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9권 - 21화
“빌어먹을!!”
랭킹 3위 크리스의 자존심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무려 20억 유저 중 세 손가락에 꼽히는 실력자이니만큼, 자존심이 낮다면 도리어 이상했다.
크리스가 살면서 한 수 접어두고 마주했던 인물이라고는 여태껏 크라우젤과 그리드밖에 없었다.
크라우젤의 경우 경이적인 레벨 업 속도와 피지컬에 압도당했었고, 그리드의 경우 전설의 대장장이이니만큼 꼬랑지를 내리는 게 현명했다.
말인 즉,
‘내가 지발 따위에게 놀아나다니.’
크리스는 크라우젤과 그리드를 제외한 모든 인물을 자신보다 한 수 아래로 인식하고 있었다.
지발이 자신보다 늘 레벨이 1 높고 피아로와 호각을 겨뤘다고는 하나, 크리스가 주관적으로 분석해 봤을 때 지발은 정치력만 높은 인물이지 그 외엔 별로 볼품이 없었다. 종합해보면 자신보다 아래가 맞았다.
한데 그런 놈에게 놀아난 것이다.
7대 길드의 수장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당시, 지발이 제기한 의심으로 인해 목이 날아갈 뻔했던 크리스의 자존심은 크게 손상되고 말았다. 지발에게 반드시 본때를 보여주지 않는 이상 다시금 수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마음 같아서야 지발과 스네이크 길드를 완전히 박살내버리고 싶지만.’
크리스가 이끄는 자이언트 길드, 과거에는 최강이라 자부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아니다. 라인하르트 골렘 침공전 당시 큰 타격을 입은 뒤로 쭉 하락세였다. 이제는 7대 길드 중 세손가락에 꼽히면 다행인 수준으로 전력이 약화됐다.
이 상황에서 스네이크 길드와 충돌해봤자 무조건적인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또한, 7대 길드의 다른 길드들이 스네이크 길드와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였다.
만약 크리스가 스네이크 길드와 척을 졌다가는 자이언트 길드 전체가 고립되는 수가 있었다.
결국 크리스의 선택지는 하나였다.
‘국가대항전을 노리는 수밖에 없다.’
국가대항전에서 지발과 수에론을 비롯한 7대 길드 놈들을 만난다면.
‘짓밟아주마.’
꽈드득!
다짐하며 이를 가는 크리스, 비록 어떤 농부에게는 패배한 전력이 있다지만 독보적인 강자 중 하나다.
그의 가장 큰 강점?
레벨도, 컨트롤 솜씨도, 템빨도 아니다.
무려 유니크 등급의 세컨드 클래스 <폭군>.
그것이야말로 크리스의 가장 큰 무기였다.
그만큼 세컨드 클래스란 위대한 개념이었다.
한 명의 유저가 2개의 직업을 갖는 셈이었으니 그 효과와 장점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
최초의 세컨드 클래스, <정의의 사도의 파트너>를 얻기 전까지 후로이의 전투력은 최악이었다.
무기라고는 책밖에 장착할 수 없었고 뚜렷한 공격 스킬 없이 오로지 말빨로만 승부를 봐야하는 게 바로 웅변가였던 까닭이다.
과거의 후로이는, 어떤 시련을 겪을 때마다 오로지 자신의 주둥이만을 믿어야 했었다.
“허억… 허억…”
번헨 열도, 31번째 섬.
73레벨 웅변가 시절로 회귀한 후로이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극강의 공격력과 민첩성을 자랑하는 85레벨 몬스터, 회색갈기 늑대 13마리에게 둘러싸인 것이다.
‘과거의 시련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섬이라니.’
후로이는 절망스러웠다.
하필이면 세컨드 클래스를 획득하기 전으로 회귀하여 검을 다룰 수가 없었고, 전반적인 능력치가 최악인지라 당최 이 위기를 어찌 넘겨야할지 엄두가 안 났다.
‘주군께서는 이와 같은 시련을 어찌 이겨내신 걸까.’
후로이는 새삼 그리드를 대단하다 느꼈다.
‘과연 내가 충성을 다 바쳐도 아까울 게 없는 분.’
꽈악!
이를 악 문 후로이가 용기를 냈다.
그리드의 오른 팔로서 부끄럽기 싫어서라도, 후로이는 작금의 시련을 반드시 극복하고 싶었다.
하여 늑대들에게 입을 놀렸다.
“니들 어머니 여우!”
“……!”
늑대인 우리를 낳은 어머니가 늑대가 아닌 여우라니?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다.
“아우우우우우!!”
“컹! 컹컹!!”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늑대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고, 흥분한 놈들을 상대로 후로이는 연신 독설을 날려 정신적 충격을 입혔다.
“니들 아버지 갈기 노란색!!”
“니들 생긴 거 완전 개!!!”
“니들 조상님 내 육포!!!!”
듣는 이의 눈살을 찌푸려지게 만드는, 실로 저열한 진흙탕 싸움이었다.
***
“허허.”
국가대항전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시점.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한동안 랭커들을 모니터링하지 못했던 임철호 회장이, 그리드가 41번째 섬을 공략했던 시점의 녹화 영상을 뒤늦게 시청한 후 너털웃음 흘렸다.
그리드의 성장에 감회를 느껴서?
아니, 그런 게 아니다.
그리드의 성장이야 늘 꾸준히 진행되어왔던 일이니 이제와 새삼스럽지 않았다.
지금 임철호 회장이 주목하는 부분은 흑화 상태로 사망한 분신의 행보였다.
“본래는 사망과 동시에 소멸했어야할 분신이…”
하필이면 흑화 상태로 죽어 지옥으로 추락, 그리드와는 완전히 별개의 독립적인 개체가 되어버렸다.
“저건 버근가?”
임철호가 Satisfy의 창조자라고는 하나 모든 시스템을 혼자서 구축한 것은 아니다.
오류를 최소화시키고 보다 방대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 임철호는 Satisfy의 전반적인 운영을 슈퍼컴퓨터 모르페우스에게 맡겨놓은 상태였다.
흑화 상태가 끝났음에도 불구, 인간계로 되돌아가지 않고 지옥에 머무는 그리드의 분신을 확인하고 의문을 느낀 임철호.
그에게 모르페우스가 설명했다.
[버그가 아닙니다. Z10B005는 플레이어가 아니고 이에 따라서 흑화와 지옥의 규칙을 적용받지 않을 뿐입니다.]
“흐음… 이거 상황이 재미있게 됐군.”
아직은 숨죽이고 있던 지옥이 그리드 분신의 등장으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지옥에는 어떤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닥치게 될까?
또한 그리드의 분신은 독립적 개체로서 어떻게 성장해나갈까?
임철호 회장은 무척이나 흥미롭고 기대가 되었다.
***
[쉰 번째 섬에 입장하였습니다.]
[세이브 포인트가 있습니다. 등록하시겠습니까?]
[등록되었습니다. 이후 번헨 열도에 입장 시, 쉰 번째 섬부터 시작합니다.]
41번째 섬에서 큰 역경을 맛봤던 그리드지만, 이후에는 승승장구하여 단 보름 만에 50번째 섬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썩 여유 있는 기색은 아니었다.
“무슨 몹들 레벨이 360이 넘어.”
섬의 단계가 높아질수록 몬스터들의 레벨 또한 같이 올라갔다.
49번째 섬을 기준으로 몬스터들의 평균 레벨은 360~370.
그리드보다 최소 55나 높았다.
기본 능력치가 무척 뛰어나고 회피력도 좋아, 제아무리 그리드라도 놈들을 쉽게 해치우기란 어려웠다.
혼자서 최대 5대1이 가능한 정도?
305레벨 주제에 360레벨 몬스터와 혼자 5대1로 싸워 이기다니, 일반적인 랭커들의 관점에선 어처구니가 없어 할 말을 잃을 정도로 대단한 활약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영 만족스럽지 못했다.
몬스터가 강하면 강할수록 사냥 속도가 느려지는 까닭이었다.
“이래서야 국가대항전 전까지 번헨 열도를 다 공략할 수 있을지 의문이군.”
국가대항전까지 현실 시간으로는 한 달, Satisfy 시간으로 약 90일밖에 남지 않았다.
이렇게 계속 난이도가 높아져서야 66번째 섬까지 제때 공략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사냥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슬슬 안개섬이 나와 줬으면 하는데.”
그리드가 모은 도전자 포인트는 어느덧 18,851.
웨폰 마스터리 스킬북을 구매하고도 엘릭서를 51개 더 구매할 수 있을 정도의 포인트다.
‘엘릭서 51개.’
무려 51레벨의 가치다.
웨폰 마스터리를 습득하고 엘릭서를 구매할 수만 있다면, 그리드는 번헨 열도의 몬스터들을 보다 수월하게 사냥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근력과 민첩성의 비율을 1대1로 만드는 것도 가능해진다.’
피아로의 능력치 분배를 카피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드는 근력과 민첩성의 비율을 1대1로 맞출 경우 반드시 더 강해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피아로를 따라하는 거니까.’
Satisfy가 오픈하고 지금까지, 그리드가 만나온 수많은 사람 중 피아로는 세 번째 강자였다. 뱀파이어 공작 마리로즈와 전설의 대마법사 브라함 다음가는 존재였으니만큼 그의 스탯 분배를 카피하면 강해지는 게 인지상정일 터였다.
“후후훗!”
따앙! 따앙!!
번헨 열도를 공략하는 과정에 내구력이 크게 손상 된 아이템들을 수리하는 그리드의 입가로 연신 미소가 번졌다.
안개섬까지 도달하여 그간의 노고에 대해 보상 받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절로 행복한 그리드였다.
그렇다.
그리드는 또 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바라는 일이 제대로 풀리는 경우가 적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
[쉰한 번째 섬에 입장하였습니다.]
[미션이 생성됩니다!]
<쉰한 번째 섬>
20분 내에 골든 크라운 10마리를 처치.
최초 클리어 보상:도전자 포인트 1,900
‘골든 크라운?’
고레벨 몬스터들은 그리드에게 생소한 존재였다.
골든 크라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리드는 이름조차 처음 들었다.
“이번엔 또 얼마나 골치 아픈 녀석이려나.”
엄살을 피우는 것과 달리, 그리드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그리드는 극강의 공격력을 자랑하는 바, 타임어택 미션에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끼릭. 끽.
사방에 암벽이 솟아있는 작은 섬.
골든 크라운이라는 몬스터를 찾기 위해서 플라이를 전개하려던 그리드가 행동을 멈췄다.
비교적 가까운 장소로부터 정체불명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흑청색 <그리드의 대검>을 꺼내 무장한 그리드가 다가올 위험에 대비하는 그 순간,
“캬아!!”
머리에 황금 왕관을 얹어 쓴 괴물 한 마리가 암벽 위에서부터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휘두르는 몽둥이가 크고 묵직했다.
쩌엉!
대검을 수평으로 만들어 몽둥이를 막아낸 그리드의 신형이 잠시 앞으로 쏠렸다.
‘더럽게 세네.’
위력이 장난 아니다. 거의 스킬급 평타다.
정통으로 얻어맞았다간 최소 6천 이상의 피해를 입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잡몹이 아무리 세봤자.”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한 이후, 유독 강적들을 많이 만나온 그리드다. 일반적인 몬스터를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강했다.
“파그마의 검무.”
채챙!!
전진하는 살(殺)의 검무를 응용, 골든 크라운이 휘두르는 몽둥이를 막아냄과 동시에 거리를 좁힌 그리드가 일격을 꽂아 넣었다.
“살(殺)!”
푸욱-!!
혈관이 울퉁불퉁 솟아있는 녹색 피부의 괴물, 골든 크라운.
놈의 심장에 흑청색 대검이 정확하게 꽂혔다.
한데.
[대상에게 1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엥?”
그리드가 두 눈을 의심하였고,
“캬오오!!”
콧방귀 뀐 골든 크라운이 그리드에게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쩌정! 쩌저정!!
예상치 못한 상황은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법이다.
자신이 자랑하는 스킬의 데미지가 대상에게 박히지 않을 경우,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은 혼란을 느끼고도 남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의외로 변수에 강했다.
‘내가 이딴 엿 같은 일 한 두 번 겪냐.’
쩌저저저정!!
대검과 몽둥이가 충돌할 때마다 발생하는 귀를 찢는 굉음.
암벽 사이를 메아리치는 그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그리드는 침착했다. 발달한 사고력을 활용, 골든 크라운의 맹점을 찾고자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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