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9권 - 9화
피아로는 이미 한 번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
음모와 배신에 휩쓸려 지닌 모든 것을 잃었었다.
그런 피아로가 다시금 재기할 수 있었던 이유, 모두 그리드의 덕이었다.
지독한 병에 걸려있던 마음에 그리드가 의욕을 불어넣어주었고, 아스모펠과의 오해 또한 그리드가 풀어줬다.
피아로에게 있어서 그리드란, 평생 목숨을 바쳐 봉사해야할 정도로 은혜로운 인물이었다.
한데 피아로는 왜?
어째서 크리스, 휴렌트처럼 그리드에게 적의를 보내는 자들마저도 수련시키고 단련시키는 것일까?
이는 그리드에 대한 불충이라며, 누군가는 피아로를 비난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피아로는 당당했다.
과거,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인 줄 알고 음모와 배신에 당했던 일은 헛된 경험이 아니었기에.
지금의 피아로는 사람의 참된 모습을 구분할 수 있는 심안을 지녔다.
‘보면 볼수록 성실하고 열정이 넘치는 자로군.’
알테스 산맥 인근의 논밭.
열심히 호미질 중인 휴렌트를 피아로가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피아로가 판단하기에 휴렌트는 올곧은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다. 과거의 사건 때문에 지금 당장은 그리드에게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을지 모르나, 그가 품고 있는 복수심이란 애초에 악의보다 열정으로 뭉쳐있는 형태였다.
잘만 인도한다면, 필시 긍정적인 방향으로 성장할 인물이었고 훗날 그리드의 오른팔이 되어도 부족함이 없는 잠재력까지 지녔다.
‘오러의 가능성이 저 정도라는 사실은 나 또한 몰랐던 것이다.’
휴렌트가 다루는 오러는 일반적인 오러와 궤를 달리했다.
순수한 위력에만 얽매이지 않고 형태의 다양성에 중점을 두었으니 보다 유용하고 발전가능성이 무궁무진하였다.
그가 잘만 성장한다면, 전장에서 일당천의 위용을 뽐낼 것이었고 논밭에선 일당만의 효율을 뽑아낼 것이었다.
‘꾸준히 당근을 줘야겠어.’
모든 것은 주군을 위해서다. 라고, 피아로는 진실 되게 말할 수 있었다.
***
레이단부터 알테스 산맥 인근의 논밭까지 거리는 꼬박 하루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채 반나절도 안 돼서 도착할 수 있었다.
브라함의 부츠에 귀속 된 이동속도 상승 버프와, 이상적인 단검에 귀속 된 신속한 몸놀림을 활용한 결과였다.
“사막이 숲이 되어가고 있군…”
레이단 외곽의 논밭과 달리, 최근에 피아로가 개간한 알테스 산맥 인근의 논밭은 절반이 과수원이었다. 아직 열매를 맺지는 못한 묘목들이라고는 하나, 나무가 잔뜩 심어져 있었으니 머잖아 무성한 숲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리드는 피아로의 저력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무리 전설의 농부라지만 사막을 숲으로 만들다니…”
행정관 라빗의 말에 따르면, 라빗이 피아로에게 지원해준 농부의 숫자는 채 5백 명도 안 된다 하였다. 한데 피아로는 스스로 인부를 확보하고 오로지 자력으로 농업을 발전시키고 있었으니 참으로 고마운 존재였다.
“응?”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던 그리드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많이 쳐봤자 10대 초중반에 불과한 어린 소녀 200여명이 뙤약볕 아래서 노동하는 모습을 목격한 까닭이었다.
“저토록 어린 아이들을 농노로 부리다니…”
하나 같이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들은 전원 피부가 구릿빛으로 그을려 있었다. 자세히 보면 손에 굳은살도 가득 배겨있었으니 하루 이틀 혹사당한 낌새가 아니었다.
그리드는 피아로에게 실망했다.
“아무리 농사일에 미쳤다고 해도, 굳이 어린 소녀들까지 농노로 부려야만 했나?”
본래 그리드는 오지랖이 없다.
남이 어떤 불행을 당하든 말든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로드의 아버지로서, 어린 아이들이 혹사당하는 광경을 잠자코 지켜만 볼 수가 없었다.
“따끔하게 말해놔야겠군.”
다짐한 그리드가 논밭에 발을 들이는 순간이었다.
번쩍!
각자 농기구를 손에 쥔 채 밭일에 매진하고 있던 200명의 소녀들.
그녀들이 논밭에 누군가가 발을 들이는 순간 눈매를 매섭게 바꾸더니 일제히 무기를 뽑아 쥐는 게 아닌가?
각자 칼, 창, 방패를 꺼내는 소녀들을 목도한 순간 그리드는 깨달았다.
‘설마 이 아이들이 레베카의 딸 후보들?’
라우엘에게 보고를 들은 바 있다.
레베카의 딸 후보들이 피아로 밑에서 교육을 받는 중이라고.
말인 즉, 이 200명의 소녀들은 억울하고 불쌍한 농노들이 아니라 피아로의 제자인 셈이었다. 농사일도 수업의 일환일 터였고.
‘휴… 불행한 소녀들이 아니라 천만다행이군.’
뒤늦게 오해를 푼 그리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때였다.
“위대하신 그리드 공작각하께서 다스리는 레이단의 영토에.”
“멋대로 침범한 자, 레베카 여신이 용서하지 않아요.”
“피아로님의 의지를 받들어 침입자를 격퇴합니다.”
“어?”
아무래도 초면인 게 문제인 듯싶다.
침입자라는 누명을 쓰고 당황하는 그리드에게 200명의 소녀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최초에는 어찌할 바 모르던 그리드였으나,
부웅!
슈욱!
퍼엉-!!
각자 칼, 창, 방패라는 무기를 다루는데 특화 된 200명 소녀들의 연계가 무척이나 훌륭했다.
그리드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수준이었다.
‘이거 엄청난데?’
레베카의 딸.
레베카교 최강의 무력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백화 상태의 실력은 그리드를 월등히 초월한다. 애초에 플레이어가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 후보들이니만큼, 소녀들은 하나 같이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어쩌면 전원 네임드급 NPC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품게 만들 정도로.
“강하시군요!”
“하지만 이 앞으론 더 이상 못가요!”
자신들의 합격기가 연달아 수포로 돌아가자 당황하는가 싶던 소녀들이 입술을 앙 다물었다.
과연 대륙제일 종교의 비밀병기로 육성되어온 존재들답게 투지를 결코 잃지 않았다.
그리드의 가슴이 뛰었다.
‘강해지고 있다.’
본인 스스로를 말하는 게 아니다.
레이단의 농부들이, 레이단이, 종국에 이르러서는 템빨단이 실시간으로 강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결과, 혼자서가 아닌 동료들과 함께 이뤄낸 쾌거다.
세력을 발전시키는 재미, 본인 혼자만 성장하는 것과는 색다른 묘미가 있었고 한층 더 뿌듯했다.
“이참에 너희들의 수련에 일조해주마.”
레베카의 딸 후보들이 성장하여 템빨단 무력의 상징이 되는 모습을 상상해본 그리드.
기쁨에 전율한 그가 이야루그트를 뽑아 쥐었다.
순간 200명 소녀들의 커다란 눈망울이 초롱초롱 반짝였다.
‘아름다워!’
연금술 B급 최고 옵션 <멋짐>의 효과는 놀라웠다.
안 그래도 유려한 검신을 지닌 이야루그트가 한 번의 궤적을 그릴 때마다 보석처럼 흩어지는 광채를 흩뿌렸으니, 누구라도 그 모습에 현혹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상태이상 <매혹>과 같은 효과를 보이는 개념의 것은 아니었지만, 이야루그트를 보는 이의 마음 한편에 그리드라는 존재를 각인시키기엔 충분한 효과를 보였다.
“파그마의 검무, 제(制).”
그리드가 장엄한 춤사위를 펼치기 시작했다.
이때 그의 주변으로 흩날리는 혈빛의 광채는 마치 벚꽃과도 같았다.
<최초의 공작>칭호를 통해서 +600의 위엄과 +800의 매력을 보유하고 있는 그리드가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흑발을 흐트러뜨리는 모습, 어린 소녀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뒤늦게 소란을 듣고 찾아온 피아로가 혀를 내둘렀다.
“아니, 공작각하. 어린 소녀들을 꾀시면 곤란합니다…”
“…”
자칫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사회적 문제로 대두될 뻔한 그리드였다.
***
“무기술 숙련도를 빠르게 올리는 방법 말씀이십니까.”
논밭과 과수원의 중간 지점.
200명의 소녀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리드는 피아로의 조언을 듣고 있었다.
“가장 주요한 것은 역시 반복 숙달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건 편법이야. 무기에 옵션으로 넣고 싶은 거거든.”
“무기술 숙련도를 빠르게 올려주는 무기를 제작하고 싶으신 거군요. 흐음…”
피아로가 고민을 시작했다.
칸이 무기술에 무지했던 것처럼, 피아로는 대장일에 무지하였으니 쉽게 대답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피아로가 고민에 빠져있는 동안 소녀들은 연신 그리드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공작각하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공작각하 덕분에 데미안님께서 교황성하가 되셨고 우리 레베카교는 평화를 되찾았답니다.”
“필시 레베카 여신께서도 공작각하께 축복을 내려주고 계실 거예요.”
이 자리에 모여 있는 레베카의 딸 후보들, 최소 5년에서 길면 10년 동안 시설에 갇힌 채 세뇌교육을 받아온 존재들이다.
본래는 또래답지 않게 말수가 없었고 스스로 생각하며 판단하는 일을 억제했었다.
하지만 이들은 데미안과 피아로 덕분에 변할 수 있었다.
인간으로서 추구해야할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고, 점차 발랄한 또래 소녀들처럼 변모해갔다.
즉, 현재의 레베카의 딸 후보들은 감수성 풍부한 소녀들이라는 것이다.
첫사랑을 체험하기에 아주 적합한 나이대였고, 그 대상으로서 그리드는 무척이나 적합했다.
우리들을 구원해준 영웅이며 여신의 축복을 받은 자, 거기에 또 성인 남성으로서의 매력을 물씬 풍긴다.
큰 키와 단단한 체형, 성숙한 표정이 소녀들의 마음을 헤집어 놓았다.
하지만 그리드는 알고 있었다.
소녀들의 마음, 잠시 스쳐가는 바람과도 같을 것임을.
‘여중생들이 교생한테 잠시 혹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겠지.’
피식 웃은 그리드가 소녀들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면서 말했다.
“앞으로 쭉 건강히, 예쁘고 건강하게 자라서 내 아들 로드를 잘 부탁한다.”
“예…! 공작각하!”
자신의 이 순수한 부탁이 로드에게 여난을 겪게 만들 줄이야, 이때 당시의 그리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말 잘 듣고 예쁜 소녀들의 모습이 기특하여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리드에게 피아로가 묘안을 내놓았다.
“악조건 속에서 무기를 사용할 경우, 난관을 극복한 대가로 무기술 숙련도가 잘 오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기 제작에 그 부분을 도입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호오.”
그리드가 생각해보았다.
사용할 때마다 악조건을 재현할 수 있는 무기라?
‘…쓰레기 같은 아이템을 만들면 되는 건가?’
전설의 대장장이가 트롤링(Trolling)을 시도하려하고 있었다.
***
번헨 열도에 템빨단 최정예들이 집결했다.
전 체다카 출신 길드원들 뿐만이 아니라 유라, 라우엘, 극검, 후로이에 이르기까지 전원이 모였다.
이들의 목표는 단 하나.
“강해집시다.”
그리드에게 공략법을 듣고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다.
이들은 최대한 많은 섬을 공략하고 대량의 포인트를 확보, 필요한 엘릭서와 스킬북 등을 구매할 요량이었다.
팟!
파파파파팟!!
템빨단원들이 한 명씩, 각기 따로 번헨 열도에 입장하기 시작했다.
번헨 열도는 1인 입장 제한의 인스턴트 던전이었으므로 진행을 따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흠.”
동료들이 입장하는 모습을 뒤에 선 채 확인한 라우엘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유페미나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정말로 번헨 열도에 도전할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
-네, 지금 진행 중인 퀘스트에 집중하는 게 아무래도 더 옳아 보이거든요.
-엄청 중한 퀘스트인가 보군요. 퀘스트 내용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그건…
유페미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그를 들어나가는 라우엘의 입가론 짙은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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