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9권 - 17화
불사의 지속 시간은 5초.
그 안에 싸워봤자 그리드만 손해다.
그리드는 분신의 불사가 끝날 때까지 안전거리를 확보, 유지하고 최대한 시간을 끌 계획이었다.
‘그리고 분신의 불사가 끝나면 곧바로 공격, 마무리 짓는다.’
분신에게 당했던 일을 고스란히 되갚아주려는 심산이다.
‘어때? 초조하지?’
분신과의 거리를 벌리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는 그리드의 모습, 영화나 만화 속에 등장하는 악인들처럼 사악해 보인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분신이 갑자기 자리에 주저앉았다.
‘뭐지?’
그리드가 당황했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줄 알았던 분신이, 양반다리로 앉는 것으로 모자라 두 눈까지 감아버리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다.
‘저게 대체 뭐하는… 설마!’
생각해보던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분신의 혈색이 빠르게 좋아지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명상!’
그렇다.
그리드로 인해 안전거리를 확보하게 된 분신, 명상을 전개함으로서 자신의 생명력과 마나를 회복해나갔다.
‘명상을 뜻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다니?’
명상은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할 경우에만 자연 발동하는 스킬이다.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쓸 수 있는 스킬이 아니란 뜻이다.
하지만 분신은 예외인 듯 했다.
“칫!”
다급해진 그리드가 파그마의 검무 초(超)를 전개, 전력으로 대검을 휘둘렀다.
콰쾅! 쿠콰콰쾅!!
그리드의 대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쏘아진 검기가 분신을 덮쳤다.
하지만 이 일련의 과정까지 소요 된 시간은 3초 이상.
분신은 이미 어느 정도의 생명력을 회복한 상태였다. 거기에다가 <극상의 생명력 회복 물약>까지 복용한 분신이 그리드와 똑같이 초(超)를 전개, 그리드의 검기들을 상쇄시켜나갔다.
퍼퍼퍼퍼퍼펑!!
“크윽!”
그리드는 자신의 컨트롤 실력이 아직도 부족하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자신의 검기보다 분신의 검기가 훨씬 더 높은 적중률을 발휘하였기 때문이다.
‘검기를 발사하는 동시에 회피동작까지 취하다니.’
나로서는 불가능한 영역의 움직임이다.
급기야 상처투성이가 된 그리드였지만 최대한 냉정하고자 노력했다.
‘초조해할 필요 없어. 분신은 불사를 잃었다.’
반면 내게는 아직 불사가 있다. 내 쪽이 훨씬 유리하다. 위축될 필요 없다.
마음을 추스른 그리드가 이야루그트로 스왑, 분신에게 돌진했다.
채챙! 채채채챙!!
이야루그트는 주인에게 최선의 검로를 알려주는 마검이다. 이야루그트를 착용하였을 때의 그리드는 부족한 컨트롤 솜씨를 충당할 수 있었다. 분신과 맞수를 이루며 전투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팽팽한 싸움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파그마의 검무, 연살(聯殺).”
분신은 명상을 토대로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단축시켜놓은 상태.
앞서 사용했던 스킬들을 그리드보다 빨리 사용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전황은 급속도로 그리드에게 불리해져갔다.
푹-!
푹푹푹!
“크으윽!!”
방어에 전념하고자 갓 핸드들을 소집해보지만 분신의 갓 핸드들이 방해하여 뜻하는 대로 되질 않는다.
연살(聯殺)에 적중당한 그리드는 금세 생명력이 고갈되었다. 도란의 반지도 별다른 효과를 보이지 못하여 불사 상태에 돌입하고 말았다.
“이 새끼!”
흥분한 그리드가 분신에게 달라붙었다.
불사가 유지되는 5초 동안 분신을 반드시 죽일 각오였다.
하지만 브라함의 부츠에 귀속 된 플라이를 활용한 분신은 그리드를 쉽사리 떨쳐냈다.
그리드 또한 뒤늦게 <그리드의 부츠>를 브라함의 부츠로 스왑했지만 그 사이 거리가 대폭 벌어졌다.
“나만 믿어라, 주인! 냥!”
그리드가 엉거주춤하는 사이 분신을 따라잡은 노에가 짜리몽땅한 앞발을 수차례 휘둘렀다.
하지만 노에의 강철보다 단단한 발톱조차도 분신의 방어력을 온전히 무력화시키진 못했다.
성스러운 빛의 갑옷 세트는 정말로 탁월한 방어구라는 게 증명되는 대목이었다.
잠시 후, 결국 2번째 전투 역시 그리드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생명력이 0으로 하락하여 사망합니다.]
[경험치 30.6퍼센트를 잃었습니다.]
[레벨이 305로 하락하였습니다.]
[스탯 10개를 잃었습니다.]
[미션 실패!]
[마흔한 번째 섬에서 퇴장합니다.]
[마지막 세이브 포인트, 마흔 번째 섬으로 이동합니다.]
***
“빌어먹을!!”
마흔 번째 섬으로 되돌아온 그리드가 격노하는 이유, 단순히 레벨이 하락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노에의 도움까지 받았는데!’
반면 분신은 노에를 사용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내가 졌다.
부끄러워질 수준의 완패다.
“힘내라, 냥.”
노에가 말캉말캉한 앞발로 그리드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위로하는 것이다.
그리드와 함께 해온 세월이 세월이니만큼, 그리드에 대한 노에의 호감도는 매우 높았다.
“주인은 원래부터 나약하고 쓸모없지 않냐, 냥? 한두 번 진 걸로 새삼스럽게 좌절하지 마라, 냥!”
“…”
노에가 대상의 강함을 판별하는 기준은 대악마다.
이는 지옥 제일 마수 멤피스의 본능이었다. 노에의 입장에선 늘 그리드가 약해보였다.
“…전혀 위안이 안 되는데.”
막말하는 노에에게 핀잔을 주던 그리드가 문득 새로운 의문을 떠올렸다.
“스틱세이.”
“네, 그리드님.”
“마흔한 번째 섬이 멤피스를 재현하지 못하는 게 확실한 거야?”
스틱세이의 논리에 따르면, 멤피스는 드래곤 다음가는 생명체이므로 번헨 열도가 재현할 수 없는 존재라 하였다.
그리고 여기엔 어폐가 있었다.
“뱀파이어의 도시로 향하는 길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당신이 말했었잖아? 번헨 열도는 대악마와 드래곤조차 재현할 수 있다고. 근데 유독 멤피스만 재현하지 못한다니, 이상한 거 아니야?”
“타당한 의문이십니다.”
미소 지은 스틱세이가 설명했다.
“번헨 열도가 재현해온 대악마와 드래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완전체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완전체가 아니다?”
“네, 번헨 열도가 재현한 대악마들은 모두 검성 뮐러에게 육신을 봉인당한 존재들이었으며…”
스틱세이에게 시련을 안긴 미식룡 레이더스는 애초에 본체가 아닌 분신이었다. 드래곤들은 엉덩이가 무겁기 때문에 유희를 나올 때면 직접 움직이지 않고 마법으로 분신을 생성, 그 분신으로 활동했고 스틱세이가 만난 미식룡 레이더스 또한 분신이었던 것이다.
“그렇군. 대악마와 드래곤 모두 완전하지 않은 존재들이었기에 번헨 열도가 재현이 가능했다는 건가.”
하지만 여기서 또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약화 상태의 대악마와 드래곤은 멤피스보다 못하다는 건가?”
“멤피스가 성체가 된다면 그렇지 않을까요?”
“성체…”
그리드가 노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마에는 뿔이, 등에는 작은 날개가 달려있는 뱃살 통통한 고양이.
지금은 마냥 귀엽게 생겼지만, 성체가 된다면 어떤 모습일까?
“드래곤처럼 커지려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하는 그리드에게 스틱세이가 하하 웃어보였다.
“아니요, 외향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겁니다.”
“음…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리드는 노에가 쭉 귀여웠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노에의 팬카페 회원 중에 유독 여성이 많은 이유, 오로지 노에의 외모 때문이라고 믿었기에.
‘언젠가 노에의 팬미팅을 연 다음…’
여성 회원들과 가까워지고 좋은 인연을 쌓아간다면 참 행복할 터다.
찬란한 미래를 상상하며 코를 벌렁거리던 그리드가 문득 현실을 직시했다.
‘내가 지금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마흔한 번째 섬에 버티고 있는 내 분신, 강해도 너무 강하다.
내가 자신의 능력을 50퍼센트쯤 활용한다 치면, 녀석은 자신의 능력을 100퍼센트 온전히 활용하고 있었으니까.
도무지 놈을 상대로 승리할 답을 찾아낼 수가 없다.
‘내 컨트롤 솜씨가 비약적으로 성장한다면 또 모를까.’
정말이지 배움에는 끝이 없다.
나도 이제 좀 성장했다 싶으면, 더욱 더 강한 적이 나타나 내 성장을 비웃고 부정하기를 반복한다.
‘내게 템빨단원들만큼의 재능이 있었더라면.’
이토록 잦은 시련을 겪을 필요가 없었을 터다.
소위 말하는 천재라는 족속들, 성장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 새로운 시련에 늘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으니까.
‘반면 나는…’
피아로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고, 길드원들에게 조언을 들으며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성장해왔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재능이 없다는 것, 뼈아프게도 슬픈 일이다.
“…가만.”
돌이켜보자.
내가 언제부터 컨트롤 솜씨에 집착했던가?
‘피아로를 알게 되었을 쯤 부터였던가.’
강한 적을 상대하기 위해선 강해져야만 하고, 강해지기 위해선 컨트롤 솜씨를 높여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시기가 있다.
그날부터 컨트롤 솜씨를 높이기 위해서 쭉 노력해왔다.
한데 이게 과연 옳은 일일까?
‘남과 똑같이 노력해도.’
남은 100의 성과를 거둘 동안 나는 20, 30의 성과밖에 거두지 못한다.
너무 비효율적이다.
그리드의 발달한 사고력이 계산하고, 판단했다.
‘나는 굳이 컨트롤에 집착할 필요가 없잖아?’
둔재니까?
아니, 파그마의 후예니까다.
‘나는 전설의 대장장이다.’
온갖 무구를 창조하고 제작할 수 있으며, 그 무구들을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다.
‘그래, 초심으로 돌아가자.’
답은 템빨이다.
눈을 빛낸 그리드가 휴대용 용광로를 비롯한 대장일 도구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드의 두뇌는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마흔한 번째 섬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단지 좋은 아이템을 제작해선 안 된다.
아무리 좋은 아이템을 제작하면 뭐하는가?
분신도 똑같이 사용하게 될 아이템이니 분신만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는 꼴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아이템은.’
도박이다.
순수한 실력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이번 시련을 통과하기 위해서, 그리드는 하늘의 도움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내 최악의 운이 분신에게도 똑같이 작용하길 빌어보자.’
그리드는 유페미나의 보유 스킬 중 하나인 <주사위 굴리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랜덤하게 다른 효과를 불러일으킴으로서 상황을 긍정적으로든, 절망적으로든 일시에 급변시킬 수 있는 스킬.
그것을 아이템에 적용할 수만 있다면…
‘기다려라, 분신.’
오로지 운으로 정해지는 승패에서 결국 승리하게 되는 쪽은 내가 될 터다.
나는 너를 한 번만 이기면 되고, 너는 내 계속되는 도전을 피할 수 없는 입장이니까.
***
블러드 카니발.
전원 비공식 랭커로 구성 된 길드로서, 그 악독함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청부살인, 레이드 공대 습격, 상단의 상품 운송 강탈 등등.
블러드 카니발은 도의 따위 몰랐고 오로지 물욕을 위해서만 움직였다.
이들에게 피해를 입은 플레이어의 숫자는 헤아릴 수조차 없었고, 개중에는 하이 랭커들 또한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새로운 의뢰가 들어왔다.”
블러드 카니발의 마스터.
그 어느 곳에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은밀한 존재가 베일 너머로부터 미소 짓는다.
“국가대항전에서 크라우젤에게 패배를 안길 것. 이때 의뢰 대행인의 아이템에는 특정 기업의 로고가 각인되어 있어야한다.”
“역대급 의뢰군.”
“기업 광고를 위한 수단인가. 의뢰금이 어마어마하겠는데?”
천외천 크라우젤은 무패의 신화를 이루고 있는 존재다.
전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패배를 겪는다면?
각국의 언론사들은 크라우젤에게 좌절을 안겨준 인물을 집중 조명할 것이며, 이때 그 인물과 연류 된 기업은 천문학적인 홍보효과를 얻게 될 터였다.
“종목은?”
“어떤 종목에서든 크라우젤에게 패배를 안긴다면 그걸로 좋다고 한다. 단, PvP종목에서 크라우젤을 쓰러뜨릴 경우 의뢰금을 3배 더 준다고 하더군.”
“그럼 응당 PvP를 노려봐야겠군.”
“하지만 우리 중 국가대항전 참가자가 있던가?”
“내가 있다.”
블러드 카니발 최고의 실력자 중 하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의 얼굴엔 자신감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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