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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226화 (221/1,794)

템빨 20권 - 8화

[대악마라면 가능한 일이지.]

“뭐?”

파그마가 대악마라고?

말도 안 된다.

‘가만.’

부정하려던 그리드가 문득 멈췄다.

자신에겐 파그마라는 인물을 판단할만한 근거가 부족했을 뿐더러, 브라함이라는 인물의 특성이 워낙 특이했던 까닭이다.

‘사실은 브라함도 인간이 아니라 뱀파이어였다고 했잖아?’

전설의 대마법사부터가 마족인 판국이니, 전설의 대장장이 또한 마족이라고 해도 이상하진 않다.

하지만 왜?

‘어째서 전설들은 죄다 마족이지?’

그리드의 혼란을 감지한 브라함이 실소를 흘렸다.

[누가 백치 아니랄까봐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가.]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기껏 지력 엘릭서까지 먹었더니만 누구보고 백치래? 아니, 그럼 방금 그 말은 대체 무슨 뜻인데?”

[대악마의 힘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보다 완곡하게 표현했을 뿐이지, 파그마는 인간이 맞다.]

“대악마의 힘을 받아들였다?”

[바알.]

“……!”

그리드가 화들짝 놀랐다.

바알이라는 이름에 실린 무게를 알아서?

아니다.

그리드가 놀란 이유, 브라함의 분노를 느꼈기 때문이다.

브라함의 영혼에 심연처럼 깊이 각인 된 분노가 서서히 끓어오르는가 싶더니 급기야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브라함의 영혼을 품고 있는 그리드 또한 덩달아 화가 치밀어 오를 정도였다.

[전대 바알의 계약자가 바로 파그마다.]

“……!”

또 한 번 크게 놀란 그리드.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찢어져라 치켜뜬 그가 질문했다.

“바알의 계약자가 뭔데?”

[…하.]

영혼도 한숨을 쉴 수 있다는 사실, 그리드는 생전 처음 알았다.

***

제1악마 바알.

33대악마의 정점에 있는 존재로서 지옥의 주인으로 군림한다.

쉽게 표현하자면 마왕이다.

그는 신조차도 경계하는 드래곤들과 대적할 수 있는, 보다 절대적인 개념의 존재였다.

[놈은 그 누구보다도 악마로서의 본능에 충실하다. 교만하고, 파괴적이며, 조롱하고 기만하길 즐기지. 인간과의 계약을 통해서 인간계에 혼돈의 씨앗을 심어두는 일은, 놈에게 있어서 아주 재미있는 유흥거리일 것이다.]

“파그마는 어째서 그런 놈과 계약한 건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곳 번헨 열도를 지키기 위해선 놈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어?”

말에 어폐가 있다.

파그마는 대악마들로부터 번헨 열도를 지키고자 했던 건데, 그 일에 대악마의 힘을 빌렸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바알은 조롱하고 기만하기를 즐긴다고.]

“그런데?”

[조롱하고 기만하는 대상이 인간이든, 자신과 같은 대악마이든 바알에겐 관계없는 일이다.]

“…”

과거의 그리드였다면,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당최 뭔 개소리냐면서 슬슬 짜증을 냈을 터였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발달한 사고력을 기반으로 브라함의 발언을 적절히 해석했다.

“혹시, 바알은 같은 대악마들의 번헨 열도 침공을 막는 ‘오락’을 즐기고 싶어 했고, 그렇기에 파그마와 뜻이 일치하여 파그마와의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었단 뜻이야?”

[맞다.]

즉, 바알은 동족에게 크고 영롱한 엿을 선사했다는 말이다.

그리드로서는 바알이라는 놈이 도통 이해가 안 됐다.

어리둥절해하는 그에게 브라함이 피식 웃었다.

[악마라는 편견을 갖고 보지 마라. 동족을 배반하고 해치는 것은 너희 인간 또한 마찬가지로 자행하는 일이 아니더냐?]

“하지만 바알은 지옥의 주인이라며? 대악마들의 왕이라는 뜻 아니야? 왕이 단지 유흥을 위해서 신하들을 처단하는 경우는 없…지는 않았으려나.”

떠올려보니, 세상엔 미친놈들이 참 많다.

납득한 그리드가 바알을 악마계의 사이코패스로 정의했다.

“음… 그래, 번헨 열도가 어째서 이렇게 변하게 됐는지, 그 경위는 이제 잘 알겠어.”

그렇다면 다음 단계의 의문이 생긴다.

파그마는 왜 번헨 열도를 이 상태로 방치한 걸까?

대악마와 계약한 대가로 번헨 열도를 지켰다고는 하지만, 결국 번헨 열도는 변질되었고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이다.

파그마가 진정으로 번헨 열도를 지키고 싶었다면, 대악마들을 격퇴한 이후 이곳을 본래대로 되돌려놓아야 함이 옳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대악마들의 재침공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어서?’

혹은, 파그마에게는 더 이상 힘이 남아있지 않았던 걸 수도 있다.

그리드가 질문을 던졌다.

“악마와 계약한 파그마는 번헨 열도를 지킨 이후 어떻게 됐지? 역시, 죽지는 않았겠지? 아직 살아있겠지?”

[어째서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지존급 대악마와 계약했으니까 초월적인 존재가 되어서 수명이 늘어났다거나?”

[그것 참 말도 안 되는 개념이로군. 악마가 인간과 계약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계약자의 생명력과 영혼을 취하기 위함이니 계약 대상은 도리어 단명함이 옳다만.]

“뭔가 이상한데? 파그마는 오래 살았잖아? 수백 년을 살았다며? 대악마랑 계약한 덕분이 아니었어?”

[너는 뭔가를 착각하고 있구나. 파그마가 바알과 계약한 시점은 300년 전이 아니라 100여 년 전이다.]

“…아!”

불과 200년 전까지만 해도 번헨 열도는 멀쩡했었다던 스틱세이의 말을 그리드가 뒤늦게 상기했다.

여기서 또 새로운 의문이 생긴다.

“그럼, 파그마가 수백 년을 살아있을 수 있던 것과 악마와의 계약은 무관하다는 뜻이네?”

그렇다면 파그마의 정체가 뭐란 말인가?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었던 거지?”

[…]

대답하지 않고 침묵하는 브라함으로부터 다시금 분노가 전달되어 왔다.

그에 흠칫 놀란 그리드의 등골이 식은땀으로 젖는 순간, 브라함이 침묵을 깨뜨렸다.

[파그마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 동안 살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내 수명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뭐?”

이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린지 이해가 안 간다.

분명, 브라함은 뱀파이어 출신이다.

수명이 인간과는 달리 무한에 가깝고 그 수명을 누군가에게 전이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 인간이 아닌 존재인데다가 전설의 대마법사이니만큼 상식적이지 않은 일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브라함은 수명을 ‘빼앗겼다’고 표현했다.

“수명을 당신의 의지로 준 것도 아니고 빼앗겼다? 당신과 파그마는 막역한 사이였다면서, 그건 또 무슨 경우지?”

[내가 속고, 배신당한 경우이지 뭔 경우겠느냐.]

“…”

자세한 이야기가 듣고 싶다.

그리드는 갈망했지만 브라함은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뭐, 파그마에 대해서 보다 더 잘 알고 싶다면 마지막 섬까지 도달하면 될 일이다. 예순한 번째 섬으로 이동해라. 그리고 파그마와 너의 실력차이를 체감한 후 언제쯤 다시 도전해도 좋을지 가늠해보도록 해.]

도대체 60번대 섬들엔 무엇이 있기에, 브라함은 내가 극복할 수 없으리라 단정 짓는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짓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이 이죽거렸다.

[이곳을 공략하는 건 너의 의무이니, 혹시라도 포기할 생각은 마라.]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포기할 생각은 없어. 다만, 대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다소 걱정될 뿐이야.”

[불사의 몸을 지녔으면서도 겁을 내는가. 누차 말했던 대로 일단 도전해봐라.]

브라함의 말이 옳다.

현재의 번헨 열도는 파그마와 관련이 깊은 장소인 바, 필시 <파그마의 후예>와 관련 된 퀘스트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드는 반드시 공략해야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에 앞서서 대략적으로나마 이 섬을 파악해두고 싶었다.

“좋아.”

마음을 단단히 먹은 그리드가 61번째 섬으로 향하는 게이트 앞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여태까지 그를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스틱세이가 다급히 불러 세웠다.

“브라함은 마족입니다. 현혹되어선 안 됩니다.”

“엘프와 마족이 앙숙관계라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냉정해지지 그래? 이곳 번헨 열도가 정화되길 누구보다도 염원해온 사람이 바로 당신이잖아? 나 또한 이곳을 공략하는 대가로 얻을 수 있는 보상을 원하는 입장이니까 우린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어.”

“…”

옳은 말이다.

브라함이라는 존재에게 현혹되어 있던 건, 이제 보니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깨달은 스틱세이가 그리드의 뒤를 따랐다.

***

[예순한 번째 섬에 입장하였습니다.]

쿠오오오오오-

불길에 지배당하고 있는 섬이었다.

울창한 산림이 실시간으로 타오르고 있었고, 그 아래 흐르는 강물은 불빛에 반사되어 불길한 적색을 띄었다.

[온도가 매우 높은 지역입니다.]

[더위를 먹습니다.]

[생명력과 스태미나가 지속적으로 소모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전설 패시브가 사기는 사기야.’

Satisfy는 오감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다.

플레이어는 당연히 더위와 추위를 느꼈고, 때때로 기후는 플레이어에게 큰 재앙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한 이후 더위와 추위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늘 적절한 체온을 유지할 수 있었으므로 남들보다 훨씬 더 쾌적한 환경에서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었다.

“헉헉…”

상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리드와 달리, 그의 곁에 선 스틱세이는 개처럼 혀를 쭉 내민 채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명색이 현자라면, 더위에 대항할만한 수단을 신속하게 강구해야하는 거 아닌가?”

“몇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재료가 없어서…”

“마법을 활용하면?”

“심장병 때문에 마나를 운용하기가 어렵습니다…”

“…”

제발 죽지만 말아다오.

무려 현자인 스틱세이를 로드의 가정교사로 점찍은 그리드가 속으로 바란 뒤 앞으로 이동했다.

‘몬스터도 없고, 미션도 없네.’

여태까지 섬들과는 형식 자체가 다른 듯하다.

“…”

고요히 타오르는 섬을 가로지르면서 좌우를 살피는 그리드, 숨조차 죽이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한 태도다.

갑작스러운 적의 습격에 대비하고자 극도로 집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항거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적 앞에서는 아무리 신중해봤자 무의미한 법이다.

저벅저벅.

점점 더 거세지는 불길에 집어삼켜진 숲 속으로부터 들려오는 발소리, 여유롭고도 당당하다.

발소리의 주인은 그리드에게 자신의 위치가 발각되더라도 전혀 괘념치 않는 듯했다.

‘누구냐.’

불타는 섬을 지키고 있는 망령의 정체를 보고자,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그리드.

그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새카만 연기가 한치 앞조차 볼 수 없게끔 방해하는 까닭이었다.

‘갑자기 연기가 짙어졌다?’

저벅저벅.

발소리는 계속해서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급히 무기를 꺼내 쥔 그리드가 <마력 탐지(강화)>Lv.2를 발동, 적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려다가 경악했다.

[생명체가 감지되지 않습니다.]

‘뭐?’

발소리가 어느덧 지척에서부터 들려오고 있건만, 생명체가 감지되지 않는다고?

그리드는 당황하면서도 발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이야루그트를 휘둘렀다.

하지만 연기. 아니, 단순히 연기라고 치부하기에는 보다 어두운 것에 시야가 가려진 까닭에 표적을 제대로 노릴 수가 없었다.

푸욱-!

[50,04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커억…!”

어느새 뒤로 이동한 걸까?

본래라면 내 좌측 전방에 있었어야할 적이 순식간에 뒤로 나타나 단도를 찔러왔다.

그 일격에 3분의 2가 넘는 생명력을 잃어버린 그리드의 동공이 동요로 흔들렸고,

[그렇군. 수문장은 란스티어인가.]

브라함은 다시금 연기 속으로 모습을 감춘 적의 정체를 꿰뚫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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