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0권 - 11화
스케일 아머.
이름 그대로 생선의 비늘과 흡사한 갑옷이다.
작은 철판 조각 여러 개를 가죽 끈에 꿰고, 그것을 두꺼운 천이나 가죽 위에 덧대어 만든다.
몸의 동작에 따라 얼마든지 신축이 자유로워 활동성이 높다. 또한 검 등의 날붙이를 비껴나가게 만드는 효력을 발휘하였다.
착용 시 속도 저하가 낮고 찌르기와 베기에 대한 내성 옵션을 보유한 것이다.
하지만 두꺼운 철판을 통째로 사용한 다른 중갑옷들과 비교하면 기본적인 방어력이 떨어지는 게 현실이었다.
특히 철판과 철판 사이의 이음새를 공격당하게 될 경우 치명상을 피하기 어려웠다.
‘결국 철판과 철판 사이에 존재하는 틈새들이 가장 큰 문제지.’
스케일 아머가 중갑옷으로 분류됨에도 불구하고 탱커들로부터 외면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스케일 아머는 뛰어난 장점을 지닌 대신 명백한 한계를 표출하는 형식의 갑옷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스케일 아머의 한계를 극복할만한 방안을 떠올린 상태였다.
트롤 로드의 흉갑으로부터 힌트를 얻은 덕분이었다.
‘철판을 여러 겹으로 덧대어 만든다면, 스케일 아머의 장점을 유지함과 동시에 부족한 방어력을 충당할 수 있다.’
일반적인 스케일 아머는 철판 조각을 한 겹으로 엮는다. 철판 사이를 공략당하는 순간 고스란히 방어력을 잃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트롤 로드가 입고 있던 흉갑은 철판 조각을 두 겹으로 엮음으로서 약점을 최소화시켰다.
기존의 대장장이들은 이 생각을 못했던 걸까?
아니다.
기존의 대장장이들 또한 철판 조각을 한 겹이 아닌 여러 겹으로 엮을 경우 스케일 아머의 방어력이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제작하지 않은 이유는…
‘철판의 함량이 높아질수록 무게가 올라가고 활동성은 떨어지기 때문이었을 테지.’
즉, 스케일 아머 고유의 장점을 잃게 된다는 뜻이다.
무겁고 활동성 떨어지는 스케일 아머?
과연 누가 사용할까. 어차피 불편할거라면 방어력이 훨씬 더 높은 플레이트 아머를 무장하고 말지.
‘하지만 내가 만드는 건 다를 거다.’
강철보다 2배 이상 단단하고 3배 이상 가벼운 흑철.
‘이걸 주재료로 사용해서 만드는 철판들을 최대한 얇게 제련할 수만 있다면.’
철판을 두 겹, 세 겹으로 엮어도 가볍고 활동성 좋은 스케일 아머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흑철의 제련 난이도는 강철의 7배 이상으로 높았으니까.
고급 8레벨의 대장장이 기술을 익히고 있는 칸일지라도 흑철을 얇으면서도 정교하게 제련하고, 그것 수백 개를 견고하게 엮어내는 일은 못 해낼 것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사정이 달랐다.
그리드의 대장장이 기술은 전설 7레벨이었고 손재주도 3천에 육박했다.
독보적인 존재인 그에게 있어서 흑철을 제련하는 일은, 일반적인 대장장이가 강철을 제련하는 일 정도의 난이도에 불과했다.
‘내가 왜 전설인지 증명해주마.’
다른 전설들과 비교하면 전투에서 여러모로 부족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대장장이로서는 최고라는 자부심이 있다.
따앙! 따앙!!
광물을 때릴 때 느껴지는 손맛은 가히 최고다. 몬스터를 베어 넘길 때보다 더 큰 쾌감이 밀려온다.
모루 위 흑철을 때리는 그리드의 집중력이 빠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철판의 폭이 너무 넓어선 안 돼.’
철판과 철판 사이의 이음새 부분이 관절의 역할을 담당하고, 이에 따라서 스케일 아머의 신축성이 올라가는 것이다. 그 특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기왕지사 철판의 폭이 좁은 게 좋았다.
하지만 철판을 작게 만들수록 작업 시간이 늘어난다는 게 문제였다.
특히 그리드의 경우 철판을 최소 3겹으로 엮을 계획이었기 때문에 만들어야하는 철판의 개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할 우려가 있었다.
수백 개의 작은 철판을 일일이 얇게 펴고, 그걸 하나로 엮어내는 일은 이틀이 꼬박 걸려도 못해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리드는 장인이다.
작업량이 늘어나는 것?
상관없다.
보다 좋은 아이템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고생 따위 사서도 할 수 있다.
따앙! 따앙!!
그리드의 손에 의해서 최대한 작고, 얇게 정제되어가는 흑철 조각들.
마치 블랙 드래곤의 비늘을 연상하게 만들 정도로 광택을 내는 그것들은 하나 같이 일정한 모양새와 크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비늘이군.’
‘일반적인 스케일 아머에 달린 비늘보다 크기가 최소 3배는 작은데 디테일은 훨씬 더 뛰어나다. 공작각하의 기술은 과연 엄청나게 섬세하구나.’
‘헐… 벌써 100개도 넘게 만드신 것 같은데 작업이 안 끝나? 공작각하께서는 저걸 대체 몇 개나 만들 생각이시지?’
‘나라면, 실력이 있었어도 지루하고 힘들어서 못할 작업이야.’
칸과 젊은 대장장이들이 그리드의 솜씨와 정성에 몇 번이나 감탄하였고.
[전설적 대장장이의 인내심 효과가 발동합니다.]
[1시간 동안 집중력과 스태미나, 방어력이 극도록 상승합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숨결 효과가 발동합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숨결이 제작 아이템의 효과를 증폭시킵니다.]
꼬끼오~~~!!!
하루가 꼬박 지나 새벽닭이 울 무렵.
대장간 창밖 너머, 저 멀리 보이는 영주 성 뒤로 동이 터 올랐지만 그리드는 쉬지 않았다.
따앙! 따앙!!
기본적으로 높은 체력과 늘어난 스태미나를 기반으로 계속해서 철판을 만들어나가는 그리드.
그는 해가 지고 다시 또 밤이 찾아올지라도 작업에만 열중했다. 도중에 식사 시간과 수면 시간을 제외하면 망치를 손에서 놓질 않았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날.
[<스케일 아머>의 제작에 성공하였습니다.]
[당신의 제작법 목록에 명시되어 있는 <스케일 아머>와 구조가 다릅니다.]
[<스케일 아머>를 분석합니다.]
[당신이 제작한 <스케일 아머>의 기능은 경이적입니다.]
<스케일 아머(강화)>
전설의 대장장이 그리드가 구조를 변형시킨 스케일 아머입니다.
기존의 스케일 아머와 다르게 철판을 3중으로 덧대었습니다.
늘어나는 무게를 최소화시키기 위해서 재질을 흑철로 사용하였고, 활동성을 높이기 위해서 최대한 작게 만든 철판 621개를 엮어놓았습니다.
“…?”
<스케일 아머(강화)>
전설의 대장장이 그리드가 구조를 변형시킨 스케일 아머입니다.
이 대목에서 그리드는 데자뷰를 느꼈다.
최초에는 뭔가 싶었지만, 이내 떠올릴 수 있었다.
<매직 미사일(강화)>
전설의 대마법사가 발동 공식을 완전히 뒤엎어 버린 매직 미사일입니다.
그래, 바로 브라함의 마법들이다.
브라함이 기존의 마법들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강화시켰듯, 그리드 또한 기존의 아이템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강화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순간 그리드는, 자신이 왜 전설의 대장장이인지를 진심으로 깨달을 수 있게 됐다.
[제작한 아이템의 이름을 결정해주십시오.]
아이템의 등급과 옵션이 나열되기 전, 시스템이 질문을 던져왔다.
“음.”
신중하게 궁리한 그리드가 결론에 도달했다.
‘철판을 3겹으로 덧붙였으니까.’
한국인에게 친숙한 삼겹살과 매치가 잘 된다.
“삼겹갑으로 하자.”
최악이다.
곁에 라우엘이 있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렸을만한 작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공교롭게도 곁에 라우엘이 없었다.
오로지 레이단의 미래를 위해서 여성 NPC들과 교류 중인 최근의 라우엘은 역대급으로 바쁜 상태였고 그리드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삼겹갑>으로 결정하시겠습니까?]
“그래.”
[아이템 <삼겹갑>이 제작 목록에 추가됩니다.]
[<삼겹갑>이 완성되었습니다.]
<삼겹갑>
등급:레전드리
내구력:721/721 방어력:1,115
*물리 공격으로 받는 피해 30퍼센트 경감
*베기, 찌르기 공격으로 받는 피해 50퍼센트 경감
*패시브 스킬 <소드 브레이커> 생성
*근력+50
전설의 대장장이 그리드가 구조를 변형시킨 스케일 아머입니다.
하나하나 정성들여서 제작한 621개의 소형 철판이 3중으로 덧대어져 착용자에게 높은 방어력과 활동성을 보장합니다.
또한 철판마다 미세한 홈이 파여 있으므로 적의 검이 꽂혀올 경우 일정확률로 물고 파손시킵니다.
마치 블랙 드래곤의 비늘과 닮아있는 이 621개의 소형 철판은 착용자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물결치며 광택을 발산할 것입니다.
철판을 엮고 있는 가죽 끈의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서 사용한 오우거의 피가 착용자의 근력을 소폭 상승시킵니다.
사용 조건:레벨 320. 근력 1,500. 체력 1,830. 고급 헤비 아머 마스터리 레벨 5.
무게:2,501
[레전드리 아이템을 제작하여 모든 능력치가 +10 영구적으로 상승, 대륙 전역에 명성이 +500 상승합니다.]
“헐.”
그리드가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하고 어느덧 2년 반 정도가 지났다. 게임 시간도 아니고 현실 시간으로 말이다.
그동안 그리드가 제작한 아이템의 개수가 어느덧 만 단위를 향해가고 있었지만, 그리드는 여태껏 레전드리 아이템을 단 12개밖에 제작하지 못했다.
전설의 대장장이임에도 불구하고 워낙에 재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그리드는 마음을 비운 상태였다.
아이템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레전드리 아이템이 완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그리드는 감히 품지 못했었다.
한데 오늘.
지난 몇 달 동안 번헨 열도에서 고생하다가 돌아와 오래간만에 제작한 아이템이 한 번에 레전드리 등급으로 뜬 것이다.
그리드가 거대한 감동에 사로잡혔다.
“드디어… 드디어 하늘이 내 실력과 정성을 알아주는구나.”
노력에 대한 보상을 얻는다는 것, 천재들에겐 당연한 일일지 모르나 일반인들에겐 그렇지 않다.
아무리 노력해도 합당한 보상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둔재인 그리드야 더욱 더 그랬고.
하지만 이제 노력은 그리드의 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드가 성장을 통해서 이뤄낸 결과였다.
“좋아… 이 기세를 몰아간다.”
그리드는 삼겹갑이라는 결과물이 매우 흡족한 상태였다.
신의 광물인 아다만티움을 재료로 사용한 <성스러운 빛의 갑옷>과 비교하면 내구력과 옵션이 좀 부족했지만, 최소한 방어력만큼은 삼겹갑이 훨씬 더 뛰어났으니까.
“다음은 투구랑 각반이다.”
제2회 국가대항전에 한정적으로 적용 된 밸런스 패치가 내 날개를 꺾었다고?
<최대의 무기인 공격력을 억제당한 그리드, 고배를 마시게 될 것>
라는 내용의 헤드라인을 떠올린 그리드가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설마 나를 딜러라고 생각하다니.’
템빨은 유연한 법이다.
누구라도 템빨을 갖출 수만 있다면 딜러도, 탱커도 될 수 있다.
이번 국가대항전에서 그리드는 패치에 굴복하지 않는 공격력과 동시에 패치를 이용한 방어력까지 선보일 계획이었다.
한 마디로 무결점의 딜탱이 되어서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겠다는 뜻이다.
따앙! 따앙!!
투구와 각반, 그리고 건틀렛이 서서히 완성되어가고 아이템 창조를 통해서 란스티어의 망토가 재현된다.
템빨무쌍까지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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