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8권 - 16화
그리드는 대한민국 육군 병장 출신답게 제식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군을 빠르고 쉽게 통제하기 위해서, 질서와 단결을 위해서, 사고의 발생을 줄이기 위해서, 혹은 보여주기 용도 등으로.
제식은 군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덕목이었다.
“군대가 대형을 갖추는 가장 큰 이유는 무기를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함이다. 대형이 엉망인 군을 상상해 봐라. 방패병이 후위에 있고, 궁병이 전위에 있다면? 오합지졸밖에 더 되겠나?”
제식의 수준이 높을수록 대형을 편집하는 속도가 빨라진다. 대형 편집 속도가 빠를수록 전쟁에서 이길 확률이 높아진다.
제식이 어째서 중요한가, 그 이유를 하나부터 열까지 나열하는 캐슬 교관을 보면서 그리드가 피식 웃었다.
‘과거의 내가 집중하지 못했을 만도 하지.’
강제로 예비군 훈련에 끌려온 것만으로도 서러운 마당에, 잠 쏟아지는 이론 교육이라니.
세상에 뭐 이딴 게임이 다 있단 말인가?
과거의 그리드는 매번 투덜거리면서 교육에 집중하지 못했었다.
“어이, 고문관.”
캐슬 교관이 그리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훈련 때마다 꾸벅꾸벅 졸기 바쁘던 놈이 웬일로 교육에 집중하나 싶더니, 감히 교관님이 말씀하시는데 실실 쪼개?”
파트리안은 요새도시라는 특성상 군율이 매우 엄격하다.
그것은 당연히 플레이어에게도 적용되는 사항이었다.
“내 교육이 시시하다 이거지? 네놈은 이미 제식을 마스터했다 이거지?”
도끼눈 뜬 채 이를 간 캐슬 교관이 버럭 소리쳤다.
“일어섯!”
그리드는 군말 않고 일어났다.
교관이 말하는데 웃은 것부터가 잘못임을 알고 있었고, 예비군 훈련에서 합격점을 받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복종이 필수였으니까.
“차렷! 열중쉬어! 우로 갓!”
간단한 명령으로 그리드를 대열로부터 이탈시킨 캐슬 교관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네놈이 교육 중에 웃을 처지가 되는지 한 번 시험해보마.”
이후, 캐슬 교관은 그리드에게 온갖 행동을 강요했다.
전후좌우로 복잡하게 움직이게끔 만들어 혼란을 주고, 이를 그리드가 못 따라오거나 절도를 잃을 시 트집을 잡아 얼차려를 먹일 계획이었다.
한데…
척!
척척척!!
‘헐.’
연신 명령을 내리던 캐슬 교환이 당혹을 금치 못하였다.
고문관, 그리드.
그 어떤 훈련에서도 합격점을 받지 못했던 열등병 중의 열등병이 마치 배태랑 정예병처럼 훌륭한 제식을 구사하는 게 아닌가?
체력이 약해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집중력과 절도를 잃지 않고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점은,
‘저놈의 눈빛이 원래부터 저랬었나?’
그리드는 교관과 조교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멍청하고, 의욕 없고, 체력이 약한데다가 눈빛은 썩은 생선 눈깔 같아가지고 보기만 해도 짜증난다고.
한데 지금의 그리드는 멍청하지 않았고 의욕도 충만하였으며 약한 체력을 극복할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썩은 생선 눈깔?
개뿔!
몇 번이고 사선을 넘나든 역전의 장수처럼 날카롭고 호기로운 눈빛이다.
마주하고 있노라면 위축될 정도의.
“…험험.”
저 빌어먹을 열등병이 언제쯤이면 무너질까?
오기에서 비롯된 명령을 연달아 내리던 캐슬 교관이 결국 기세에 지고 말았다.
헛기침하면서 그리드의 시선을 회피한 그가 손짓했다.
“못 본 새 제식을 마스터했군. 나름 열심히 연습했나보지? 자리로 돌아가도록.”
“예!”
힘차게 대답한 그리드가 대열에 합류했다.
솔직히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일국의 공작인 내가 말단 교관에게 모욕을 당하고 얼차려 수준의 제식 테스트를 받다니?
치욕이었다.
하지만 자존심을 세울 상황이 아니다.
‘지금의 나는 23레벨 전사에 불과해.’
그래, 지금은 과거다.
서른한 번째 섬을 넘기 위해서는 이 상황에 순응해야만 했다.
“지금부터 테스트를 실시한다!”
약 3시간 동안의 교육과 훈련 후 제식 시험이 시작됐다.
결과는 놀라웠다.
고문관 그리드가 시험에서 1등을 차지한 것이다.
다른 예비군들과 비교해서 체력이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중력을 유지, 캐슬 교관의 명령을 완전하고 절도 있게 수행했다.
‘저놈이 뭘 잘못 먹었나?’
캐슬 교관과 조교들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
진지구축 훈련.
연병장 뒷산에 올라 엄폐호를 만드는 내용의 훈련이었다.
“삽질만 잘 하면 되지.”
“얼마나 빠르게 구덩이를 파는 게 관건 아닌가?”
삽을 하나씩 쥔 예비군들이 쉽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진지구축의 의의를 떠올렸다.
엄폐호란, 적의 공격이나 관측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하는 용도로 구축하는 것인 바.
‘단지 구덩이만 파놓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방어력과 은밀함을 갖춰야 돼.’
판단한 그리드가 산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두 그루 나무 사이에 덩굴과 수풀이 우거진 곳을 발견하더니 그쪽으로 다가가 삽질을 시작했다.
다른 예비군들이 비웃었다.
‘나무와 수풀들이 행동을 방해하는 구역에서 삽질을 하다니.’
‘저래서야 구덩이 파는데 한참이나 걸리지.’
‘멍청한 놈, 괜히 교관에게 무시당하는 게 아니군.’
제식을 제외하면 죄다 최하점만 받게 될 놈이다.
그리드를 우습게 평가한 예비군들이 최대한 평지를 찾아서 땅을 파기 시작했다.
하나 같이 엄청난 속도로 삽질을 해나갔다. 어서 이 지긋지긋한 훈련을 끝내고 싶다는 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반면 그리드의 삽질 속도는 느긋했다.
‘삽질을 빨리 하면 금방 지치게 된다.’
대한민국 육군 병장 출신임과 동시에 1년 이상 노가다 현장을 전전했던 그리드다.
그리드에게 있어서 삽질이란 몇 안 되는 특기 중 하나였다.
‘삽질은 상체를 엎드려서 힘을 주는 동작을 취하기 때문에 심장과 근육에 무리를 준다.’
지쳐 쓰러지고 싶지 않다면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다.
푹!
오른 손으로는 손잡이를, 왼 손으로는 삽자루 맨 아랫부분을 잡은 그리드가 지렛대 원리로 땅을 파나갔다.
그 속도, 최초에는 남들과 비교해서 무척 느렸으나 시간이 조금만 지나니 아니었다. 도리어 그리드가 땅 파는 속도가 남보다 3배 가까이 빨라졌다.
남들은 지쳐 녹초가 되었을 때 그리드만큼은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허… 낮은 체력을 요령으로 극복하다니.”
예비군들을 전체적으로 관찰해야할 캐슬 교관과 조교들이 그리드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만큼 그리드의 삽질 솜씨가 일품이었다.
축성현장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전문 인력들을 연상하게 만들 정도였다.
이후에 진행 된 진지구축 테스트에서 그리드가 1등을 차지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였다.
‘좋았어.’
과거의 한심한 자신을 하나, 둘씩 지워나가는 그리드의 얼굴이 점차 밝아졌다.
크라우젤과 싸워 이긴 후 높아졌던 긍지가 더욱 더 견고해져갔다.
***
무기술 시험.
창과 칼, 그리고 활을 다루는 기본기술을 습득한 예비군들이 각자 허수아비를 앞에 두고 섰다.
캐슬 교관이 소리쳤다.
“첫 번째는 창술이다!”
그와 동시였다.
예비군들이 눈앞에 둔 허수아비 몸 곳곳에 파랑색과 빨강색, 그리고 녹색 점들이 생성됐다. 파랑색 점은 500원짜리 동전 크기였고 빨강색 점과 녹색 점은 당구공 크기였다.
“앞으로 3분 동안 3가지 종류의 점이 번갈아가면서 떠오를 것이다. 파랑 점을 가격할 시 10점 획득, 빨강 점을 가격할 시 5점 획득, 녹색 점을 가격할 시 10점 손실이다. 3분 내에 50점 이상을 달성해야 합격이다.”
과거, 그리드가 단 한 번도 통과하지 못했던 시험이다.
3가지 색상의 점들이 너무 빨리 떠올랐다가 사라졌을 뿐더러 규칙성도 없었다. 순발력이 뛰어나지 못하고 창을 마음껏 컨트롤할 수도 없었던 과거의 그리드는 3분 내에 50점을 획득할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다르지.’
척!
오른 발을 뒤로 물린 그리드가 창을 곧추세웠다.
최강의 창술사 폰과 함께 사냥하고, 레이드하고, 대련하면서 엿봤던 창술을 떠올리고자 노력하며 창과 자신의 동선을 일자로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그리드는,
‘나는 신의 창을 이해한 사람이라고.’
무기의 구조를 이해하면, 그 무기를 어떻게 활용해야하는지 자연히 깨달을 수 있게 된다.
번쩍!
신호와 함께 눈을 부릅뜬 그리드가 창을 앞으로 뻗었다.
뻐어억-!
“……!”
너무나도 경쾌한 소리에 놀란 캐슬 교관과 조교들, 심지어 시험 중인 예비군들까지도 모두 그리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드가 앞으로 쏜 창끝, 허수아비의 미간에 떠오른 파랑 점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었다.
그를 본 모두가 감탄을 넘어서 경악하였지만, 정작 그리드 본인은 만족하지 못했다.
‘역시, 민첩성이 너무 낮아.’
창을 뻗는 속도는 둘째 치고 정밀함이 무척 떨어진다. 파랑 점의 정중앙을 노렸건만 좌측으로 크게 어긋났다.
그를 불만스레 여기며 과거의 자신을 욕하던 그리드가 문득 깨달았다.
‘크라우젤은 나처럼 투덜거리지 않았을 거다.’
그는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시련을 극복해나갔을 터고, 그러한 경험이 중첩됨으로서 지존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 내게는 한탄하고 있을 여유 따위 없어.’
보다 더 집중하고, 보다 더 노력하여 최선의 창로를 찾는다.
쩌어어어어엉-!!
이를 악 문 그리드가 내지른 창이 또 한 번 경쾌한 소리를 터뜨렸다.
허수아비의 종아리에 떠오른 파랑 점을 또 한 번 정확히 가격한 그를 보면서, 캐슬 교관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아니, 저놈이 오늘 대체 왜 저러는 거지?’
내가 알던 고문관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보는 것만 같다.
띠리리링-
잠시 넋을 놓고 있는 사이, 그리드의 허수아비 점수판이 100점을 달성하고 있었다.
“뭣이…!”
저도 모르게 소리치는 캐슬 교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1분 23초 만에 100점 달성.
어지간한 기사 견습생들조차도 넘보지 못할, 역대급 대기록을 그리드가 세운 것이다.
캐슬 교관은 지금이 꿈인지 생시인지 도통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한편, 그리드의 시야로는 알림창이 떠오르고 있었다.
[파트리안의 예비군 훈련 <창술 시험>에서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히든 보상으로 레어 스킬 <스피어 샷>을 습득하였습니다.]
<스피어 샷>Lv.1
창을 던져서 대상에게 물리 공격력 600퍼센트의 피해를 입힙니다. 맞은 적은 쓰러집니다.
*던진 창은 회수해야합니다. 30초 내로 회수하지 못할 경우 창의 소유권을 잃습니다.
마나 소모:150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1분
“헐.”
전혀 예상치 못한 이득에 혀를 내두르는 그리드였다.
던진 창을 회수해야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었으나, 파그마의 검무들과 비교하면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이 무척 짧았고 공격력도 레어스킬답게 준수했다. 더군다나 중거리 스킬인지라 여러모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터였다.
‘이거… 검술 시험이랑 궁술 시험에서도 레어 스킬 얻을 수 있는 건가?’
그리드의 의욕이 더욱 더 불타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