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8권 - 9화
[아홉 번째 섬을 클리어하였습니다.]
[미션 성공 보상으로 도전자 포인트 24개를 획득하였습니다.]
‘이로서 총 102포인트.’
빠른 속도로 아홉 번째 섬까지 돌파한 그리드는 여전히 쌩쌩했다.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당연했다.
힘들지가 않았으니 지칠 수도 없었다.
“예상보다 너무 쉬운데.”
솔직히 말해서 그리드는 맥이 빠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방심하지는 않았다.
이곳 번헨 열도, 크라우젤조차도 고배를 마셨다는 장소가 아닌가.
‘앞으로 몇 개 섬을 더 넘다보면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는 그리드.
그는 몰랐다.
몬스터가 무한히 생성되었던 첫 번째 섬, 숨겨진 열쇠를 찾아야했던 두 번째 섬, 도망치는 여우쥐들을 포획해야했던 세 번째 섬, 화마가 집어삼켰던 네 번째 섬, 눈보라가 휘몰아쳤던 다섯 번째 섬, 독액이 끓어올랐던 여섯 번째 섬, 강력한 보스 몬스터가 순차적으로 등장했던 일곱 번, 여덟 번 째 섬.
그리고 지금 막 클리어한 아홉 번째 섬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어느 하나 쉬운 곳이 없었다.
그 지옥과도 같은 섬들을 시시하다 느끼며 손쉽게 클리어한 사람은 여태껏 그리드가 유일했다.
심지어 크라우젤조차도 첫 번째, 두 번째 섬에서는 곤욕을 치렀을 정도다.
[열 번째 섬에 입장하시겠습니까?]
“그래.”
목교를 건넌 그리드가 게이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파리에서 개최될 제2회 국가대항전이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덕분에 S.A그룹 임직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밥 먹듯이 야근을 하였고 출장도 잦았으니 체력이 남아나질 않았다.
세계적인 축제의 개막에 앞서서 세밀한 부분들을 조율해야했던 까닭이다.
“하이고, 힘들구만.”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임철호 회장조차도 앓는 소릴 하였다.
파리에서 귀국하자마자 출근한 그가 안마의자에 앉았다.
“이제 나도 늙었어. 아무리 열심히 관리해봤자 금방 녹초가 되어버리니 원, 서럽구만.”
꾸욱. 꾸욱.
허리와 어깨를 지압해주는 안마의자의 기능이 무척 좋다.
적절히 피로를 회복한 임철호 회장이 슈퍼컴퓨터 모르페우스에게 질문했다.
“그들에게 별다른 일은 없었나?”
그들.
그리드와 크라우젤이 포함 된 다섯 명의 기적을 말함이다.
모르페우스조차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반복해서 발생시킨 상정 외 존재들.
임철호 회장은 그들 다섯 플레이어를 무척 흥미롭게 관찰하는 중이었다.
파리로 출국하기에 앞서서 모르페우스에게 대신 모니터링해달라고 부탁해놨을 정도다.
모르페우스가 기계적인 음성으로 보고했다.
[크라우젤과 그리드가 대결하였고 아그너스는 브라함의 영혼과 조우하였습니다. 나머지 두 명의 플레이어는 레벨 올리기에만 열중하는 중입니다.]
“허?”
임철호 회장이 귀를 의심했다.
그가 주목하는 부분은 아그너스와 브라함의 영혼이 아니었다.
그 둘의 만남은 예정 된 수순이었으니까 딱히 특별할 게 없었다.
반면 크라우젤과 그리드는 달랐다.
“방금 뭐라고 했나? 크라우젤과 그리드가 싸웠다고? 그들이 왜?”
[크라우젤이 검성 전직 퀘스트를 획득한 이후 레이단을 방문했습니다.]
“허…! 검성 퀘스트를 벌써 얻었다고!”
크라우젤, 정말로 놀라운 자다.
플레이어로서 어느 한 부분 부족함 없이 완벽하다. 아니, 그저 완벽하다고 표현하기엔 부족하고 초월적인 존재였다. 그렇기에 슈퍼컴퓨터 모르페우스조차도 그를 상정할 수 없는 것이었고.
“무사히 검성으로 전직했겠군.”
상대적으로 약한 그리드를 재물로 삼은 것이리라.
검성.
최강의 전투 특화 클래스.
앞으로 한없이 강해질 크라우젤은 얼마나 굉장한 활약들을 선보이게 될까?
임철호 회장의 기대감이 증폭되어가는 그때였다.
모르페우스가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크라우젤은 검성 전직에 실패했습니다.]
“…?”
임철호 회장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설마 그가 그리드에게 졌다고?”
그리드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임철호 회장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리드 본인보다 임철호가 더 그리드를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차원이 달랐다.
특히 PvP에서 압도적인 존재였다. 아그너스가 아닌 이상, 1대1 승부에서 크라우젤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플레이어가 없을 터였다.
혼란스러워하는 임철호 회장에게 모르페우스가 설명했다.
[크라우젤은 완전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중요 스킬들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었고 장비 착용 상태 또한 온전치 않았음에도 그리드와 승부했습니다. 그 결과 그리드의 승률이 21.13퍼센트에서 54.98퍼센트까지 치솟았습니다.]
“그리드의 승률이 처음부터 그렇게 높았다고?”
[두 사람의 스킬트리와 아이템 보유 현황, 그리고 누적 된 전투 데이터 전부를 분석해서 측정한 확률이긴 하지만 정확하다고 확신할 순 없습니다. 저의 분석을 크라우젤은 185회, 그리드는 13회 무의미하게 만든 전력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들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너털웃음을 흘린 임철호 회장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오늘은 치맥각이다.’
밀린 업무를 보고 퇴근한 후, 치맥을 먹으면서 크라우젤과 그리드의 전투영상을 시청해야겠다고 마음먹는 임철호.
그의 보유자산은 세계 제일이었다.
***
[열 번째 섬에 입장하였습니다.]
섬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방이었다.
바닥, 벽, 천장이 온통 새하얗게 도색되어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공허한 방.
거리감을 느끼기 어렵고 시야도 불편하다.
눈살을 찌푸린 채 주변을 살피던 그리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게 뭐지?”
눈처럼 새하얀 바닥 곳곳에 끝이 뾰족한 기둥들이 솟아있었다.
둘레는 5센티미터 정도에 길이는 2미터가량 되는, 얇은 금속기둥이었다.
“수백… 아니, 수천 갠가?”
이 기둥들의 정체가 당최 뭘까?
의문을 품는 그리드의 시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미션이 생성됩니다.]
<열 번째 섬>
비처럼 쏟아지는 낙뢰를 피하라!
낙뢰는 어떠한 수단으로도 방어할 수 없다. 오로지 회피해야만 한다.
미션 성공 조건:열한 번째 섬으로 향하는 게이트까지 도달.
최초 클리어 보상:도전자 포인트 30.
*낙뢰에 맞으면 즉사합니다.
[지금부터 30분 후에 미션이 생성됩니다.]
[천장이 개방됩니다.]
쿠르르르릉.
위로부터 굉음이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좌우로 갈라지는 천장 너머로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먹구름 가득한 하늘이었다.
‘방어가 불가능한 낙뢰가 쏟아진다라.’
그것도 한 방 맞으면 즉사하는 낙뢰가 비처럼 쏟아진단다.
낙뢰의 속도를 감안해 봤을 때 결코 클리어할 수 없는 형태의 미션이었다.
컨트롤 능력이 극의에 오른 인물들. 예를 들어 크라우젤, 레가스, 페이커 같은 인물들이라면 혹 모를까.
“난이도 확 오르네.”
그리드가 드디어 진심으로 긴장했다.
어찌해야할까 고민해보던 그가 바닥 곳곳에 솟아있는 기둥에 관심을 가졌다.
‘저것들이 괜히 존재할 리는 없고.’
기둥들의 용도부터 파악하는 게 우선순위 같다.
판단한 그리드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기둥 앞으로 다가가 스킬을 전개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정.”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정>을 사용합니다.]
[전설이 된 대장장이가 범인을 초월하는 뛰어난 안목으로 물품을 감정합니다. 대상 물품에 숨겨진 기능이 존재할 경우 숨겨진 기능을 발견합니다.]
띠링~
<피뢰침>
내구력:1/20
끝이 뾰족한 금속제의 막대기로서 낙뢰를 유도, 흡수합니다.
심하게 손상되어 있는 탓에 내구력이 미약합니다. 낙뢰를 한 방 맞는 즉시 잿더미가 될 것입니다.
무게:3
[숨겨진 기능이 존재하지 않는 아이템입니다.]
[<피뢰침>에 대한 이해도가 100퍼센트가 되었습니다.]
[<피뢰침>의 제작법을 획득하였습니다.]
“아, 피뢰침. 낙뢰를 피하려면 이것들을 이용해야하는 거군.”
바닥에 솟은 기둥들의 정체를 파악한 그리드가 주변을 보다 자세히 살폈다.
피뢰침과 피뢰침 간의 거리는 평균 10미터에서 15미터.
대시계열 스킬을 적절히 활용해야지만 피뢰침의 기능을 이용, 낙뢰를 피해 다닐 수 있을 터였다.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그리드는 스스로의 컨트롤 실력을 과신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고민하던 그가 문득 묘안을 떠올렸다.
‘이거 만들어놓기를 정말 잘했지.’
인벤토리를 뒤진 그리드가 꺼낸 아이템은 본인이 직접 창조, 제작했던 <휴대용 용광로>였다.
***
번헨 열도 도전자를 플레이어로 한정할 경우, 여태까지 번헨 열도에 도전한 사람의 숫자는 정확히 990명이었다.
대부분 하이랭커였던 그들 중 절반 이상이 첫 번째 섬과 두 번째 섬에서 탈락하였고, 열 번째 섬까지 도달한 인원은 392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392명 중 열 번째 섬을 통과한 인원은 채 65명밖에 되지 않았다.
열 번째 섬의 난이도, 종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는 뜻이다.
“허억… 허억…”
바닥에 주저앉은 스틱세이의 턱 선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쉬지 않고 놀라느라 심장에 부담이 왔으므로 괴로웠다.
로브에 얼굴을 가린 채 심호흡하던 그가 이내 다시금 마법구로 시선을 돌렸다.
“안타깝지만 거긴 정말로 통과하지 못할 것이야.”
저자가 내 약한 심장을 자극하였기에 악의를 느끼고 평하는 게 아니다.
스틱세이가 목격한 흑발 사내의 능력은 분명히 신기한 구석이 있었지만, 열 번째 섬은 오로지 본신의 실력만으로 돌파해야하는 곳이었다.
‘더 이상 아티팩트에 의존할 수 없다는 뜻.’
과연 저 사내가 초당 3~5회씩 떨어지는 낙뢰를 피해가면서 2천 미터를 주파할 수 있을까?
스틱세이는 단연코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이는 근거 없는 판단이 아니다.
아쉽게도 저 흑발 사내, 본인의 뛰어난 육체를 완벽하게 다루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으니까.
“저런 평범한 몸놀림으로는 결코… 응?”
중얼거리던 스틱세이가 어리둥절했다.
마법구 속에 비치는 사내, 황당하게도 용광로를 꺼내더니 장작을 넣고 풀무질을 시작하는 게 아닌가?
“이번엔 또 뭐냐!”
지혜로운 스틱세이의 상식선상에서 ‘휴대 가능’한 용광로란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용광로라는 것, 대장장이가 아닌 이상 쉽사리 다루지 못하는 기구이기도 했다.
“애초에.”
지금 이 상황에서 용광로는 왜 꺼내는데?
‘미쳤나?’
아니, 미치지 않은 것 같아서 문제다.
스틱세이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용광로의 온도를 높인 흑발사내가 철광석을 꺼내 제련하기 시작했다.
“…어?”
현자답게 대장일에 대한 지식도 어느 정도 쌓고 있는 스틱세이였다.
그렇기에 그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뭐지? 저 제련 솜씨는?”
스틱세이의 지식에 존재하는 ‘제련’의 개념을 완전히 파괴하는, 어마어마한 제련 솜씨를 흑발의 사내가 발휘하고 있었다.
철이 순식간에 녹아 깨끗하게 정제되었다.
“전설의 대장장이라도 되는가…!”
마법을 쏘는 것을 보면 마법사 같기도 하고, 싸움하는 폼을 보면 전사 같기도 하고, 어마어마한 아티팩트들을 보유한 것을 보면 대부호 같기도 하고, 단단한 자물쇠를 쉽사리 연 것을 보면 도둑 같기도 하고.
거기에 지금은 또 대장장이 같다.
“대체 네 정체가 뭐냔 말이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스틱세이의 머리 위로 의문부호가 연달아 떠오르는 사이,
따앙! 따앙!
마법구 속 사내는 제련한 철의 단조질을 끝내가고 있었다.
그리고 곧 이어 탄생한 결과물은…
“피뢰침?”
그렇다.
열 번째 섬 바닥에 무수히 솟아있는 피뢰침들과 같은 모양을 한 금속 막대기가 흑발사내의 손에 의해서 탄생했다.
한데 그 크기가 상당했다.
길이만 무려 7미터는 되어보였다.
“…”
스틱세이는 이제 더 이상 놀라기도 힘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놀라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지병인 심장병이 재발할까 두려웠던 까닭이다.
쿠르릉! 쿠르르르릉!!
때마침 낙뢰의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흑발의 사내는 무사했다.
저 홀로 떠다니는 황금의 손들이 초대형 피뢰침을 들고서 사내를 수행한 덕분이었다.
사내는 마치 비오는 날 우산 씌워주는 수행원을 대동한 귀족처럼 유유자적 섬을 이동했다.
“으… 으으윽…”
결국 또 놀라고 만 스틱세이가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그 모습, 위풍당당한 그리드와 상반되게도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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