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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88화 (183/1,794)

템빨 18권 - 15화

퍽퍽!

퍽퍽퍽!!

그리드와 토끼무리의 전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서 도약한 토끼들의 공격을 막고, 회피한 그리드가 그대로 반격에 성공, 승기를 잡은 것이다.

찍!

꾸잉!

“하핫!”

눈을 X자 모양으로 만들고 비명횡사하는 토끼잔당들.

놈들을 보자 그리드는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토끼에게 수십 번도 더 맞아 죽었던 과거!

두 번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그 끔찍한 흑역사를 이런 식으로나마 지울 수 있게 되었으니 기쁘기 짝이 없었다. 마음이 가벼워지고 쾌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마치 새롭게 거듭난 기분이랄까.

“크하하하핫!!”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연신 웃는 그리드였다. 물론, 레이단의 영주이자 템빨단의 수장으로서 나름 신경을 쓰기는 했다. 체통을 지키고자 최대한 근엄하게 웃으려고 노력했다.

그를 보는 스틱세이의 얼굴은 혼란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홉 전설 중 하나인 파그마의 후예가 겪었던 가장 큰 시련이 토끼와의 전투였다고?’

그럴 리가 없다.

현실을 부정한 스틱세이가 재촉했다.

“그리드님, 장난은 그만두시고 이제 그만 시작해주시죠.”

이곳, 겉으로 보기엔 한없이 평화로운 숲일지언정 필시 그 끝에는 무시무시한 괴수가 도사리고 있을 터다.

‘이 나조차도 미식룡과 조우한 경험이 있으니… 그리드님 정도라면 광룡이나 염룡을 만나셨던 게 아닐까?’

‘무고한’ 토끼들을 괴롭히는 그리드의 ‘놀이’에 현혹되어선 안 된다. 이 숲속엔 드래곤 레어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이제 잠시 후면, 그리드는 드래곤과 맞서 싸우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믿은 스틱세이가 긴장감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그때였다.

번~쩍!

토끼들을 목검으로 때려잡고 있는 그리드의 몸 위로 한 줄기 섬광이 떨어졌다.

레벨 업을 상징하는 빛이었다.

그를 본 스틱세이가 현실을 직시하고 말았다.

“서, 설마… 설마 정말로 토끼 사냥이 당신의 가장 큰 시련이었던 겁니까?”

아니, 왜?

스틱세이는 도통 납득할 수가 없었다.

“험험.”

혼란스러워하는 스틱세이를 그리드는 외면했다. 창피해서 딱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헛기침하면서 알림창을 확인할 뿐이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능력치 포인트 10개를 획득하였습니다.]

‘좋아.’

레벨이 낮으면 낮을수록 스탯의 힘을 절감할 수 있다.

워낙에 기본 능력치가 낮다보니 스탯 하나만 새로 투자해도 강해지는 게 절실히 느껴지는 것이었다.

‘우선 민첩성을 10까지 맞춰놓고.’

나머지는 전부 근력에 투자한다.

전사형 초보자의 사냥 속도를 높이는 이상적인 스탯 분배였다.

[민첩성이 올랐습니다.]

[민첩성이 올랐습니다.]

[근력이 올랐습니다.]

[근력…]

3레벨을 올리는 것이 서른 번째 섬의 클리어 조건인 바.

그리드는 사냥속도를 높이고자 지체 없이 스탯을 투자하였고,

‘다음은 사슴이다.’

호숫가에서 목을 축이고 있던 사슴들이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슬금슬금.

그리드가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서 사슴에게 접근했다.

본래 2레벨 초보자는 사슴을 이기기 어렵다.

사슴의 체력과 공격력이 토끼보다 최소 3배는 더 높았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리드가 누군가?

‘나는 전설이다!’

투지를 불태우고 용기를 북돋은 그리드가 사슴사냥에 돌입했다.

사슴의 박치기와 발차기에 주의하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거리를 유지, 목검으로 사슴을 유린해나갔다.

서른 번째 섬.

도전자가 겪었던 최악의 시련을 100퍼센트 재현함으로서 도전자에게 절망을 안겨주는 최악의 관문…

랭킹 1위 크라우젤마저도 좌절을 맛봤던 그곳이 그리드의 기본기를 다져주는 수련의 장으로 변질된 날이었다.

***

[미션에 성공하였습니다.]

[도전자 포인트 500개를 획득하였습니다.]

[레벨이 정상적으로 회복됩니다.]

3레벨 초보자에서 306레벨 파그마의 후예로 회귀한 그리드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내 몸, 이렇게 대단한 거였구나.’

몸이 더 없이 가볍고 힘은 끓어 넘친다. 주먹을 한 번 뻗으면 날카로운 파공성이 폭발했고, 살짝만 도약해도 몸이 키보다 높이 떠올랐다.

10개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완벽하고 섬세하게 컨트롤할 수 있음은 기본이다.

3레벨 초보자 육체 따위와는 비교가 불허한, 과연 전설다운 초월적 육체였다.

‘그동안의 나는, 내 육체가 여기까지 성장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일 수도 있군.’

이는 즉, 육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왔다는 뜻과 일맥상통하기도 했다.

‘앞으로는 움직임 하나, 하나에 보다 더 신경을 써야겠어.’

과거와 직면한 것을 계기로 스스로를 관조할 수 있게 된 그리드.

이 순간에도 그는 실시간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스틱세이가 게슴츠레한 눈초리로 물었다.

“…파그마의 후예 맞으신 거죠?”

불신이 가득한 질문이다.

토끼, 사슴, 아기 들개들과 사투를 벌였던 그리드의 모습이 어지간히도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결국 더 이상 그를 외면할 수 없게 된 그리드가 솔직하게 고했다.

“나는 둔재다. 남들보다 늘 열등했고, 그렇기 때문에 남들은 겪지 않을 시련까지 겪어왔다. 그런 내가 전설이어선 안 되는 건가?”

반문하는 그리드의 눈빛이 당당했다.

스스로에 대한 긍지를 엿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에 절로 신뢰를 느낀 스틱세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둔재임에도 전설로 거듭난 인물.

천재 출신의 전설들보다 도리어 더 대단해보인다.

누구보다 더 노력해왔을 것을 알기에.

“어쩌면 저는, 당신을 존경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담백하게 웃으며 말하는 스틱세이였다.

그에게 미소로 화답해준 그리드가 31번째 섬으로 향하는 게이트로 발을 들였다.

***

[서른한 번째 섬에 입장하였습니다.]

31번째 섬은 스틱세이에게도 미지의 영역이었다.

바짝 긴장하고 있던 그가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보고 의아해했다.

“도시…?”

그렇다.

서른한 번째 섬은 하나의 도시를 연출하고 있었다.

4열로 늘어선 수백 채의 건물이 저 멀리 외성벽까지 닿았고, 대로는 마차와 사람들로 북적였다.

‘여긴 어디지? 시련이 무엇이기에 도시가 재현된 거지?’

추리해보고자 노력하는 스틱세이의 귓가로 그리드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곳은 요새도시 파트리안의 내부다.”

1레벨 초보시절부터 80레벨 전사가 되기까지 무려 1년을 머물렀던 도시를 잊을 리가 없다.

“하지만 왜 이곳이 재현된 걸까? 도시 안에서 죽은 기억은 채 10번도 안 되는데.”

“네? 도시 안에서 그렇게 많이 죽으셨다고요? 범죄를 저질렀다가 사형이라도 당하셨던 겁니까?”

“설마, 그럴 리가. 그냥 평범하게 길을 걷다가 마차에 치여 죽거나, 3층에서 떨어진 화분에 맞아 죽거나, 건달들한테 붙잡혀서 살해당하거나, 그랬을 뿐이야.”

“조금도 평범하지 않습니다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알림창 몇 개가 떠올랐다.

덕분에 그리드는 이곳에서 자신이 해야할 일을 알게 되었다.

[레벨이 23으로 하락합니다.]

[미션이 생성됩니다.]

<서른한 번째 섬>

당신이 가장 많은 실패를 겪었던 퀘스트와 당시 상황을 100퍼센트 재현했다.

시련을 극복하여 과거의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라!

미션 클리어 조건:과거에 실패했던 퀘스트를 성공시킨다.

최초 클리어 보상:도전자 포인트 600개.

최초 클리어 보상2:퀘스트로 얻게 되는 보상.

[지금부터 30분 후에 미션이 시작됩니다.]

“내가 가장 많이 실패했던 퀘스트?”

실패 횟수 높은 퀘스트가 원체 많은 지라 특정하기 어렵다.

기억을 떠올려보고자 노력하는 그리드의 시야 한쪽으로 황금색 느낌표가 떠올랐다.

퀘스트 창이었다.

<예비군 훈련 참가>

난이도:정기 퀘스트

파트리안은 가우스 왕국의 견제용도로 구축 된 요새도시입니다.

파트리안에 소속 된 플레이어는 향토예비군으로서 일정량의 훈련을 소화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훈련교관 캐슬 밑에서 훈련을 받으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조건:각 훈련 과목에서 합격점을 받을 것.

퀘스트 클리어 보상:합격 등수에 따라서 다름.

“아, 이 퀘스트.”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발동하던 퀘스트다.

귀찮다고 거부했다간 영창에 갇혔기 때문에 파트리안 소속 유저들은 의무적으로 수행해야만 했다.

물론 그리드도 꼬박꼬박 훈련에 참가했었다.

다만, 문제는.

‘한 번도 합격점을 받은 적이 없어…’

덕분에 보충을 몇 번이나 받았는지 모른다.

어쩔 수 없었다.

군사훈련의 의의는 쓸모 있는 병사의 육성에 있는 바.

파트리안 입장에서는 예비군을 전시에 활용할 수 있는 수준까지 육성시키고자 노력하는 게 당연했다.

그리드가 파트리안의 노력에 부응해주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훈련이 너무 어려웠으니까.’

파트리안의 예비군 훈련은 크게 무기술 훈련과 제식 훈련, 그리고 진지구축 훈련과 대련으로 구분되는데 그 난이도가 무척 높다.

‘나 말고도 합격점 못 받은 사람이 참 많았었지.’

사실은 채 10명도 안 됐지만, 어째서인지 그리드의 기억엔 수백 명쯤 되었다.

***

이름:그리드

직업:전사

레벨:23

생명력:1,161 마나:45

근력:187 체력:40

민첩성:22 지력:15

보유 스킬:

[초급 소드 마스터리Lv.2]/[초급 아머 마스터리Lv.2]/[돌격Lv.1]/[풀스윙Lv.1]

“스탯 분배 무식한 것 봐라.”

능력치 밸런스가 너무 나쁘다.

23레벨 당시의 자신을 저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체력 조금 찍은 것 빼곤 근력에 올인이군.’

민첩성과 지력이 전사의 기본 능력치 수준으로 정체되어 있었다.

공격속도와 회피율이 최저인 것은 둘째 치고 스킬을 사용할 마나조차 없는 것이다.

돌격, 혹은 풀 스윙 스킬을 한 번만 사용해도 마나가 고갈 될 기세였다.

보유 아이템:

<뭉툭한 대검>

공격력:32~71

공격속도:-3%

<낡은 해골 투구>

방어력:2

<낡은 오크 갑옷>

방어력:13

<낡은 고블린 신발>

방어력:2

‘아이템도 엉망… 아니, 기왕이면 한 종류의 몬스터만 잡으면서 셋트 아이템부터 구비했어야지, 이게 웬 짬뽕이야?’

과거의 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게임을 하였던 걸까?

‘이러니 1년 내내 게임만 했는데도 레벨을 80… 아니, 정확히는 79까지밖에 못 올렸던 거겠지.’

한숨만 나온다.

현재 상태로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제식이야 집중만 하면 되고, 진지구축은 힘쓰는 일이 대부분이니까 도리어 나하고 궁합이 좋지만.’

무기술 훈련과 대련이 문제다.

검이야 이제 수준급으로 다룰 수 있었고, 창 또한 폰의 창술을 어깨너머로 배워 나쁘지 않게 다를 수 있었지만 궁술이 걱정이었다.

보우 마스터리도 없는 마당에 민첩성까지 최하였으니, 표적에 화살 한 발이라도 꽂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스킬도 제대로 못 쓰는 마당이니 대련도 걱정이고.’

근심하는 그리드의 표정을 엿본 스틱세이가 긴장했다.

“이번 시련의 난이도가 무척이나 높은 것입니까? 설마…! 이번에야 말로 드래곤과 혈투를…!”

미식룡에게 저주를 받고 질병을 얻었다더니, 드래곤 트라우마가 어지간히도 강한가보다.

“걱정마. 나와 함께 있으면 드래곤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

스틱세이를 안심시켜준 그리드가 심호흡했다.

‘지금의 나를 믿자.’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한 이후, 일반적인 유저들은 결코 홀로 감당할 수 없을 난적들을 무수히도 상대해왔다.

지금의 내게는 과거의 나를 극복할 자격이 충분하고도 남는다.

“가자.”

마음을 다잡은 그리드가 훈련소로 입장했다.

연병장을 가로지르는 그를 발견한 교관이 버럭 소리 질렀다.

“거기, 고문관! 또 지각이냐! 빨랑빨랑튀어 와라, 이 개만도 못한 자식아!!”

“……!”

고문관!

기억에서 지웠던 수치스러운 별명이다.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린 그리드가 교관을 찌릿, 노려보았다.

캐슬 훈련교관.

과거의 나를 개처럼 무시하고 죽도록 괴롭혔던 놈!

‘당시의 나는 너만 보면 빌빌 기었을지 몰라도…!’

이젠 아니다.

‘네놈의 얼굴을 경악으로 물들여주마!’

결심하는 그리드의 투지가 끓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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