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0권 - 3화
‘뭐, 후로이님이라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가지만.’
웅변가라는 클래스의 전투 능력은 최악이므로 후로이가 과거에 겪었던 시련은 난이도가 낮았을 가능성이 높다.
세컨드 클래스를 획득한 이후 쭉 성장해온 지금의 후로이라면 과거의 시련을 극복하는 게 어렵지 않은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유라님과 지슈카님은 경우가 달라.’
천재 중의 천재라고 불리는 그녀들이다.
과거의 그녀들을 좌절시킨 시련의 정도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었다.
한데 그녀들은 당최 무슨 수로 서른한 번째 섬을 돌파한 것일까?
‘애초에 너무 뛰어나서 시련을 겪은 적이 없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리미트를 해제한 이 몸과 비견될 정도로 대단하군.’
라우엘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보는 사이, 다른 템빨단원들은 안개 섬에서 구입한 물품들을 서로 비교해보고 있었다.
“난 민첩의 엘릭서 5개와 레어 스킬북 1개를 구입했다.”
“후후훗, 나는 체력의 엘릭서 13개를 사먹었지. 나도 이제 점점 탱커로서의 자격을 갖춰가고 있다고.”
“와, 페이커랑 반트너 대박이네.”
“부럽다… 나는 안개 섬을 너무 빨리 맞닥뜨려가지고 엘릭서 4개밖에 못 샀는데.”
“나는 서른한 번째 섬까지 가면서 안개 섬 아예 못 봤다. 뜨질 않아, 짜증나게.”
“나도…”
번헨 열도의 안개 섬 시스템은 순전히 운이었다.
무작위로 출몰하는 그 섬은 너무 빨리 나타나도, 너무 늦게 나타나도 문제였기 때문에 활용하기가 썩 쉽지 않았다.
“그리드가 걱정이군.”
“…그러게.”
세상 사람들은 그리드가 굉장히 운 좋은 인물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당연한 것이, 그리드는 최초의 레전드리 클래스 전직자가 아닌가?
사람들은 그리드가 전생에 나라를 구한 인물일 거라고 추측할 정도로 그리드의 행운력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템빨단원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드는 결코 운이 좋지 않다. 도리어 행운의 여신에게 버림받은 것은 아닐까 의문이 생길 지경이다.
“전설의 대장장이인데도 운 나빠서 전설급 아이템 못 만드는 그리드라면…”
“만에 하나 번헨 열도를 완전히 클리어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안개 섬을 못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
템빨단원들은 진심으로 걱정하였고, 라우엘은 가슴이 아플 따름이었다.
‘평소처럼 재수 없는 결과가 나올지라도 멘탈 챙기십시오, 주군.’
***
번헨 열도.
‘여긴 또 뭐지?’
쉰여섯 번째 섬에 입장한 그리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눈앞에 2개의 동굴이 존재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왜 1개도 아니고 2개야?’
설마 둘 다 공략하라고?
‘딱 봐도 둘 다 규모가 장난이 아닌데.’
쉰다섯 번째 섬부터 400레벨대의 몬스터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만약 눈앞의 초대형 동굴들 속에도 그만한 괴물들이 서식하고 있다면, 그리드로서는 도통 도전할 엄두가 안 났다.
‘레벨 차이 때문에 딜도 안 박히는 놈들을 상대하면서 이만한 동굴들을 공략하려면 한 세월이 걸릴 테지…’
단계가 높아질수록 번헨 열도의 난이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는 중이다.
그에 대한 반동으로 자신감이 하락한 상태인 그리드의 시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미션이 생성됩니다!]
<쉰여섯 번째 섬>
미궁을 돌파하라!
최초 클리어 보상:도전자 포인트 2,150개. <보물 섬>에 3분 동안 입장 가능.
‘보물 섬!!’
어깨를 늘어뜨린 채 한숨 쉬던 그리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보물 섬이라니, 이름부터가 환상적이군!’
이곳 번헨 열도는 전설들의 업적을 기리던 장소이다.
어떻게 보면 대륙 전체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곳에 숨겨진 보물 섬이라면, 단언컨대 어마어마한 보물들이 매장되어 있지 않을까?
‘만약 아다만티움을 구할 수만 있다면 정말로 초대박인데.’
그리드가 교황 드레비고를 레이드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쭉 사용해오고 있는 <성스러운 빛의 무구 세트>의 재료가 바로 신의 광물 아다만티움이다.
아다만티움으로 아이템을 창조, 제작할 경우 어마어마한 무구를 탄생시킬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그리드에겐 있었다.
“좋아… 도전해 보자.”
의욕을 되찾은 그리드가 2개의 동굴 입구 앞까지 바짝 다가갔다.
그와 동시에 그리드의 몸이 석상처럼 굳어졌다.
‘어? 안 움직여?’
상태이상과는 다른, 절대적인 개념이다.
손 끝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굳어선 그리드의 시야로 선택지가 떠올랐다.
[왼쪽 동굴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오른쪽 동굴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아…!’
섬에 입장한 순간부터 이미 미궁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선택지 이외의 방향으로는 이동할 수 없게끔 강제력이 부여된 거고.
‘변수는 없다, 이건가.’
그리드가 등 뒤로 시선을 돌렸다.
‘미궁 공략은 어떻게 해야 되지?’라고, 현자 스틱세이에게 묻기 위함이었는데 어째 말문이 열리질 않았다.
‘행동뿐만이 아니라 주둥이까지 봉인 시키다니…’
봉인당한 건 스틱세이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리드처럼 멀뚱멀뚱 서있을 뿐이었으니까.
‘이거 참 난처한데.’
그리드에게는 미궁을 체험한 경험이 없다.
구조가 복잡하고 함정이 득실거리는 미궁의 클리어 난이도는 무척 높았기 때문에 애초에 도전 자체를 해보질 않았다.
즉, 미궁을 돌파할만한 노하우가 그리드에게는 없다는 뜻이다.
그리드는 눈앞이 캄캄했다.
‘결국은 도박인가.’
한참을 고민한 끝에, 그리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선택한 방향은 오른쪽 동굴이었다.
그 결과,
‘이런 미친!’
오른쪽 동굴에 들어오자마자 그리드는 자동반사적으로 욕설을 지껄였다.
욕이 나오는 게 당연했다.
눈앞에 무려 6개의 갈림길이 펼쳐졌으니까!
‘이건 찍어서 돌파할 수준이 아닌 거 같은데?’
이 초대형 미궁을 통과하기까지 얼마나 큰 시간을 소요해야할지, 그리드는 감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국가대항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통과하지 못할 수도…?’
실로 최악. 절망적이다.
하지만 그리드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동화.’
스르륵-
그리드의 머리가 눈처럼 하얗게 물들고 두 눈은 홍옥처럼 빛났다.
현자의 지혜를 빌리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보다 몇 수나 위인 지공(智公)의 지혜를 빌리면 될 일이다.
차츰 다재다능해지고 있는 그리드의 위엄이었다.
“호오, 이 몸의 지혜를 활용할 생각을 다 하다니, 제법이로구나.”
그리드를 치하한 브라함이 <마력 탐지(강화)>를 사용, 여섯 갈래 길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악의적인 기운이 감지되는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숨어있던 몬스터를 처리하고 새로운 갈림길 앞에 선 브라함이 그리드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미궁이란 한 번 발을 들인 자를 놓치지 않으려는 습성을 지녔다. 출구와 근접한 곳일수록 보다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게 섭리이지. 마력 탐지를 활용해서 천천히 이동해라.”
동화의 지속 시간은 3분.
그리드에게 정녕 큰 가르침을 준 브라함이 다시 잠들어버렸다.
흑발로 되돌아온 그리드의 만면에는 미소가 번져있었다.
‘고맙다, 브라함.’
덕분에 미궁을 돌파할 힌트를 얻었을 뿐더러 새로운 마법을 익혔다.
<마력 탐지(강화)>Lv.1
전설의 대마법사가 발동 공식을 완전히 뒤엎어 버린 마력 탐지입니다.
대량의 마나를 전 방위에 방출하여, 반경 10미터 이내에 존재하는 생명체의 위치를 파악합니다.
마법의 레벨이 오를수록 마법의 영향범위가 확대되며 감지하는 대상의 정보까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원 소모:마나 3,000
캐스팅 대기 시간:6초
재사용 대기 시간:10분
‘브라함의 조언대로 이걸 사용해가면서 이동하면…’
파아아앗-!!
이번엔 여덟 개의 갈림길 앞에 서게 된 그리드가 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마력 탐지를 사용했다.
그리드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마나가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찾았다!’
8개의 갈림길 중 1개의 길 끝에서 가장 강력한 기운이 느껴진다.
몬스터라고 확신한 그리드가 그곳을 향해서 이동했다. 그리고 갓 핸드와 노에, 랜디를 소환하여 전력으로 전투에 임했다.
“허억… 허억…”
미궁에 출몰하는 몬스터들의 레벨은 400~410이었다.
306레벨인 그리드와 레벨 차이가 워낙에 큰 탓에 데미지가 제대로 박히질 않았고, 반면 그리드는 한 번이라도 공격을 허용했다간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말았다.
그리드는 몬스터 무리와 조우할 때마다 마치 보스 레이드를 하는 심정이었다.
‘근데 문제는 몬스터가 아니야.’
마력 탐지의 재사용 대기 시간은 10분.
브라함의 부츠를 착용하여 재사용 대기 시간을 20퍼센트 감소시킨다고 해도 8분이다.
결론적으로 그리드는 8분에 한 번씩만 미궁을 이동할 수 있었다.
‘이래서야 어느 세월에 이 미궁을 돌파하지?’
눈앞이 캄캄하다. 심리적으로 매우 지친다.
하지만.
‘계속 간다.’
노가다란 그리드에게 익숙한 분야다.
그리드의 지독한 근성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
7대 길드의 일각을 담당하는 <야크 길드>의 마스터, 부바트.
그는 통합 랭킹 53위의 하이랭커다.
과거, 25위 랭커였던 시절과 비교하면 다소 초라해졌지만 그 누구도 부바트를 예전보다 못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과감한 결단력과 강력한 CC기, 그리고 탱킹력까지 겸비한 그는 여전히 Satisfy 최강의 이니시에이터로 손꼽혔으니까.
부바트가 선두에서 전투를 개시할 때면 항상 아군에게 유리한 전황이 설계됐다. 오죽하면 별명이 ‘약속된 승리의 야크’이겠는가.
하지만 국가대항전 당시 부바트는 무력했었다. 명성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여 자국민들을 실망시켰다.
유달리 컨디션이 안 좋았기 때문에?
아니다.
유라와 그리드를 연달아 만난 탓이다.
유라의 경우 뛰어난 피지컬로 CC기를 무력화시켰고, 그리드의 경우 CC기 자체를 저항하였기에 상성이 매우 나빴다.
부바트는 그들로부터 항거할 수 없는 좌절감을 맛봐야만 했다.
“하지만 이번 국가대항전에서 좌절감을 맛보게 될 사람은 내가 아니다.”
300레벨을 돌파한 이후 부바트는 많은 타격 스킬들을 습득하게 되었다.
CC기에만 의존했던 과거와 달리, 적절한 딜량까지 뽑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부바트의 근본은 탱커인 바!
“국가대항전 밸런스 패치의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이 나라고 할 수 있지! 후후훗!!”
그리드의 레전드리 스킬들?
데미지가 50퍼센트 감소 된 상태로 들어온다면 몇 번이고 맞아줄 자신이 있다.
그리고 전투를 장기전으로 이끌어나갈 수만 있다면, 극강의 스태미나를 기반으로 결국엔 그리드를 박살낼 자신도 있었다.
“과거의 치욕을 갚아줌과 동시에 내 조국 터키에 금메달을 안겨주겠습니다.”
“와아아아아아!!”
선언하는 부바트를 보면서 터키 국민들이 환호했다.
지금 이 순간.
그리드는 비단 부바트 뿐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의 국가대항전 참가자들로부터 만만한 취급을 받고 있었다.
단 하나의 패치가 사람을 호구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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