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8권 - 22화
“나를 기만하다니.”
그리드의 모습을 복제한 채 죽도록 얻어맞은 랜디.
슬라임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한 녀석을 티라멧이 신경질적으로 패대기쳤다.
[도플갱어 랜디의 생명력이 0이 되었습니다.]
[랜디가 펫 인벤토리로 강제 송환됩니다. 회복하기까지 앞으로 24시간 동안 소환할 수 없습니다.]
“죗값은 목숨으로 치러야할 거다.”
콰작!
이를 간 티라멧이 땅을 부수며 도약했다.
그가 그리드 일행에게 도달하는 속도, 오직 그리드만이 반응하고 대처할 수 있었다.
유라는 레벨이 너무 낮았고 스틱세이는 동체시력이 떨어지는 까닭이었다.
쩌엉-!!
실패작과 결합 된 이야루그트와 티라멧의 주먹이 정면으로 맞부딪치면서 그리드가 두 걸음 밀려났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선 독보적인 스탯빨을 보유한 천하의 그리드가 힘에서부터 밀리는 것이다.
빠각!
주먹을 휘두른 각도 그대로 상체를 기울인 티라멧의 다리가 사각에서부터 그리드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9,975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큭…!”
쿠당탕탕!!
신음을 토해내는 그리드의 몸이 대전 벽면까지 날아가 부딪친 후 나뒹굴었다.
티라멧의 기본 공격은 마법 피해와 물리 피해, 그리고 차징의 기능이 결합되어 있었으므로 상대하기가 무척 까다로웠다.
‘정말로 상성이 안 좋아.’
그리드가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였다.
과거였다면 어찌할 바 모르며 패닉에 빠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그리드, 강자와의 대결을 좋은 기회라 여기고 있었다.
‘크라우젤, 당신이라면 이 녀석과 호각을 이룰 수 있었을 테지.’
당신에게 한 발 더 가까워졌음을 증명하고 싶다.
일념에 휩싸인 그리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티라멧에게 쇄도했다.
어느덧 상처투성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세가 조금도 죽지 않았다.
“가소로운 놈이!!”
콧방귀 뀐 티라멧이 그리드의 대검에 가슴을 크게 베였다.
피하지 못한 게 아니라 피하지 않은 것이다.
덥썩!
자신에게 깊이 파고든 그리드의 안면을 커다란 손으로 붙잡은 티라멧.
놈의 위협적인 송곳니가 날카롭게 번뜩이는 그 순간이었다.
“매직 미사일.”
퍼엉!
백색의 섬광으로 티라멧의 두 눈을 정확하게 쏘아 맞춘 그리드가 갓 핸드를 소집, 자신의 안면을 부여잡고 있는 티라멧의 손을 떨쳐냈다.
그와 동시에 이어진 연격이 티라멧의 목덜미에서 피가 솟구치게끔 만들었다.
티라멧은 골치가 아팠다.
‘이놈의 집중력이 어떻게 유지되는 거지?’
최초의 노림수는 수포로 돌아갔고, 이제는 전투 내내 압도당하면서도 절망하지 않다니?
일반적인 인간들과는 정신력이 다르다.
‘여태까지의 인간들은 내가 불사의 존재임을 알게 되는 순간 절망하고 좌절하였건만.’
마음에 안 든다.
홍옥 같은 눈동자를 더욱 더 붉게 물들인 티라멧이 마법을 전개, 그리드를 더욱 수세에 몰아넣었다.
한편, 유라는 그리드가 벌어주는 시간이 헛되지 않게끔 아이템의 기능을 파악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알렉스의 마법 공학 총>
등급:유니크
내구력:215/215
*피스톨 모드
공격력:419
마나 정제 속도:+30%
*라이플 모드
공격력:914
마나 정제 속도:-20%
연사 속도:-50%
*바요넷 모드
공격력:705
공격 속도:+10%
찌르기 공격력:+30%
*모드 변경은 5초에 한 번 씩만 가능합니다.
대장장이 파그마가 아직 전설이라는 칭호를 얻기 전, 그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던 드워프 장인 밀뤠프가 제작한 마법 공학 총입니다.
드워프 기술의 정수가 담겨있습니다.
사용 조건:데빌 슬레이어
‘엄청나.’
유라가 기존에 사용했던 마법총들은 피스톨 모드밖에 지원하지 않았었다.
또한 기본 공격력도 부족했고 마나를 탄환으로 정제하는 속도를 상승시켜주는 옵션조차 없었다.
알렉스의 마법총을 확인하고 전율하는 그녀에게 스틱세이가 미소지어주었다.
“당신을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그 총이라면 당신의 진정한 힘을 이끌어낼 수 있겠지요.”
유라는 의문이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제게 이 총을 주신 이유가 뭐죠? 심지어 당신과 저는 오늘 처음 본 사이잖아요.”
“당신은 그리드님의 동료가 아닙니까.”
본래, 데빌 슬레이어가 알렉스의 총을 얻기 위해선 번헨 열도를 방문하고 25번째 섬까지 도달해야만 했다.
일종의 히든 퀘스트였다.
하지만 유라는 단지 그리드의 동료라는 이유만으로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보상을 얻은 것이다.
‘정말이지 당신은.’
채챙!
채채채챙!!
이를 악 문 채 티라멧과 혈투를 벌이는 그리드.
그를 보는 유라의 눈빛이 한층 더 심화되었다.
‘그물 같은 남자네요.’
도통 벗어날 수가 없다.
내가 누군가에게 의지하게 되다니, 상상조차 못해왔던 일이다.
복잡미묘한 미소를 띠운 유라가 티라멧의 머리를 노리고 총구를 겨냥했다.
위잉- 철컥!
[알렉스의 총이 라이플 모드로 전환됩니다.]
푸른색의 총신이 길게 뻗어졌고, 자세를 고치는 유라의 마나가 총으로 전이된다.
“소멸탄.”
퍼엉-!!!!
“……!”
곁에서 유라를 지켜보던 스틱세이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유라가 마나를 탄환으로 정제하는 속도와 목표물을 조준하는 속도가 생전의 알렉스를 연상하게 만들 정도로 빨랐기에.
물론, 단지 빠르기만 했다면 놀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콰쾅!!
“크아악!!”
갓 핸드를 위시하여 버티는 그리드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팔려있던 티라멧의 얼굴이 반파됐다. 피와 살이 난무하고 부셔진 두개골이 드러났다.
정확한 사격 솜씨와 훌륭한 위력이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티라멧.
증오로 가득 찬 그의 시선이 유라에게 향함을 엿본 그리드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연살(聯殺).”
푸욱-!!
티라멧의 반파 된 얼굴에 그리드의 대검이 정확하게 꽂혔다.
티라멧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고,
푹푹푹!!
그리드의 대검은 연달아 티라멧의 얼굴을 겨냥하였다.
아쉽게도 2발은 빗나갔으나 총 4회의 가격에 성공했다.
4회 모두 크리티컬이 터졌고 성스러운 빛의 장갑 효과로 3연격까지 발동했다.
그리드가 기세를 이어갔다.
“연(聯)!”
[연(聯)의 레벨이 올라 6이 되었습니다.]
[연(聯)의 위력이 상승합니다.]
핏!
피피피피피핏!!
채채채챙!!
티라멧은 과연 대단했다.
연달아 치명상을 입고도 신속의 검무 중 대부분을 양팔로 막아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상대는 그리드 하나가 아니었다.
그리드에게 집중한 대가로 또 한 번 유라에게 빈틈을 내주었다.
“원령검.”
스아아아아-
소멸탄을 사용, 티라멧에게 또 한 번 타격을 입힌 후 접근한 유라가 총신에 오러 소드를 소환했다.
이어 직선을 그리는 백색의 섬광은 티라멧에게 또 한 번 커다란 피해를 입혔다.
그리드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엄청 세네.’
데빌 슬레이어.
마족계열 몬스터에게 추가 피해를 입히는 패시브와 액티브 스킬들을 보유했다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다.
유라의 레벨과 스탯, 그리고 아이템 수준이 나보다 훨씬 아래임에도 불구하고 티라멧에게 1.5배는 더 큰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크윽!!”
티라멧은 혼란스러웠다.
베아트리체의 아홉 직계 중 하나인 자신이 고작 두 명의 인간에게 수세에 몰리다니, 황당할 따름이었다.
150년 전 알렉스라는 놈을 만났을 때와 비견되는 충격이다.
‘우선 후퇴를…’
파앗!
자존심을 버리고 판단한 티라멧의 몸이 연기로 흩어졌다.
그대로 퇴각할 심산이었지만 그리드와 유라가 놓칠 리 만무했다.
“파그마의 검무, 파(派).”
[파(派)의 레벨이 올라 5가 되었습니다.]
[파(派)의 위력이 상승합니다.]
콰콰콰콰콰콰쾅!!
굽이굽이 파도치며 사방으로 뻗어나간 검기가 티라멧의 모든 속도를 저하시키며 퇴로를 차단시켰고,
“종말의 빛.”
퍼퍼퍼퍼퍼퍼퍼퍼펑!!
유라가 일으킨 금빛 폭발이 대전을 뒤흔들었다.
“이럴… 이럴 리가 없…! 크아아아악!!”
티라멧의 압도적인 재생력이 데빌 슬레이어 앞에서 무력화됐다.
연달아 입은 치명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소멸하기 시작하는 티라멧.
그가 내지른 단말마의 비명이 대전에 메아리치더니 이내 잦아들었다.
[뱀파이어 자작, 티라멧이 모든 힘을 소진하여 강제 수면에 접어듭니다.]
[경험치 1,325,810,470을 분배 받았습니다.]
[<티라멧의 허리띠>를 획득하였습니다.]
[<티라멧의 견갑>을 획득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암흑의 룬>에 <티라멧의 힘>이 각인됩니다.]
[전설이 된 대장장이가 범인을 초월하는 뛰어난 안목으로 물품을 감정합니다. 대상 물품에 숨겨진 기능이 존재할 경우 숨겨진 기능을 발견합니다.]
<티라멧의 견갑>
등급:유니크
방어력:95 생명력:+3,000
*낮은 확률로 물리공격 무효화.
자작급 진혈족 티라멧이 애용하던 견갑입니다. 높은 생존력을 보장합니다.
사용 조건:레벨 320 이상.
무게:190
<티라멧의 허리띠>
등급:에픽(성장형)
*받는 피해량을 10퍼센트 줄입니다.
*체력 +100
자작급 진혈족 티라멧의 고유 마력이 깃든 허리띠입니다.
무게:13
[숨겨진 기능이 존재하는 아이템입니다.]
[<티라멧의 허리띠>의 정보가 갱신됩니다.]
*허리띠의 등급이 레전드리까지 성장할 경우 뱀파이어 자작 티라멧을 소환할 수 있게 됩니다.
‘허…’
엘핀스톤의 반지는 엘핀스톤을 소환할 수 있다더니, 티라멧의 허리띠는 티라멧을 소환할 수 있다고 한다.
직계들의 고유 마력이 깃든 아이템들이 모두 이와 같다고 가정할 경우, 뱀파이어 도시의 완전 공략자는 뱀파이어 로드로 등극하는 셈이나 다름이 없어보였다.
‘이거 대박인데.’
엘핀스톤, 티라멧과 같이 엄청난 보스 몬스터들을 거느리게 될 미래를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발생한다.
몸을 떠는 그리드에게 다가온 유라가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응, 당연히 줘야지.”
아이템 분배를 바라는 것일 터다.
해석한 그리드가 티라멧의 허리띠를 유라에게 건넸다.
‘다소 아쉽긴 해도.’
유라의 도움이 없었다면 티라멧을 레이드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유라의 성장은 곧 템빨단의 성장이었으니 그녀에게 아이템을 분배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한데 유라는 티라멧의 허리띠를 받지 않았다.
“아이템 말고요.”
“…그럼 뭘?”
의아해하는 그리드에게, 뺨에 홍조를 띄운 유라가 시선을 회피하며 부탁했다.
“손 잡아주세요. 수고했다는 의미로.”
별 거 아닌 일을 수줍게도 부탁하는 유라였다.
그리드는 어리둥절한 채 그녀와 힘차게 악수를 나눴다.
스틱세이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
“마마! 마!”
1주일 전부터 걷기 시작한 로드의 균형 감각이 날이 갈수록 상승했다. 뒤뚱뒤뚱, 엄마 아이린에게 다가가기까지 단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았다.
이제 말문도 트이기 시작한 로드를 아이린이 감격하며 안아주었다.
“우리 아가, 훌륭한 아버지를 쏙 빼닮아서 못하는 게 없구나.”
“헐.”
곁에서 로드 모자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루비가 당황했다.
다섯 살때까지 기저귀를 차고 다녔다는 우리 오빠와 울트라 천재 로드가 쏙 빼닮았다고 하니, 솔직히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가끔은 묻어두는 게 좋은 진실도 있는 법이다.
루비는 잠자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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