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8권 - 11화
[스무 번째 섬에 입장하였습니다.]
“허억… 허억…”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리드의 안색이 초췌하다.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가 19개의 섬을 돌파하면서 소모한 시간은 총 45시간 19분.
현실 시간으로 따지면 무려 15시간 이상이라는 뜻이다.
15시간 동안 가상현실게임에 접속해있는 일, 결코 쉽지 않았다.
생리적인 문제는 기본이고 정신력과 체력의 소모가 너무 컸다.
‘11번째 섬부터 시간 낭비가 심했다.’
11번째부터 19번째까지의 섬들은 사냥, 혹은 레이드 형태의 미션을 부여했다. 필연적으로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고 이는 그리드의 피로를 급격하게 불리는 원인이 되었다.
‘오늘은 이만하는 편이 낫겠어.’
번헨 열도의 공략에 시간제한은 없다.
굳이 조급하게 굴었다가 위험을 자처할 이유, 어디에도 없었다.
마침 레벨도 올라 306레벨을 달성한 바, 기분 좋게 미련을 접고 로그아웃하려던 그리드가 문득 멈췄다.
‘뭐지?’
하늘에 드리우기 시작한 거대한 그림자가 섬의 표면을 검게 물들였다. 마치 밤이라도 된 것만 같다.
“저건…!”
의문을 품고 고개를 들어본 그리드가 경악했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원구가 태양을 가리고 있음이 보였다.
수천, 수만 개의 눈을 지닌 원구였다.
“으윽.”
역겨움을 느낀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삐져나오려는 토악질을 삼키고자 애써야만 했다.
그만큼 원구의 생김새가 기괴망측했다.
혈관처럼 꿈틀거리는 표면과 쉬지 않고 껌뻑거리는 무수한 눈동자.
핏발 선 시선의 집중포화가 인간의 공포심과 혐오감을 극한까지 자극해왔다.
이번 미션은 뭘까?
정체불명 원구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는 그리드의 시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미션이 생성됩니다.]
<스무 번째 섬>
지옥달의 시선을 피하라!
최초 클리어 보상:도전자 포인트 130개.
[지금부터 30분 후에 미션이 시작됩니다.]
‘지옥달?’
지옥의 달은 저렇게 생겼다는 말인가?
‘설마.’
그리드는 지옥을 방문한 경험이 있다.
그가 본 지옥이란 인간들의 세상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저런 끔찍한 모양의 달이 뜬다고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혹시 또 모르지. 내가 갔을 때 지옥은 낮이었으니까.’
보고 있자니 역겹다.
하지만 미션의 목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관찰해야할 의무가 있다.
이를 악 문 그리드가 지옥달을 살피는 그때였다.
[도우미 요정이 등장합니다.]
19번째 섬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시스템이 발동되었다.
“안녕하세요, 도전자님.”
키가 50센티미터는 될까?
빛과 함께 나타난 작은 소년 요정이 인사해온다.
행동과 말투는 지극히 공손하였으나 표정만큼은 장난기가 가득했다.
“넌 뭐냐?”
짐짓 당황해서 묻는 그리드에게 요정이 설명했다.
“저는 현자 스틱세이의 부탁을 받고 도전자들의 도우미역을 맡게 된 사랑과 정의의 요정, 빈이라고 해요.”
“스틱세이의 부탁?”
“네, 스틱세이는 슬기롭고 뛰어난 도전자가 나타나 이곳 번헨 열도를 공략해주길 애타게 기다리는 중이거든요.”
“공략해주길 바라고 있다…?”
그리드는 섬마다 존재하는 시련들이 스틱세이의 수작이라고 생각했었다.
‘동대륙으로 가고 싶은 자, 자격을 증명하라.’는 뜻을 품은 수작 말이다.
한데 이제 보니 착각이었다.
“스틱세이가 아니라면, 매 섬마다 시련을 준비해놓은 건 대체 누구지?”
“그건 몰라요. 이곳은 처음부터 이랬어요.”
“마지막 섬에는 무엇이 있는 거냐?”
“그것도 저는 몰라요. 스틱세이를 만나면 물어보세요.”
“…도우미 요정이라더니, 개뿔. 도움이라곤 하나도 안 되네.”
“아뇨, 전 필시 도움이 될 거에요. 제가 맡은 역할은 도전자들이 시련을 극복할 수 있게끔 조언해주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좀 진즉에 나타나지 그랬어?”
“어중이떠중이들을 일일이 도와줄 순 없죠! 저는 자력으로 스무 번째 섬까지 도달한 도전자들만 도와준다고요! 자, 그럼 이제부터 집중해주세요!!”
해맑게 웃으며 안경을 꺼내 낀 빈이 설명을 시작했다.
“스무 번째 섬을 탈출하려면 지옥달의 시선을 피해야만 해요. 하지만 지옥달의 눈은 66,666개라는 설이 있어요. 이 섬 내에서 지옥달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단 뜻이죠.”
“그럼 어떻게 탈출하라는 거지?”
“사람이 아닌 척 하세요.”
“뭐?”
사람에게 사람이 아닌 척 하라니?
‘가만.’
황당한 주문에 당황하던 그리드가 흑화를 떠올렸다.
“마족으로 변신하면 되나?”
“와우, 도전자님은 흑화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건가요? 과연 이곳까지 올 정도의 실력자답네요! 하지만 아쉽게도 틀렸어요. 그건 정답이 아니에요. 지옥달은 모든 살아있는 생물에게 적대적이니까요.”
“그럼 처음부터 생물이라고 하던가.”
“도전자님이 인간이니까 눈높이에 맞게끔 설명하려다보니. 헤헷.”
“그래서, 생물이 아닌 척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멈추세요.”
“…?”
“지옥달은 멈춰있는 존재를 생물로 인식하지 않아요. 지옥달의 눈이 뜨여있을 때는 오로지 멈춰 있으세요. 그리고 정확히 5초에 한 번씩, 지옥달이 모든 눈을 감을 때마다 한 걸음씩 천천히 이동하시면 되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익숙한 게임을 떠올린 그리드가 섬의 전경을 살폈다.
그리고 눈살을 확 찌푸렸다.
섬의 크기가 상당하다. 족히 여의도의 두 배, 세 배는 되어보였다.
“5초에 한 걸음씩 이동해서… 어디까지 도달해야하는 거지?”
질문하는 그리드의 음성이 바들바들 떨렸다.
눈치 없는 빈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섬의 반대편 끝까지요. 다음 섬으로 향하는 게이트가 거기에 있거든요.”
“…”
사람의 사고력이 높아지고 현명해질 경우, 성격까지 변할까?
그렇지 않다.
가식적으로 스스로를 포장하는 능력이 발달할지는 모르나, 사고의 확장은 본질적인 성격을 바꿀 정도의 계기는 되지 못했다.
“너 미쳤냐?”
결국 성깔을 드러낸 그리드가 빈이 입고 있는 기저귀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그 탓에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반쯤 드러내게 된 빈이 무척이나 당황했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요!”
질색하는 빈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민 그리드가 도끼눈을 뜨고서 반문했다.
“5초에 한 걸음씩 이동하는 게 이 섬을 통과하는 방법입니다, 라는 터무니없는 개소리나 지껄이는 네가 도우미를 자칭하는 꼴이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냐? 도움을 주려면 제대로 줘야지, 지금 넌 사람 놀리는 것밖에 안 돼.”
빈이 알려준 방법대로 섬을 통과하려면 몇날 며칠이 걸릴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애초에 내 집중력과 인내력이 유지될지도 의문이다.
‘만약 멈춰있을 때 몬스터의 습격이라도 당하게 되면 최악이고.’
이를 바득바득 가는 그리드에게 빈이 다급히 설명했다.
“12시간! 앞으로 12시간 후에 태양이 뜰 때까지만 버티면 되요! 태양이 뜨면 지옥달이 자취를 감추니까요!”
“밤 시간 동안에는 5초에 한 걸음만 이동할 수 있는 반면, 낮 시간 동안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건가?”
“맞아요! 낮에는 지옥달과 눈치싸움하고, 밤에는 이동하고! 그렇게 몇날며칠만 고생하면 되요! 잠도 제대로 못자고 힘들겠지만요!”
‘아무리 그래도 난이도가 너무 높은데.’
30번째 섬까지 도달하였다는 크라우젤이 새삼 더 대단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가만… 혹시 그거라면?’
빈의 기저귀를 놓아주고 머리를 굴려본 그리드가 기막힌 발상을 떠올렸다.
실패작 이후 두 번째로 창조했었던 아이템.
그것을 활용하면 어떨까?
“지옥달은 시각 외의 다른 감각기관도 발달했나?”
“아니요. 그런 말은 못 들어봤어요.”
스틱세이가 지켜보고 있을 게 뻔한데 엉덩이를 내놓게 되다니…
수치심에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도우미 요정답게 친절히 대답하는 빈이었다.
“그렇단 말이지?”
그리드의 입가로 짙은 미소가 번졌다.
지옥달의 시선을 확정적으로 회피할 방법이 떠오른 까닭이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충분한 휴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로그아웃.”
***
“아이고, 좋다.”
기분 좋은 숙면을 취한 후.
스트레칭 하면서 거실로 나오는 영우에게 세희가 말했다.
“도민주 팀장님한테 전화 왔었어.”
“도민주 팀장?”
그녀는 세인트 건설의 젊은 엘리트다.
세인트 건설.
대기업 계열도 아니면서 대한민국 건설도급 순위 5위에 빛나는 최고의 건설회사.
100억이 투입 된 영우의 빌딩 시공을 맡은 업체이기도 하다.
“도민주 팀장이 왜?”
“건물 잘 짓고 있다는 중간보고. 오빠한테 현장 구경 좀 나오라던데? 자기 건물 짓는데 시찰 한 번 안 오는 의뢰인은 오빠가 처음이래.”
“거기 다녀올 시간이 어디에 있어? 게임 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헤에, 신영우씨 요즘에는 사람 잘 믿네. 옛날 같았으면 못 보는 사이에 부실공사 할 수도 있다면서 건설현장을 24시간 내내 감시하고 있었을 텐데.”
“명색이 세인트가 일을 대충해서 본인들 이름에 먹칠할 리 없잖아? 애초에 유라가 추천해준 업체이기도 하고. 흠, 그래도 신경 쓰이기는 하네. 세희 네가 부모님이랑 같이 다녀올래?”
“응, 알았어.”
본래 세희는 영우를 오빠라기보다 자신이 보살펴야할 대상으로 인식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바뀌었다.
이제 그녀는 영우를 오빠로서 신뢰하고 따랐다. 언행도 차츰 동생다워지고 있었다.
오빠를 신뢰하게 된 이유?
오빠가 돈을 잘 벌어서? 유명인이 되어서?
그런 저급한 이유가 아니다.
영우라는 인물의 성격 자체가 변한 게 계기였다.
“크라우젤이라는 사람, 인터넷에 검색해보니까 엄청 대단한 사람이더라?”
“대단한 수준이 아니라 지존이지.”
“지존을 이긴 사람치고는 딱히 들뜨지 않네?”
“들뜰 리 없지. 만약 그와 내가 같은 조건에서 싸웠다면 내가 졌을 수도 있으니까.”
“…”
이제는 겸손의 미덕까지 갖추어가는 건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오빠의 깊은 눈빛을 목도한 세희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왜 맨날 변하는 거람.’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오빠의 성장이 썩 좋지만은 않은 세희였다. 오빠가 점점 더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자랑스럽기는 했다.
“아침 차려줄게 밥부터 먹어.”
***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신의 축복, 혹은 저주를 받아 죽지 않는 자들.
즉 플레이어라는 존재를 스틱세이는 인지하고 있었다.
하여 흑발 사내가 스무 번째 섬에서 갑자기 사라졌음에도 그는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기다렸다.
톡. 톡톡.
지팡이를 두드리며 마법구를 주시하는 스틱세이.
깊이 눌러쓴 로브 속, 긴장과 초조를 담고 있던 그의 눈동자가 일순 밝게 빛났다.
흑발 사내가 등장한 순간이었다.
“약. 약부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 심장약부터 꿀꺽 삼킨다.
직접 조제한 약이었다.
평정심을 유지하고자 심호흡한 그가 다시금 마법구에 시선을 돌렸다.
‘과연 저자가 스무 번째 섬마저도 돌파할 수 있을까?’
솔직히 가능성은 적었다.
나 이후로 스무 번째 섬을 돌파했던 인물, 여태까지 단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그만큼 스무 번째 섬의 난이도는 높았다.
지옥달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는 극한의 인내력이 필요하였고, 그와 동시에 몬스터의 습격을 예방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했다.
‘괜히 기대하였다가 실망하지 말고 마음을 비우자.’
하지만 왜일까.
자꾸만 기대하게 된다.
저 흑발 사내, 나의 지혜를 초월할 정도로 임기응변에 능통한 인물이었으니까.
“시작된다!”
꿀꺽!
지옥달의 붉은 눈동자가 검게 물드는 것을 확인한 스틱세이가 마른 침을 삼키는 그때였다.
“사라졌다고!!”
일시적인 은신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완벽한 투명화.
홀연히 사라져버림으로서 지옥달의 시선을 농락하는 흑발의 사내였다.
“저건…! 저것은 인비지블리티가 아니다!!”
과연 현자답다.
스틱세이는 사내가 어떤 수로 투명화 된 것인지, 그 이유를 빠르게 간파해냈다.
그 탓에 더욱 더 놀랐다.
“투명망토…! 전설의 제단사 크루제의 유산…!!”
단 두 벌 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그 역사적 보물을 어째서 저 사내가 가지고 있단 말인가!
당최 정체를 가늠할 수가 없다.
“으… 끄윽!”
현자란, 지혜가 무색해지는 순간 가치를 잃는 법.
털썩!
또 한 번 커다란 충격을 받은 스틱세이가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역시 약은 전문 약사가 조제하는 게 좋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