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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215화 (210/1,794)

템빨 19권 - 20화

‘정말로 길었다.’

마흔한 번째 섬에서만 장장 5일 가까이 발이 묶여있었다.

그리드가 일반적인 상식을 지닌 플레이어였다면, 마흔한 번째 섬의 공략은 새로운 스킬들을 습득한 시점에서 만족하고 포기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게 정상이다.

세상의 어떤 플레이어가 죽음을 불사해야하는 코스에 반복적으로 도전할 수 있겠는가?

10만 명 중 채 1명도 없을 것이다. 고레벨 플레이어일수록 더욱 더 몸을 사릴 테고.

한데 그리드는 일반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부족한 재능을 극복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비상식적인 끈기를 보유한 인물이다.

그리드에게 있어서 포기란 기피해야하는 개념이었고, 이는 그가 이름난 천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다.

“뭐, 예상했던 것보단 빨리 끝나게 됐군.”

알쏭달쏭 도리깨의 효과가 초장부터 제대로 터질 줄은 몰랐다. 몇 번이나 죽기를 반복해야지만 이룰 수 있는 성과일 줄로만 알았다.

한데 첫 번째 싸움부터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 내다니, 진심 최고다.

‘신에게도 양심이라는 게 있는 거겠지.’

매번 불운을 안겨주는 게 미안해서라도, 가끔씩 이런 행운을 터뜨려주는 게 아니겠는가?

씨익!

미소를 머금은 그리드가 <그리드의 대검>으로 스왑한 후 분신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갔다.

불사 상태에 돌입해 있는 분신에게 말이다.

명상을 경계하는 행동이었지만 분신의 입장에선 도리어 고마웠다.

“파그마의 검무, 연살파(聯殺派).”

쿠콰콰콰콰콰쾅!!

유려하면서도 패도적인 검무가 펼쳐짐과 동시에 여덟 줄기의 검기 폭풍이 그리드에게 쇄도했다.

그리드는 앞서 불사 패시브를 잃은 바, 분신은 자신이 유리한 5초 동안 승부를 볼 요량이었다.

그리드가 예상한 바였다.

“파그마의 검무, 연살파(聯殺派).”

최고의 인공지능을 보유한 분신과 비교하면 스킬 전개 속도가 다소 느린 그리드.

본래라면 분신과 동시에 연살파(聯殺派)를 전개한다는 것, 그로서는 어려운 일이었으나 ‘예측’의 힘은 대단했다.

분신이 연살파(聯殺派)를 사용하리라 미리 예상하고 검무를 밟고 있던 그리드가 분신과 동시에 연살파(聯殺派)의 전개에 성공한 것이다.

콰콰콰콰콰콰콰쾅!!

검기의 폭풍이 서로를 집어삼키며 강력한 충격파가 발생했다.

대지가 격동하고 해수면이 들썩였다.

“노에! 랜디!”

“냐앙!”

“응!”

섬을 집어삼킬 기세로 밀려오는 해일을 등진 분신.

그를 향해 노에와 랜디가 동시에 날아들었다.

랜디는 연(聯)을 전개하였고 노에는 주둥이를 벌려서 분신의 발을 묶음과 동시에 스탯을 빼앗아 오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쉽게 당할 분신이 아니다.

“흑화, 대장장이의 분노, 신속한 몸놀림.”

퍼엉!!

그리드와 달리 버프 스킬들을 사용하지 않았던 분신, 칠흑의 마기를 폭발시키면서 광속으로 이동, 노에와 랜디를 뿌리치더니 나아가 그리드에게 타격을 입혔다.

“큭…!”

실로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이다.

분신의 이야루그트에 심장을 꿰뚫린 그리드가 휘청거렸다.

때마침 밀려온 해일이 그리드와 분신을 동시에 덮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콤보를 허용했을 수도 있다.

콰콰쾅!!

해일에 휩쓸린 그리드와 분신이 섬 외곽까지 떠밀려갔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그리드의 부츠>를 <파그마의 부츠>로 스왑, 플라이를 전개하여 바다를 빠져나왔다.

“허억… 허억…”

흠뻑 젖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리드는 웃었다.

반면 분신은 초조한 기색을 드러냈다.

불사의 남은 시간이 2초도 채 되지 않은 까닭이다.

“매직 미사일.”

퍼퍼퍼퍼펑!

짝퉁 갓 핸드 4개를 모조리 소환한 분신이 그리드에게 4줄기 섬광을 발사했다. 동시에 자신은 초연(超聯)의 검무를 펼쳤다.

여기서 그리드가 선택한 대응은 의외로 회(回)였다.

먼저 사용하면 무조건 불리한 회(回)를 어째서?

분신은 의아해하면서도 똑같이 회(回)를 전개하고자 했다.

한데 그 순간,

퍼-엉!

“…!!”

되돌아오는 초연(超聯)에 신경을 쏟고 있던 분신의 턱을 한 줄기 섬광이 강타했다.

어디서부터 날아온 공격인가?

밑이다.

공중의 그리드와 분신이 발아래 두고 있는 바다.

그 속에서부터 날아온 매직 미사일이었다.

해일에 휩쓸렸을 당시, 그리드는 갓 핸드 중 하나를 바다 속에 대기시켜놓았다가 지금 이 순간 분신의 허를 찌른 것이다.

“크윽…!”

분신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피를 토하는 안색이 창백하다.

분신의 입장에선 작금의 사태가 믿기지 않았다.

지형을 활용해서 아이템을 배치시킨 후, 스킬을 시선 끌기 용도로 사용하고 허점을 찌르다니?

그리드라는 인물이 설마 이런 고난이도의 수법으로 자신을 위협할 줄이야, 분신은 황당할 따름이었다.

“내가 좀 성장했지? 다 네 덕이다. 나를 발전시키느라 수고 많았다.”

그리드가 이죽였고,

“크아아아악!!”

분노에 찬 비명을 내지른 분신이 그대로 잿빛으로 산화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마흔한 번째 섬의 공략에 성공하였습니다!]

[미션 클리어 보상으로 <스킬 레벨 포인트> 1개를 획득하였습니다!!]

마흔한 번째 섬에서 그리드가 잃은 것, 무려 61.2퍼센트의 경험치이다.

레벨 하락을 겪고 305레벨이 된 그리드의 기준으로, 61.2퍼센트의 경험치를 복구하기 위해선 최소 20일 가까이 사냥만 해야 했다.

시간적 손실이 엄청나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손해라고 생각지 않았다.

최강의 스킬 연살파(聯殺派)와 극살(極殺)을 습득하였을 뿐더러 농후한 전투 경험을 쌓을 수 있었으니까.

“아주 좋아.”

레벨의 개념을 초월하는 강함을 손에 넣었다.

만족하며 미소 짓는 그리드의 얼굴에서 엿볼 수 있는 건 숭고한 자부심이었다.

기쁨에 전율하는 그의 시야로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또 하나의 한계를 극복하고 전설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파그마의 후예>의 히든 피스, <봉인 된 능력> 중 하나를 획득합니다.]

[패시브 스킬 <대장장이의 눈>을 습득하였습니다.]

그리드가 여태까지 획득한 히든 피스는 총 3개다.

첫 번째 히든 피스를 개방하였을 당시에는 직업 고유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10퍼센트 단축되었고 또한 아이템 개조 스킬을 획득했었다.

그리고 두 번째 히든 피스는 아이템 합체를, 세 번째 히든 피스는 광물 강화 스킬을 획득했다.

‘이후 지금까지 한 동안 쭉 잠잠했었는데…’

대장장이의 눈?

기대에 찬 그리드가 스킬의 설명을 확인했다.

<대장장이의 눈>

대상 아이템-장비 아이템으로 한정-을 단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능력치와 옵션 중 일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상 아이템과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분석력이 높아집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내 소유권이 아닌 아이템에도 아이템 관찰 스킬이 적용된다, 이건가.”

예를 들면 적이 무장하고 있는 무기와 갑옷의 기능을 엿볼 수 있다던가?

“…?”

이딴 스킬이 왜 있는 거지? 남의 아이템 구경해서 뭐 하라고?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그리드였으나, 그의 발달한 사고력이 경종을 울려주었으므로 뒤늦게 전율했다.

“헉, 이거 엄청난 스킬이잖아?”

적이 무장한 아이템의 성능을 엿볼 수 있다면, 그건 엄청난 사기다.

왜냐?

적의 아이템에 숨겨진 비장의 수단을 사전에 차단할 수도 있고, 또한 약점을 노릴 수도 있는 등 활용도가 무궁무진했으니까.

“…크으.”

주먹을 불끈 말아 쥔 그리드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용솟음치는 환희를 주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드가 기뻐하면 나도 좋아.”

“이 몸도다, 냥.”

노에와 랜디는 영문도 모른 채 웃어댔고, 그리드는 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셋의 모습을 바라보는 스틱세이의 입가론 인자한 미소가 번졌다.

이때의 그리드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리드의 분신, 흑화 상태로 죽었음을.

이로 인한 변수가 그리드에게 재미있고 긍정적인 환경을 마련해주게 될 것이라는 사실, 지금의 그리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

<스킬 레벨 포인트>

지정한 스킬의 경험치를 100퍼센트 상승시킵니다.

“음.”

어떤 스킬의 레벨을 올려야할까?

연살파(聯殺派)나 극살(極殺), 혹은 연살(聯殺), 초연(超聯)등의 강력한 융합 스킬들의 레벨을 올리는 게 단연코 좋겠지만, 아쉽게도 융합 스킬들은 레벨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워낙 위력이 강력한 탓에 이미 완전체 스킬로 판정받고 있었다.

‘그렇다면 역시 살(殺)의 레벨을 올리는 게 좋으려나.’

아니, 역시 그건 아니다.

그리드는 섣부르게 결정하지 않았다.

‘나중을 생각하면 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 레벨을 올리는 게 좋을 수도 있어.’

지금 당장은 선택하기 어렵다.

그리드는 스킬 레벨 포인트를 급하게 사용하지 말고 일단 보관해야겠다고 판단했다.

그에게 스틱세이가 다가왔다.

“다음 섬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그리드는 지체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국가대항전까지 36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 전에 번헨 열도 전부를 공략할 계획인 그리드가 걸음을 재촉했다.

[마흔두 번째 섬에 입장하였습니다.]

[마흔세 번째 섬에 입장하였습니다.]

[마흔네 번째 섬에 입장…]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형태의 시련은 아무래도 모두 끝난 듯하다.

마흔두 번째 섬부터 마흔아홉 번째 섬을 공략하기까지, 그리드는 몬스터 사냥과 보스 레이드 등, 여태까지와는 상반되게 평범한 임무들만을 부여받았다.

‘편하군.’

40번대 섬에 출몰하는 몬스터들이 약하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자신의 분신과 비교하면 상대하기 무척 수월했다.

기세를 올린 그리드가 그대로 50번째 섬까지 도달했다.

***

시조 베리아체의 직계임과 동시에 마법을 마스터한 브라함.

결국에는 전설이라고까지 추앙 받게 된 그, 누구보다도 최강이라는 타이틀에 가까운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육신을 잃고 한낱 영혼으로 전락한 채 배회하는 지금의 그는 나약하고 처량한 존재이다. 과거의 영광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초라한 행색이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제1악마 바알.

드래곤과 대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 중 하나인 그 괴물 놈의 계약자, 전대부터 그랬다.

매번 내 골치를 썩게 만든다.

[이번에도 당할 수는 없다.]

검의 무덤에 봉인시켜놓은 육신을 찾으러 갔다가 아그너스의 기습을 받고 약화 된 브라함.

차츰 기세를 잃는 영혼의 불길에 초조함을 느낀 그가 결국 다시 떠올리게 된 인물은 그리드였다.

[네가 진정한 파그마의 후예라면 나를 감당할 수 있겠지.]

파그마가 악마의 힘을 감당했듯이 말이다.

파-앗!!!

남은 마력을 모조리 쥐어짠 브라함의 영혼이 서대륙 전체에 탐지마법을 발동시켰다.

오로지 그리드를 찾아내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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