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9권 - 14화
‘졌다.’
그리드는 패배를 깨달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도리어 의욕을 불태웠다.
‘기회는 이번 한 번 뿐이 아니야. 나는 반드시 너(나)를 넘는다.’
나의 스탯, 스킬, 아이템 등 모든 것을 100퍼센트 복제한 분신.
녀석은 지금 친절하게 말해주는 중이다.
너 또한 나만큼 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분발하라고.
꽈악!
대검을 쥔 그리드의 손에 힘이 실렸다.
불사의 지속 시간은 5초.
그동안 그리드는 연살파(聯殺派)와 극살(極殺)의 조합을 시도해볼 작정이었다.
이미 승패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고, 당장은 죽을 걱정도 없었으니 새로운 시도를 함에 있어서 거침이 없었다.
“파그마의 검무, 연(聯).”
처억!
그리드가 나비처럼 가볍고 유려한 춤사위를 펼치기 시작했다.
찰랑이는 흑발 속 엿보이는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욱 더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으니 마치 맹금류의 그것과 닮았다.
그리드의 외견, 견고해진 마음과 성숙해진 두뇌처럼 차츰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외모와 표정은 직결되는 바, 열정으로 넘치는 사내의 얼굴이 보기 나쁠 리 없다.
터엉!
가볍게 선회한 그리드의 보법이 직선으로 뻗어져나감과 동시에 분신과의 거리를 좁혔다.
이때 <그리드의 대검>이 그리드의 시선과 수평을 이루고 있었으니 살(殺)의 춤사위였다.
여기까지가 바로 연살(聯殺)의 전조이기도 했다.
그리드는 이대로 파(派)를 연계할 요량이었다.
한데.
[연살(聯殺)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연살(聯殺)의 캐스팅이 취소됩니다.]
역시나 이렇다.
연살(聯殺)과 파(派)를 연계시킨다는 것, 그리드에게는 불가해의 영역이었다.
‘분신도 해낸 일을 나는 왜 못하는 거지?’
그리드는 혼란스러웠지만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곧바로 극(極)과 살(殺)의 검무를 펼쳤다.
극살(極殺)을 시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극살(極殺)은 조합되지 않았다. 살(殺)의 검무를 완성시키기 전에 극(極)이 발동해버렸다.
서걱!
위력은 살(殺)에 미치지 못하나 타켓팅이라는 장점을 지닌 극의의 베기가 떨어져 분신의 가슴을 크게 베었다.
하지만 이미 도란의 반지와 성스러운 빛의 갑옷 효과로 생명력을 크게 회복한 상태였던 분신을 위협할만한 피해를 전달하진 못했다.
여기서 그리드는 한 가지 상황을 바라게 됐다.
‘어서 반격해라.’
솔직히, 패배한다는 것은 기왕지사 피하고 싶다.
죽어서 경험치와 아이템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게 첫 번째 문제였고, 두 번째 문제는 자존심이었다.
그렇다.
그리드는 패배를 감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를 하고 있지는 않았다.
분신이 자신에게 반격을 가해오는 순간, 도란의 반지를 착용하고 생명력을 회복하여 역전을 노리고 싶었다.
하지만 분신은 그리드 그 자체. 아니, 그리드보다 더 그리드를 잘 알고 있는 존재였다.
분신은 무적 상태의 그리드를 공격해봤자 무의미하며, 또한 위험할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행동했다.
스윽.
‘이 자식!’
분신이 반격하기는커녕 자리를 이탈, 도망치자 그리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전투 내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으니 짜증이 솟구쳤다.
불사의 지속시간이 끝나기 직전,
벌컥!
[생명력 15,000을 회복합니다.]
레이단의 연금술소에서 제작한 <극상의 생명력 회복 물약>을 복용한 그리드가 이야루그트로 스왑, 연속적으로 평타를 날렸다.
채챙! 챙!!
분신은 침착하게 방어에 전념했다. 녀석은 이야루그트에 이야루그트로 대응함으로서 그리드의 검로를 완벽히 이해하고 차단시켰다.
그리고 그리드의 불사 상태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반격을 개시했다.
물론, 그리드가 도란의 반지를 활용할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 강력한 한 방 기술을 사용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살(殺)이었다.
흑화, 대장장이의 분노, 신속한 몸놀림.
그 모든 걸 분신보다 한 발 앞서 사용한 그리드였기에, 그리드는 분신보다 앞서 흑화와 버프가 풀리고 말았고 분신의 전광석화 같은 살(殺)을 피할 수 없었다.
[도란의 반지를 착용하였습니다.]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생명력이 0으로 하락하여 사망합니다.]
[경험치 30.6퍼센트를 잃었습니다.]
[미션 실패!]
[마흔한 번째 섬에서 퇴장합니다.]
[마지막 세이브 포인트, 마흔 번째 섬으로 이동합니다.]
오래간만에 보는 흑백화면이다.
그리드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
“괜찮으십니까?”
마흔 번째 섬.
그리드가 사망함과 동시에 이곳으로 함께 날아온 스틱세이의 얼굴이 근심으로 물들었다.
번헨 열도에 진입한 후 승승장구해온 그리드가 최초로 패배를 겪었으니 얼마나 큰 정신적 타격을 입었을지 염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멀쩡했다.
“걱정할 것 없어.”
걱정해주는 스틱세이에게 미소지어준 그리드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나마 아이템은 안 떨궈서 다행이군.’
대량의 경험치를 손실한 것은 뼈아픈 일이다.
현재 경험치 게이지는 2퍼센트.
만약 이대로 마흔한 번째 섬에 도전했다가 또 한 번 실패한다면 레벨 다운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리드는 위축되지 않았다.
‘천금 같은 기회다.’
내가 부족하여 몇 번을 또 실패하게 될지언정, 결국 이번 시련을 넘을 수만 있다면 반드시 성장할 수 있다.
그리드는 확신이 있었고, 이와 같은 상황에 감사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하지만 시련을 이겨내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랜디와 불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오기까지.’
앞으로 24시간.
그동안 그리드는 연살파(聯殺派)와 극살(極殺)의 연구에 매진할 예정이었다.
‘스킬의 발동 순서는 틀리지 않았다.’
잘못 된 요소는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관건이다.
“후우.”
심호흡한 그리드가 정좌하고 앉더니 명상을 시작했다.
평소 레가스의 수련법을 따라해 보는 것이었다.
‘떠올리자.’
내 분신이 연살파(聯殺派)와 극살(極殺)을 전개하였을 때 나와 달랐던 점이 무엇이었는지를.
그리드는 지난 전투를 회상하고, 분석하고자 집중했다. 분신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선명하게 떠올리고자 최선을 다했다.
***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 아무런 왜곡 없는 순수한 마음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초월이라 하며, 이를 실천하려는 것이 바로 명상입니다. 자기 자신, 혹은 특정 상황을 돌이켜보고 해결책을 강구함에 있어서 명상만큼 좋은 수단은 또 없지요.”
사막도시 레이단.
밭일이 끝나고 도시로 돌아온 피아로가 로드에게 강의를 하고 있었다.
“또한 명상은 체력과 마나의 회복력을 높여주고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줄여주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늘 사심으로 들끓고 있는 존재이지요. 명상이란 매우 고난이도의 수련법으로서 이름난 기사들조차 완벽히 임하기 어려워합니다. 하니 공자께서도 당장 시도하지 말고 그냥 이런 개념의 수련법도 있구나, 정도만 미리 숙지해주시면 지금으로선 충분합… 헉?”
뒷짐을 쥔 채 연신 떠들던 피아로가 놀라 숨을 들이켰다.
로드 스테임.
그리드와 아이린이 낳은 희대의 천재가 조용히 눈을 감더니 일정한 호흡을 유지하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완벽한 무아의 경지!’
로드의 주변 기류와 마나가 로드의 호흡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로드의 심상이 자연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반증이었으니 피아로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나조차도 전설이 되고나서야 습득할 수 있었던 자연경의 이치를 깨우쳐가고 있다고?’
물론, 아직 완벽하지는 않다.
하지만 기본 개념을 깨우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과라 할 수 있었다.
견고한 심상을 쌓고 있는 각 분야의 실력자들 또한 자연경의 일부조차 깨닫지 못하는 게 현실이었으니까.
‘이분은 대체…’
어디까지 성장하시려는 걸까?
어쩌면, 역대 전설 중 최강으로 손꼽혔던 뮐러를 초월할 유일한 존재가 아닐까?
‘머지않아 이분께서 더욱 더 성장하신다면.’
내게 필시 새로운 깨달음을 주실 터다.
피아로의 마음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
[스킬 <명상>을 습득하였습니다!]
<명상>
생명력과 마나의 회복 속도가 50퍼센트, 스태미나의 회복 속도가 30퍼센트 증가합니다.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이 10퍼센트 단축됩니다.
자원 소모:없음
스킬 발동 조건:집중
*인위적으로 발동시킬 수 있는 스킬이 아닙니다. 당신의 집중력이 극도로 높아질 때에만 자동으로 발동합니다.
Satisfy에는 특정 조건을 달성할 경우 자연 습득할 수 있는 스킬이 여러 개 존재하였고, 그중 하나가 바로 명상이었다.
‘좋군.’
스태미나의 회복 속도를 높이고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줄이는 몇 안 되는 수단 중 하나를 획득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드는 호들갑 떨지 않았다. 일희일비 하지 않으며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만큼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떠올리자.’
명상 스킬에 대한 감흥을 빠르게 지워버린 그리드가 다시금 분신의 움직임을 떠올려보았다.
분신이 연(聯)을 사용할 때의 동작, 나와 다른 점이 있던가?
없었다. 확실하다.
그렇다면 분신이 살(殺)을 사용할 때의 동작이 나와 다르던가?
그 또한 아니다. 확실하다.
분신이 파(派)와 극(極)를 사용할 때의 동작은?
‘그것도 나와 같았다.’
한데 어째서 분신만이 연살파(聯殺派)와 극살(極殺)을 조합할 수 있었던 걸까?
“…아!”
5시간 이상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그리드의 뇌리가 번뜩였다.
‘시간이 달랐던 것 같다.’
연(聯)에서 살(殺)을 잇는 동작, 연살(聯殺)의 경우 즉각적으로 이뤄지는 반면 연살파(聯殺派)는 약간의 간격을 뒀던 것 같다.
하지만 정확히 얼마만큼의 간격을 뒀는지는 모르겠다.
‘실험해보면 되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이상 그리드는 지체하지 않았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리드의 대검을 무장, 연(聯)의 검무를 펼친 후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살(殺)을 연계하고자 시도했다.
그러자 연(聯)이 발동해버렸다.
‘간격이 너무 길었다.’
괘념할 필요 없다.
다음 시도는 간격을 짧게 하면 될 일이다.
심호흡한 그리드가 2차 시도에 나섰다.
결과?
이번에도 역시 실패였다.
연살파(聯殺派)를 조합하기 위해선, 연(聯) 이후 살(殺)을 발동하는 타이밍이 무척 정교하고 완벽하게 맞아떨어져야만 했던 것이다.
‘성공할 때까지 도전한다.’
실패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성공의 발판이며,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응당 감내해야할 과정이었다.
매번 실패만 반복한 인생을 살아왔던 그리드였기에 그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이후.
그리드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연살파(聯殺派)의 조합에 실패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시도했다.
곁에서 그를 지켜보는 스틱세이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과연 파그마의 후예.’
스틱세이가 알기로 <파그마의 비서>는 절대 찾을 수 없는 금역 중 한 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한데 그리드는 그것을 찾아낸 인물이다.
끈기가 대단할 것이라 유추하였는데, 실제로 보니 기대 이상이었다.
스틱세이가 봤을 때 그리드는 현재보다 미래가 더 찬란한 유형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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