극검, 또한 레가스는 영우가 짓는 미소의 의미를 꿰뚫어보았다.

‘비웃음이네요.’

‘가소로운 게로군.’

‘성격 나빠.’

전염병처럼 빠르게 번져나가는 기자들의 의문을 만끽한 영우가 입을 열었다.

“순수하군요.”

“네?”

다짜고짜 순수하다니? 저 미소도 그렇고, 왠지 나를 비웃는 것 같다.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는 중국인 기자에게 영우가 반문했다.

“제 강한 공격력의 근원이 뭐라고 봅니까?”

“그야 당연히 강력한 아이템이겠지요.”

“즉, 템빨. 거기에 정답이 있네요.”

“…?”

중국인 기자가 어리둥절했고, 그에게 영우가 설명했다.

“제 강점은 공격력이 아니라 템빨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템빨이라는 건 무기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죠.”

“……!”

중국인 기자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말의 요지를 이해한 것이다.

술렁이는 기자들로부터 시선을 돌린 영우가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는 카메라를 향해서 선언했다.

“패치로 인해서 최강의 공격력을 재현할 수 없게 된 이상 최강의 방어력을 선보이겠습니다. 패치를 철저히 이용해서 작년보다 더 멋진 모습을 보여드리도록 하지요.”

저격 너프? 나한테는 그딴 거 통하지 않는다는 의지가 전달되어 왔다.

“풋!”

기자들이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만큼 영우의 말이 황당무계했다.

“대장장이 클래스의 고유 방어력은 매우 낮다고 알려져 있고, 이는 제작계열 클래스의 태생적 한계이기 때문에 전설의 대장장이라도 사정이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은데요.”

“또한 당신이 방어 스킬을 사용하는 모습은 본적이 없습니다.”

“방어 스킬도 없이, 단지 좋은 방어구를 착용하는 정도로는 탱커로서 활약할 수 없다는 게 상식 아닙니까?”

“아직 2차 전직자도 드물었던 1회 국가대항전 당시에는 템빨 하나로도 직업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을지 모르나, 올해는 다를 겁니다. 다른 참가자들이 비약적으로 강해졌어요.”

“그리드씨 당신은 템빨을 너무 맹신하는 경향이 있군요.”

기자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Satisfy 전문기자들답게 근거 있는 말들만 늘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영우가 비상식적인 인물이라는 게 문제였다.

“결과야 두고 보면 알겠죠. 아, 그리고 미리 말해두는데.”

영우의 시선이 조소하고 있는 지발과 부바트를 차례대로 훑었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인원 중 템빨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스폰서 잘 만나 수십억씩 지원 받은 하이랭커들이 템빨을 갖추지 못했다면, 그건 무책임한 자의 기만이겠죠. 그러니까 나중에 지더라도 템빨 핑계 대지 맙시다. 양심이 있다면.”

다분히 노골적인 말투였다.

안 그래도 영우를 탐탁찮게 여겨온 부바트가 도발에 넘어가고 말았다.

“당신 말대로 템빨을 갖추게 된 우리가 또 당신에게 질 것 같아? 어림도 없는 소리! 올해 당신이 획득할 수 있는 메달 개수는 0개일 거라고 내 장담하지!”

지발도 거들었다.

“그나마 내세울 수 있는 거라곤 템빨밖에 없는 인물이 대표라… 한국에도 어지간히 인재가 없나보군. 히든 클래스로 전직하고 랭커 목록에서 사라진 유라의 실력이 예전보다 못하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뭐,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꼴등하지 않는 걸 목표로 분투하면 충분할 듯하군.”

이후, 기자들은 더 이상 영우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한국이라는 나라엔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태도였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한국인 기자가 거수하더니 영우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리드님, 대장장이 제작 대결 종목에 참가하실 계획은 없습니까? 전설의 대장장이인 당신이 참가한다면 금메달은 따놓은 당산일 텐데요.”

우리 대한민국 또한 금메달 하나쯤 딸 저력은 있다, 라고 한국인 기자는 세계에 어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의도를 읽은 각국의 기자들이 콧방귀를 뀌면서 수군거렸다.

“금메달이라고 그 가치가 다 똑같은 줄 아나.”

“비인기 종목에서 금메달 따봤자 큰 기사거리도 안 된다고.”

“그래도 뭐… 비인기 종목의 메달이나 인기 종목의 메달이나 성적에 반영되는 건 똑같으니까, 한국이 꼴등할 일은 없겠네.”

“에이, 그것도 아니지. 최상위 대장장이 랭커들이 최근에 제작한 아이템들의 성능 못 봤어? 제아무리 전설의 대장장이라고 해도 무조건 메달을 딸 수 있다는 보장은 없을 걸?”

“…”

기대한 것과 다른 반응에 치욕을 느낀 한국인 기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는 사실이건데, 비단 이 기자뿐만이 아닌 기자회견을 시청 중인 한국 국민 대다수가 모욕감에 분노하고 있을 터였다.

그 사실을 알기에, 영우는 인내심을 버리고 자신의 본성을 아주 조금 드러냈다. 자국민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해주고, 이를 통해서 자신과 템빨단의 이미지를 높일 의도였다.

“대장장이인 내가 대장장이 대회에 출전하는 건 형평성에 너무 어긋나지 않습니까?”

“…?”

대장장이가 대장장이 대회에 출전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한데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그리드 저 자, 지극히 오만하다.

단지 전설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대장장이들을 자신보다 아래라 단정 짓고 있다. 스스로의 가치를 필요 이상으로 높이 평가하는 처사였다.

눈살을 찌푸리는 기자들에게 영우가 손가락 5개를 들어보였다.

“내가 대장장이 대회에 출전하지 않고도 한국이 이번 국가대항전에서 획득할 금메달의 ‘최소’ 개수입니다. 기대들 하시길.”

“뭣…!”

미친 개소리에 모두가 말문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

<그리드, 금메달을 최소 다섯 개 획득해보이겠다고 선언.>

<그리드가 대장장이 대회에 출전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피력. 한국은 과연 하나의 금메달이라도 획득할 수 있을까?>

<대표의 중요성… 그리드의 오만 때문에 한국은 큰 망신을 당하게 될 예정.>

각국 언론사의 헤드라인을 그리드가 독식하고 있었다.

반면 랭킹 2위 지발의 기사는 3면에 작게 실렸을 뿐이었다.

“그리드 이 놈…”

본래는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정상인 기자회견이었건만, 그리드 놈의 오기 때문에 말리고 말았다.

자존심이 상해서 얼굴을 붉힌 지발이 각기 다른 언어로 제작 된 신문들을 접어 한쪽에 던져버렸다.

그러더니 건너편에 앉아 홍차를 음미하고 있는 은발의 미청년에게 질문했다.

“그리드가 자신있어하는 다섯 개의 종목이 뭐라고 보지?”

“보스 레이드, 표적 맞추기, 공성전.”

“뭐? 단체전 다?”

“그 외 전투관련 개인전 종목 모조리.”

“…”

기껏 비싼 홍차 처먹어놓고 터무니없는 말만 늘어놓는 은발의 미청년, 다름 아닌 라우엘이었다.

본래는 템빨단의 참모이자 영주대리로서 그리드의 최측근인 그였지만, 국적이 미국이니만큼 국가대항전에선 지발과 같은 편이었다.

“그리드가 거만한 놈인 건 알았지만 설마 그 정도였다니… 놈은 설마 본인이 최강이라고 믿는 건가?”

아니, 그리드는 늘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무서운 것이다.

‘이미 하늘 위의 하늘까지 무너뜨린 양반이 말이야.’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 라우엘이 설명했다.

“그리드님의 실력을 기반으로 제가 유추해본 겁니다.”

“거 참.”

지발은 황당할 따름이었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까지 그리드의 실력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거지? 플레이어들의 평균 능력치가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템빨의 가치가 떨어져가고 있는 현재, 오로지 템빨밖에 믿을 구석이 없는 그리드를 왜 그렇게 맹신하는 거냐?”

“하핫!”

너털웃음을 터뜨린 라우엘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 얼굴의 절반을 한쪽 손으로 가린 뒤, 손가락 틈새로 청안을 반짝여보였다.

“제가 당신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지발. 편견을 기반으로 사람과 상황을 판단하는 당신의 편협함이 당신의 한계를 증명하지요. 당신에게 가장 찬란한 순간은 현재일 뿐, 미래는 없습니다.”

오글오글!!

지발은 너무나도 오글거린 나머지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말았다. 자신을 비하하는 라우엘에게 화를 낼 겨를조차 없었다.

몸을 꼬고 있는 그에게 라우엘이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내일, 개막전으로 열릴 표적 맞추기 대회에서 우리 미국은 은메달을 노립니다.”

“뭐라고?”

미국은 단체전에서 당연히 금메달을 획득해야만 한다.

참가자 평균 레벨과 장비, 또한 기본적인 실력 등 전체적인 능력치가 미국이 압도적으로 높았으니 말이다.

한데 은메달을 노려야한다니?

그게 뭔 헛소리냐는 표정을 짓는 지발에게 라우엘이 호언장담했다.

“세계의 이치를 관조하는 나의 피어스 아이즈로 봤을 때, 금메달은 한국의 것이거든요.”

쿵!!

테이블을 힘껏 때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지발이 라우엘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네가 그리드에게 충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겠다… 하지만 늘 조국이 우선임을 명심해라. 국가대항전에서 너는 그리드의 적이야. 괜한 말로 아군을 현혹시키고 혼란을 조장하지 말도록.”

“명심하고 있다고요.”

흥분하여 목에 핏대까지 세운 지발과 상반되게 라우엘은 싱글벙글, 상쾌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그에 더욱 더 열이 뻗친 지발이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이대로 있다간 라우엘의 예쁘장한 면상을 짓뭉개버리게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제1회 국가대항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성대하게 진행 된 개막식이 끝나고, 첫 번째 국가대항전 일정이 시작되었다.

종목은 표적 맞추기.

룰은 간단했다.

S.A그룹이 국가 대항전 경기장으로 지목한 21개의 무인도.

그중 ‘티라’라는 이름의 무인도에 32개국 대표가 전원 참가한다.

그리고 초속 40미터로 이동하는 지름 5센티미터의 소형 표적들을 파괴, 점수를 획득하며 그 과정에서 타국 대표들을 공격하여 로그아웃시킬 수 있다.

표적 1개를 파괴할 때마다 누적되는 점수는 1점이고, 타국 유저를 로그아웃시킴으로써 획득하는 가산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표적만 제거하여 총 400점을 먼저 획득하는 국가가 승리하게 된다.

『혼전양산을 띄게 될 이번 승부에서 가장 먼저 400점을 획득하게 될 국가는 과연 어디일까요!』

-우와아아아아아아!!

사회자가 분위기를 고조시켰고, 국가대항전에 앞서 규모를 확장한 <스타드 드 프랑스> 국립 경기장을 가득 매운 수십 만 관객이 일제히 환호했다.

그리고 이들 중 한국을 주목하는 사람은 무척이나 드물었다.

기자회견장에서 그리드의 선언이야 어찌됐든, 단체전에서 한국이 메달을 차지할 거라고 예측하는 사람은 거의 전무한 수준이었다.

한데 어찌 된 일인지 시작부터 사태가 심상찮게 돌아갔다.

펑!

퍼퍼퍼펑!!

태양 아래 찬란하게 빛나는 4개의 황금 손으로부터 쏘아지는 백색 섬광.

경기 시작을 알리는 신호와 동시에 소형 표적들을 파괴시켜나간다.

그 속도가 다른 팀들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빨랐다.

“저놈을 막아!”

당황한 각국의 대표들이 일제히 그리드를 덮쳤고,

“연살파(聯殺派).”

그리드는 동시에 밀려오는 적들에게 감사함을 느끼면서 최강의 스킬을 전개했다.

결과?

격동하던 스타드 드 프랑스 국립경기장에 적막이 찾아왔다.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