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8권 - 13화
스물다섯 번째 섬은 작고 초라했다.
10평 남짓 크기에 야자나무 한 그루가 전부다.
나무그늘 아래에 스틱세이를 눕힌 그리드가 재촉했다.
“이봐, 살고 싶다면 엘프족 영약의 조제법을 어서 말해.”
“윽… 허윽.”
비 오듯 땀 흘리는 스틱세이의 호흡이 불편하다. 말 한 마디 꺼내기 어려워할 정도였으니 상태가 정말로 심각했다.
급한 대로 각종 포션을 먹여보는 그리드였으나 별반 효과가 없었다.
도우미 요정 빈이 호들갑을 떨었다.
“도전자님! 어서 스틱세이를 살려주세요!!”
어떻게 해야 할까?
과거의 그리드였다면, 어찌해야할지 모른 채 우왕좌왕했을 터다.
하지만 크라우젤과 만나고 번헨 열도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그는 크게 발전했다.
확장 된 사고력을 기반으로 작금의 사태를 극복할 수단을 떠올린다.
“믿고 기다려라.”
차분한 음성으로 빈을 진정시킨 그리드가 한 자루 보검을 꺼내 쥐었다.
<대영주의 검>
각국의 공작급 귀족에게만 하사되는 진귀한 보검으로서 착용자의 통찰력과 위엄, 그리고 통솔력을 대폭 상승시켜준다.
또한 <캐릭터 관찰>스킬을 통해서 대상 NPC의 능력치와 에피소드를 엿볼 수 있다는 장점을 보유한 최상급 아티팩트였다.
‘스틱세이, 살고 싶다면 내게 힌트를 내놔.’
[캐릭터 관찰을 사용합니다.]
띠링~
이름:스틱세이
나이:881세 성별:남
종족:하이엘프 직업:현자
칭호:지는 별
*어질고 총명한 이입니다. 광범위한 지식을 쌓고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오랫동안 격리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지식은 낡았습니다.
레벨:401
근력:403(▼) 체력:880(▼)
민첩:1,201(▼) 지력:1,930(▼)
지혜:2,876(▼) 매력:2,490
스킬:[궁술(B)]/[사회과학(B▼)]/[공학(B▼)]/[의학(B▼)]/[인문학(B▼)]/[예술(S)]/[마법학(S)]/[자연과학(S▼)]/[정령학(S+)]/[학습(SS)]/[교육(SS)]
고귀한 혈통의 하이엘프입니다.
본디 영생에 가까운 수명을 누려야하지만, 세계수를 지키는 과정에서 미식룡 레이더스의 노여움을 사고 질병을 얻었습니다.
*현재 이 인물은 전반적인 능력치가 하락한 상태입니다.
세계수는 요정의 숲에 자리잡고 있다.
즉, 스틱세이는 본래 요정의 숲에 있던 인물이라는 뜻이다.
그가 번헨 열도까지 찾아온 경위가 뭘까?
생각해본 그리드가 빈에게 시선을 돌렸다.
“스틱세이가 번헨 열도를 찾아온 이유가 뭐지? 혹시 레이더스로부터 얻은 질병과 관련이 있나?”
“네, 맞아요! 이곳을 방문한 본래 목적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였어요!”
“여기에서만 자라는 약재라도 있는 거냐?”
“그건 잘 모르겠어요. 이곳에 온 뒤로 스틱세이는 블루 코코넛만 먹었… 아!”
“그거군.”
병을 고칠 수단일 터다.
그리드가 야자나무 위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파랑색 야자열매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갓 핸드를 소환, 열매를 따오게끔 시킨 그리드가 그것을 스틱세이에게 들이밀었다.
“이걸 먹으면 좀 진정할 수 있겠나?”
블루 코코넛을 보고 힘을 낸 스틱세이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 그것에 세계수의 잎사귀를…”
“섞으라는 건가?”
고개를 끄덕이는 스틱세이였다.
확인한 그리드가 코코넛 껍질을 자른 후 빈에게 눈짓했다.
“세계수의 잎사귀는?”
“제가 찾아볼게요!”
주섬주섬.
빈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스틱세이의 로브 속을 뒤졌다. 그리고 잠시 후, 생기 가득한 초록 잎사귀 몇 개를 꺼내 그리드에게 건네주었다.
[세계수의 잎사귀(6)를 얻었습니다.]
<세계수의 잎사귀>
자연을 수호하는 세계수의 정기가 깃들어 있는 잎사귀입니다. 수백 년이 지나도 메마르지 않습니다.
무게:0.1
“몇 대 몇 비율로 섞어야하지?”
잎사귀를 감정한 후 질문하는 그리드에게 스틱세이가 손가락 하나를 펼쳐보였고, 그리드는 눈치껏 코코넛에 세계수 잎사귀 하나를 넣은 후 잘 섞었다.
그러자 신비한 일이 발생했다.
코코넛 열매 속 투명하던 액체가 에메랄드빛으로 변해가는 것이었다.
[<엘프족의 영약>의 조제에 성공하였습니다!]
[<조제법:엘프족의 영약>을 습득하였습니다!]
<엘프족의 영약>
모든 상태이상을 즉시 회복한다.
무척 뛰어난 효과를 자랑하지만 조제법은 지극히 간단하다.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다.
그리드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모든 상태이상을 회복한다니!’
실로 엄청난 비약이다.
엘핀스톤 레이드 당시, 이 영약을 템빨단원들에게 지급해줄 수만 있었다면 그토록 힘든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터다.
‘하지만 문제는 세계수의 잎사귀와 블루 코코넛을 어떻게 대량으로 확보하느냐는 건데.’
벌컥벌컥!
열흘 동안 갈증을 호소하던 사람이 물을 마시게 되면 이럴까?
그리드가 고심하는 사이, 스틱세이는 엘프족 영약을 게눈 감추듯이 먹어치우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리드의 시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스틱세이의 응급처치에 성공하였습니다!]
[엘프족은 결코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당신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게 된 스틱세이가 앞으로 당신에게 절대적인 호감을 보일 것입니다!]
“허억… 허억… 감사합니다. 당신 덕분에 큰 위기를 넘길 수 있었군요.”
몸을 일으킨 스틱세이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저는 하이엘프 스틱세이라고 합니다. 은인의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혈색을 회복한 스틱세이의 미모는 전보다 더욱 더 빛나고 있었다.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유라, 지슈카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으니 과연 미의 종족 엘프답다.
“그리드.”
짤막하게 대답하는 그리드에게 스틱세이가 재차 물었다.
“당신께서는 파그마의 후예가 맞으십니까?”
“맞다. 그건 어떻게 알았지?”
스틱세이가 유리처럼 투명한 마법구를 꺼내보였다.
“이를 통해서 당신을 관찰하던 도중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강력한 검술, 온갖 아티팩트를 보유하고 활용하는 능력. 또한 훌륭한 대장일 솜씨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특징들을 종합해 봤을 때 떠오른 인물은 오직 하나, 파그마밖에 없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오염 된 명예의 전당이란 뭐지?”
“현재의 번헨 열도를 지칭한 겁니다. 이곳 번헨 열도의 본래 이름, 명예의 전당이었으니까요.”
“명예의 전당은 뭔데?”
“역대 전설들의 위업을 기리는 신성한 장소임과 동시에…”
그리드를 직시하는 스틱세이의 황금빛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났다.
“전대의 전설이 남겨놓은 힘을 당대의 전설에게 양도하는 계승의 장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이곳을 찾게 된 일 또한 숙명이겠지요.”
“뭐?”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고양되는 그리드의 시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레전드리 클래스 공용 전직 퀘스트 <명예의 전당>이 생성됩니다.]
[레전드리 클래스 공용 전직 퀘스트 <명예의 전당>이 ★히든 퀘스트★ <오염 된 명예의 전당>으로 변경됩니다.]
***
체다카 길드 출신 템빨단원들과 유라, 후로이, 극검.
이들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뱀파이어의 도시에 터를 잡고 사냥을 반복하였으니 레벨이 광속으로 올랐고 그 탓에 랭킹계가 매일 같이 들썩였다.
특히 흡혈 반지의 도움이 컸다.
도란의 반지와 성스러운 빛의 갑옷 효과를 꾸준히 누려온 그리드와 달리, 평범한(?) 유저인 이들에게 있어서 생명력 회복 아이템은 무척이나 절실했던 것이다.
“우리 다음 도시로 넘어가자.”
10번 도시.
Satisfy시간으로 두 달 전, 그리드가 브라함의 영혼과 조우했던 장소다.
템빨단원들은 더 이상 강력한 보스가 등장하지 않는 이곳에 흥미를 잃고 있었다.
더욱 더 빠른 성장을 위해서 더욱 더 강한 적을 원했다.
“혹시라도 마리로즈라는 뱀파이어와 마주치지 않도록, 함부로 영역을 넓히지 말라던 주군의 말씀을 너희들은 잊었나?”
“막말로 마리로즈가 아니라 엘핀스톤급 보스라도 만나면 어떡해? 이번엔 갓리드도 없다고.”
그리드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후로이와 극검이 만류했다.
하지만 전 체다카 길드원들과 유라가 누군가?
이들은 늘 지존을 꿈꿔왔던 인물들이다.
기본적인 이상이 매우 높았다.
“강한 적을 만나면 그것도 경험이지.”
“설령 죽으면 어때? 당장의 손실이 두려워서 정체되는 것보단, 희생을 겪더라도 보다 좋은 사냥터를 찾아내는 게 나아. 모험은 성장의 기본이다.”
“그리고 엘핀스톤급 보스는 이제 우리들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레이드할 수 있다고.”
템빨단원들의 호승심이 들끓고 있었다.
그리드가 크라우젤을 쓰러뜨리는 장면을 목격한 게 문제였다.
크라우젤을 하늘 밖의 하늘이라 칭송하며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라 여겼던 이들, 그 벽을 부수고 넘어선 그리드를 보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어째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한계를 정해놨던가?
왜 도전해보지도 않고 좌절을 겪었던가!
“새로운 도전을 할 때야.”
“설사 엘핀스톤보다 강한 뱀파이어를 만나게 되더라도 너무 걱정 말아요. 이번엔 제가 여러분 곁에 있으니까.”
늘 길드원들을 중재해왔던 지슈카와 유라조차도 급진파의 뜻에 동조하고 있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후로이와 극검도 더 이상 말릴 수가 없었다.
결국 이날.
유라와 지슈카를 필두로 한 뱀파이어 원정대가 9번 도시로 입장했다.
***
지금으로부터 97년 전.
블루 코코넛을 채집하기 위해서 번헨 열도를 방문했던 스틱세이는 경악했다.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외곽의 섬들은 역대 전설들을 칭송하는 비석들이 가득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중심부 섬들은 당대 전설들을 위한 성역으로 존재하였던 번헨 열도.
그곳이 누군가에 의해 변질되어 시련으로 들끓었으니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태였다.
“당대의 전설이 진정한 전설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전대의 전설이 남겨놓은 힘을 계승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데 온갖 시련들이 전설의 출입을 방해하고 있었으니 저로서는 희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웅을 기다리고, 그에게 번헨 열도의 중요성을 알린 뒤 함께 정화해나간다.
오로지 이날을 꿈꾸며 스틱세이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스물아홉 번째 섬에 입장하였습니다.]
[세이브 포인트가 존재합니다. 위치를 저장하시겠습니까?]
[등록되었습니다. 이후 번헨 열도에 입장 시, 스물아홉 번째 섬부터 시작합니다.]
스틱세이의 긴 이야기를 들으며 이동해온 그리드.
어느덧 서른 번째 섬으로 향하는 게이트를 눈앞에 두게 된 그가 최대한 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의 노고가 헛되지 않게끔, 내가 최선을 다 하겠어.”
그리드는 스틱세이가 보유한 수많은 스킬 중에서도 특히 학습과 교육이라는 스킬을 탐내고 있었다.
스틱세이를 학습시켜서 더욱 더 성장시킨 다음, 레이단의 인재들과 내 아들 로드를 교육시키게끔 한다면?
한 마디로 최고다.
그렇다.
그리드는 스틱세이를 가신으로 삼겠다는 결심을 세우고 있었다.
그렇기에 최대한의 호의를 보이고자 노력하는 것이었다.
“나만 믿어.”
자신감 넘치게 말한 그리드가 서른 번째 섬으로 향하는 게이트에 발을 들였다.
그 순간이었다.
[서른 번째 섬에 입장하였습니다.]
[레벨이 1로 하락합니다.]
“…엉?”
그리드가 두 눈을 의심하였고,
“이게 제가 이곳을 돌파하지 못했던 이유입니다.”
뒤늦게 쫓아온 스틱세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매우 강력한 저주가 걸려있습니다. 본신의 힘을 끌어낼 수가 없어요.”
“…”
그리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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