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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87화 (182/1,794)

템빨 18권 - 14화

스틱세이의 말에 따르면, 200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 번헨 열도는 아름답고 거룩한 장소였다. 전대의 전설과 당대의 전설을 잇는 계승의 장으로서 성역이라 칭송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이야기다.

지금의 번헨 열도는 온갖 위험이 들끓는 시련의 장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스틱세이로서도 알 도리가 없었다.

마지막 섬까지 도달한다면 답을 찾게 되리라, 막연히 추측할 뿐이었다.

“반드시 해답을 찾아야만 합니다. 계승의 장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을 경우, 당대의 전설들은 반쪽짜리로서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없으니까요.”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인데?”

스틱세이는 전설이 아니다.

명예의 전당이 제 기능을 못한다고 해서 그가 손해 볼 일은 딱히 없었다.

“당신이 이곳을 정화시키겠답시고 97년이라는 세월을 희생한 이유, 나로서는 도무지 모르겠군. 내 입장에선 고맙지만.”

상냥한 미소를 지은 스틱세이가 이유를 설명했다.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려면 전설들의 힘이 꼭 필요하니까요.”

“세계의 질서?”

뜬구름 잡는 소리였지만 그리드는 대충 감을 잡았다.

“어쨌든, 모두를 위해서 애쓰는 중이다 이거지?”

“예.”

“고귀한 사명감이다.”

조롱이 아니다.

내 아들 로드와 사랑하는 아이린, 둘도 없는 벗 칸과 피아로, 그리고 쥬드와 라빗에 이르기까지.

그리드는 그들이 사는 이 세계를 소중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를지언정 세계의 질서를 위해 희생하였다는 스틱세이를 존중하지 않을 리 없었다.

“당신의 그간 노고에 내가 보답하겠어. 나만 믿어.”

자신감 넘치게 말한 그리드가 서른 번째 섬으로 향하는 게이트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경악했다.

[서른 번째 섬에 입장하였습니다.]

[레벨이 1로 하락합니다.]

“어, 엉?”

그리드가 두 눈을 의심했다.

레벨이 1로 하락하다니?

인지능력이 따라가질 않는다.

‘이게 무슨.’

혼란스러워하는 그리드를 뒤쫓아 온 스틱세이가 한숨을 토했다.

“몸에 변화가 생기셨지요? 제가 이곳을 돌파하지 못한 이유입니다. 매우 강력한 저주가 걸려있어서 본신의 힘을 끌어낼 수가 없어요.”

“…”

아니, 저주고 나발이고 간에 1레벨이 되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붕어처럼 입만 뻥긋거리는 그리드에게 스틱세이가 설명해나갔다.

“이곳은 도전자의 악몽을 고스란히 재현하죠.”

서른 번째 섬, 나이트메어.

“도전자가 살면서 겪었던 시련 중 가장 큰 시련을 연출하는 섬입니다. 저의 경우엔 세계수 앞에서 미식룡 레이더스와 대치하게 되는데, 당시의 제 정령술이 지금과 비교하면 빈약하여 레이더스로부터 절대 도망칠 수가 없죠. 하여 전 결코 서른 번째 섬을 돌파할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부디 당신만큼은 과거에 겪었던 시련의 무게가 무겁지 않기를 빕니다.”

“…?”

스틱세이의 말을 들어나가는 그리드의 머리 위로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내가 겪었던 가장 큰 시련은 파그마의 기서를 찾아다닐 때였는데?’

왜 그때의 레벨과 상황이 재현되질 않고 1레벨이 된 걸까?

기껏해야 1레벨 때 내가 얼마나 큰 시련을 겪었다고?

“…아.”

의아해하면서 섬의 풍경을 살피던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서른 번째 섬이 재현한 공간.

요새도시 파트리안의 초보존임을 뒤늦게 자각한 것이다.

‘나, 토끼랑 사슴한테 맞아 죽은 게 수십 번이었지.’

자기방어기제로서 봉인해두었던 흑역사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

“피아로의 개입이 있었던 게로군.”

랭킹 1위 크라우젤과 최초의 레전드리 클래스 전직자 그리드의 대결.

당시의 녹화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한 임철호 회장이 결과를 납득했다.

“하지만 설마… 크라우젤이 피아로에게 도전할 줄은 몰랐어.”

쉽게 전직할 수 있는 방법을 놔두고 현존 최강자에게 도전하는 어려운 길을 선택하다니, 크라우젤의 자긍심과 도전정신은 예측 이상으로 높은 것일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맥주 캔을 비운 임철호 회장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보다 저 피아로라는 인물, 설마 저렇게까지 성장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했는데.”

계승되는 9개 레전드리 클래스와 별개 되는 새로운 레전드리 클래스를 창조한 것으로 모자라 어느덧 400레벨이 넘었다.

피아로의 현재 모습은 최초의 기획의도와는 매우 상반되는 것이었다.

‘본래는 황비 마리 에피소드, 제3황자 에피소드, 이민족 연합 에피소드의 열쇠로 준비해놓은 인물이었는데.’

증오와 복수심만으로 점철되어 있던 인물을 한곳에 정착시킨 후 새로운 길을 걷게끔 만들다니, 그리드의 솜씨가 놀라울 따름이다.

‘NPC의 인과관계를 해소해줌으로서 가신으로 만들고 적극 활용한다라…’

Satisfy의 높은 자유도를 철저히 이용하는 게임 플레이 능력이다.

그리드가 처음부터 끝까지 의도해서 이뤄낸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음.”

3캔 째 맥주를 비운 임철호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장고에서 새 맥주를 꺼내기 위함이었다.

그때였다.

[SH100B7 퀘스트가 실행되었습니다.]

“……!”

슈퍼컴퓨터 모르페우스의 보고를 접한 임철호 회장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구에 의해서 실행된 거지?”

사실 무의미한 질문이다.

SH100B7 퀘스트.

<레전드리 클래스 플레이어>가 <오염 된 번헨 열도>의 25번째 섬에 도달할 경우 발동되는 퀘스트다.

그리고 현재 시점에 레전드리 클래스 플레이어는 단 두 명밖에 없었다.

그리드와 유라.

하지만 유라의 레벨은 아직 너무 낮다.

[그리드입니다.]

“끄응, 역시 그런가.”

임철호 회장이 안타까워했다.

그리드의 현재 솜씨로는 오염 된 번헨 열도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없었으니까.

“25번째 섬까지는 아이템을 잘 활용함으로서 비교적 쉽게 클리어할 수 있었겠지만…”

30번째 섬부터는 보다 고차원적인 컨트롤 능력이 요구된다. 템빨이 아예 적용되지 않는 관문이 대부분인지라 그리드와는 상극이었다.

“그리드가 지금의 성장세를 유지하여 반 년 후쯤에 도전했다면 또 모를까, 현재로서는 퀘스트 클리어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겠지?”

질문하는 임철호 회장에게 모르페우스가 의외의 답변을 내놓았다.

[그리드의 SH100B7 퀘스트 클리어 확률은 88.19퍼센트입니다. 그가 겪었던 시련들의 난이도가 무척 낮습니다.]

“…”

임철호 회장이 치킨 한 마리를 더 시켰다.

그리드를 실시간 모니터링할 계획이었다.

***

<서른 번째 섬>

당신이 가장 많은 죽음을 겪었던 공간과 당시 상황을 100퍼센트 재현했다.

시련을 극복하여 과거의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라!

미션 클리어 조건:레벨을 3개 올린다.

최초 클리어 보상:도전자 포인트 500개.

[지금부터 30분 후에 미션이 시작됩니다.]

‘가장 많은 죽음을 겪었던 공간…’

그렇게 해서 재현 된 공간이 파트리안의 초보존이다.

가상현실게임을 처음 시작했을 당시 그리드가 얼마나 무능력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깡충깡충!

월월! 월월월!!

숲을 노니는 토끼들, 호숫가에서 목을 축이는 사슴들, 저들끼리 장난치는 어린 들개들.

지극히 평화로운 숲의 풍경을 긴장한 채 관찰하던 스틱세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가 왜 시련의 장으로 선택된 거죠?”

의아해하는 스틱세이에게 그리드는 설명하기가 부끄러웠다.

저 토끼들과 사슴들이 당시의 내겐 미식룡 레이더스처럼 무서운 존재들이었다, 라고 솔직히 고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뭐라 딱히 둘러댈 말도 없었던 지라 입을 다물고 상태창이나 열었다.

이름:그리드

직업:초보자

생명력:123 마나:15

근력:6 체력:7

민첩성:4 지력:5

보유 스킬:없음

“…”

당시 상황을 100퍼센트 재현했다더니, 칭호와 직업조차도 초기화되었다.

무장한 장비라고는 초보자용 목검과 천 옷이 전부다.

기껏 힘들게 모아온 지존급 아이템들은 죄다 사용불가 상태로 설정되어 있었다.

눈치 없는 스틱세이가 연신 떠들어댔다.

“여긴 어딥니까? 너무 평범해서 장소를 특정 짓기가 어렵군요. 혹시 이 숲의 끝에 엄청난 괴물이 있는 겁니까? 파그마의 후예인 당신에게 시련을 주었을 정도의 상대라면… 헉, 설마 당신도 드래곤을 만났던 겁니까? 이런… 역시 서른 번째 섬의 난이도는 도전자의 실력과 비례하여 높아지는 거군요.”

“…”

그리드는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틱세이를 무시하고 초원을 성큼성큼 걸어 나가더니 풀을 뜯고 있는 토끼의 곁으로 다가갔다.

‘복수해주마.’

아직 내가 가상현실게임에 적응하지 못했던 시절.

손가락과 발가락은 아예 움직이지도 못하고, 팔과 다리는 따로 놀던 그때!

‘나를 앞니로 찔러 죽였던 흰 토끼, 뒷발로 때려 죽였던 검은 토끼, 박치기로 밀쳐 죽였던 회색 토끼!’

이 가증스러운 놈들에게 유린당했던 치욕의 역사를 이참에 완전히 씻어내고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 가리라!

부웅~

마음을 단단히 먹은 그리드가 힘껏 목검을 휘둘렀다.

한데 목검이 날아가는 속도가 무척 느렸다. 토끼가 깡충 뛰어서 피해버릴 수준이었다.

“큭.”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리드의 근력은 2,800, 민첩성은 1,800 이상이었다.

각자 6과 4로 낮아진 근력과 민첩성에 바로 적응하기란 무리가 있었다.

건강한 성인에서 갓 태어난 아기로 퇴화된 감각이랄까?

본인의 느려터지고 맥없는 공격에 당황한 그리드가 치를 떠는 사이, 눈을 번뜩인 토끼가 뛰어올라 그리드에게 반격을 가했다.

과거, 그리드의 턱에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박치기를 적중시킴으로서 그리드에게 지옥을 선사했던 회색 토끼의 훌륭한 역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리드를 상대로 녀석의 박치기는 통하지 않았다.

슬쩍.

파그마의 검무, 연(聯)의 묘리를 살린 보법을 밟은 그리드가 몸을 좌측으로 틀어 회색 토끼의 박치기를 피해버렸다.

일반적인 1레벨 유저들은 결코 선보일 수 없는, 무척이나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거의 60레벨급 유저나 선보일 수 있는 수준의 몸놀림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레벨 초보자 스탯의 몸뚱이로 이만한 움직임을 선보인 이상 기네스북에 등재 되도 좋을 정도였다.

“좋아!”

스스로의 실력에 감탄한 그리드가 한껏 달아올랐다.

하지만 방심할 때가 아니었다.

동족의 공격이 수포로 돌아감을 보고 상대가 보기와 달리 제법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토끼들이 협공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그리드의 얼굴이 긴장감으로 굳었다.

과거의 그였다면 머리가 새하얘져서는 토끼들의 협공을 그대로 허용했을 터다.

하지만 지금의 그리드는 달랐다.

“나는…!”

터엉-!

최대의 집중력을 발휘한 그리드가 흰 토끼의 길고 뾰족한 앞니를 목검으로 막았다. 그와 동시에 주먹을 뻗었다.

뻐억!

배때기를 주먹에 세게 얻어맞은 흰 토끼가 눈물을 글썽였다. 녀석의 빛나는 눈동자에 검은 토끼의 모습이 비췄다.

그를 보고 허리를 비트는 그리드의 가슴팍으로 검은 토끼의 발차기가 스쳐지나갔다.

‘가소로운 녀석.’

콧방귀 뀐 그리드가 목검을 아래로 힘껏 찍었다.

빠악!

찍!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검은 토끼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녀석을 발로 걷어찬 그리드가 포효했다.

“나는 전설이다!!!”

현재 그리드는 스탯 이상의 전투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어느새 6의 근력과 4의 민첩성에 완전히 적응, 몸을 자유자재로 다룸과 동시에 목검 또한 수준급으로 활용함으로서 토끼들의 급소를 정확히 가격했다.

과연 야탄의 종들과 교황 드레비고, 대악마 헬가오, 뱀파이어 백작 엘핀스톤 등의 강력한 보스들을 레이드하고 전설 피아로, 랭킹 1위 크라우젤과 대련한 경험이 있는 강자의 위용이었다.

퍼억! 퍽퍽! 퍼퍼퍽!!

[흰 토끼를 해치웠습니다.]

[경험치 5를 획득하였습니다.]

[검은 토끼를 해치웠습니다.]

[경험치 5를 획득하였습니다.]

..

싸우면 싸울수록 그리드의 타격 솜씨가 더욱 정교해졌다.

도무지 1레벨 초보자라고는 믿을 수 없는 훌륭한 실력으로 토끼들을 때려잡았다.

하지만 그를 곁에서 지켜보는 스틱세이의 눈빛엔 일말의 감흥도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같은 시각, 레이단.

“아부부! 아부우~!!”

부친 그리드가 제작해준 <유아용 목검>을 무장한 로드가 일반적인 토끼보다 최소 2배 이상 강력한 ‘사막 토끼’를 사냥하고 있었다.

엉금엉금 기어 다니면서 토끼들을 때려잡는 로드의 모습이 기가 막혔다. 한때 검성을 꿈꿨던 피아로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공자께서는 검술의 재능마저도 탁월하시구나.’

어쩌면, 최고의 천재 크라우젤마도 넘어서는 재능이 아닐까 생각해보는 피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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