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8권 - 5화
잠시간의 정적 후.
반트너가 크라우젤이 로그아웃한 자리로 슬그머니 걸음을 옮겼다.
“크라우젤이 다시 로그인할 때까지 여기서 버티고 있어야겠다.”
“그거 좋은 생각인데? 로그인 하면 바로 납치해버리자.”
“좋아! 템빨의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거야!”
“오오! 랭킹 1위가 템빨단에 들어오는 건가!”
되먹지도 않은 계획을 세우는 템빨단원들이었다.
그들의 추태를 보다 못한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서라. 굳이 강요하지 말자.”
지슈카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최강의 전력을 얻을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마다하겠다고?”
그리드는 탐욕의 화신이다.
평소 그리드의 성향을 고려해본다면, 크라우젤에게 집착함이 응당 옳았다.
한데 그러지 않으니 의아할 따름이다.
‘개인적으로 크라우젤이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의문을 품는 템빨단원들에게 그리드가 반문했다.
“동료라는 것, 강요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물론 템빨을 미끼로 물어올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라우엘처럼 말이다.
하지만 라우엘과 크라우젤은 경우가 달랐다.
라우엘은 본인 스스로가 뼈를 묻을 세력을 찾고 있던 시기에 겸사겸사 템빨에 매료되었던 경우고, 크라우젤은 애초에 세력에 속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향의 인물이었으니까.
그를 강제로 회유한다고 해봤자, 과연 진정한 동료로서 거듭날 수 있을까?
“그리고 내겐 이미 최고의 동료들이 있어. 너희들 말이다. 그러니까 굳이 크라우젤에게 집착하지 않아.”
일말의 가식도 없다.
그리드는 지금의 동료들과 함께라면 그 어떤 목표라도 이룰 수 있으리란 믿음이 있었다. 크라우젤에게 큰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리드가 크라우젤에게 원하는 역할은 따로 있었다.
‘크라우젤.’
너는 너의 길을 가라. 반드시 검성이 되어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라.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되는 날,
‘나를 또 한층 발전시켜라.’
크라우젤과 단 한 번 대련한 것만으로 그리드는 배운 게 많았다.
논타켓 스킬을 피하는 방법, 타켓팅 스킬에 대처하는 자세, 마나와 체력의 안배, 아이템과 스킬의 활용 방법, 지형을 이용하는 능력 등등.
크라우젤의 판단과 움직임 하나하나를 보고, 체험하고, 전율하며 가슴에 깊이 새겼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당장 크라우젤처럼 될 수는 없겠지만.’
그리드는 믿었다.
계속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크라우젤을 상대로 보다 더 훌륭한 승부를 펼칠 수 있으리라고.
그렇다.
그리드는 크라우젤을 본보기로 삼고 라이벌로 의식하는 것이었다.
최악의 둔재가 최고의 천재와 라이벌 관계를 맺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누군가는 비웃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드는 스스로의 자격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늘 밖의 하늘을 부순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높은 자긍심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부족함을 가리기 위해서 뒤집어썼던 오만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긍지였다.
***
그리드를 따라서 영주 성으로 돌아온 지슈카가 서운함을 토로했다.
“렌 왕자의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왜 우리를 호출하지 않았던 거야? 우리의 영지가 적의 침략을 받았었다는 사실을 뉴스로 접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황당했는 줄 알아?”
“뱀파이어의 도시에서 열심히 사냥 중이라는 너희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라우엘과 둘이서 해결 가능한 일이기도 했고.”
“만약의 사태라는 게 있잖아! 혹시라도 네가 위험해졌으면 어쩔 뻔 했니!”
“…”
과거의 그리드였다면, ‘그랬으면 기사 소환을 썼으면 됐지.’라며 무심하게 대꾸했을 터다.
하지만 지금의 그리드는 달랐다.
지슈카가 화를 내는 본질적인 이유를 깨닫고 사과했다.
“미안하다. 너희들을 위한다고 선택한 행동이 도리어 너희들을 서운하게 만들었군.”
너희가 쓸모없었다거나, 혹은 동료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배제했던 게 아니다. 순전한 선의였다.
그와 같은 뜻이 담긴 진중한 눈빛으로 사과하는 그리드였기에 지슈카도 더 이상 뭐라 따질 수가 없었다.
‘점점 더 대하기가 어렵게 변하네.’
지슈카는 그리드를 연상이라고 의식한 경우가 적었다.
여러모로 부족하고 어리숙한 면이 있는 그리드였기에 연하 대하듯이 하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된 이후부터 그리드는 빠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강한 책임감을 기반으로 어리숙한 면을 하나, 둘씩 지워나갔다.
그러한 모습이 더욱 좋은 지슈카였다.
‘서른쯤 되면 정말 멋질 거야.’
완숙해진 그리드를 보고 싶다.
지슈카가 황홀경에 빠져드는 사이, 그녀를 뒤로하고 영주석에 앉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뭐가?”
“그게 실은…”
눈치를 살피던 라우엘이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얼마 전 전장에서 활약하는 당신을 보면서, 저는 당신이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판단했었습니다. 하지만 제 보는 눈이 잘못된 거였음을 이번에 깨달았습니다. 당신은 천외천 크라우젤을 이겼으니까요. 앞으로 저는 두 번 다시 당신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국가대항전 이후, 현실시간으로 10개월 이상 그리드와 함께해온 라우엘이다.
여태까지 라우엘이 그리드를 바라보는 눈빛에 ‘선망’이나 ‘존경’은 포함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라우엘이 그리드에게 보내는 눈빛이 한층 더 심화되었다.
“저 라우엘, 단지 템빨을 갖추기 위해서 당신을 따르는 일 따위 그만두겠습니다. 앞으로는 보다 순수하고 올곧은 마음으로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이는 전생과 이생을 관통하고 있는 내 영원의 영혼을 걸고 하는 진실 된 맹세입니다.”
오글오글!
무릎 꿇고 예를 갖추는 라우엘을 바라보는 그리드와 템빨단원들의 몸에 닭살이 돋았다. 손발이 오그라져서 도통 펴질 생각을 않았다.
라우엘의 맹세에 감격하며 전율하는 이는 후로이가 유일했다.
***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리드가 뱀파이어 백작 엘핀스톤 레이드를 막 끝냈을 무렵.
『NPC가 아닌 플레이어가 교황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것도 무려! 무려 일본인입니다!!』
일본 열도가 발칵 뒤집혔다.
데미안.
모두에게 외면 받는 레베카교의 성기사임에도 불구하고 성기사 랭킹 2위까지 올랐던 입지전적 인물.
어느 날 갑자기 랭킹 목록에서 사라짐으로서 히든 클래스로 전직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무성하게 나돌았던 화제의 주인공.
그리고 오타쿠.
일본 최고의 Satisfy 플레이어 중 하나인 그가 레베카교의 교황으로 당선 된 까닭이었다.
일본인들은 환희에 휩싸였다.
제1회 Satisfy 국가대항전에서 단 1개의 메달도 획득하지 못하고 Satisfy 약소국 평가를 받게 된 우리 일본에 구세주가 탄생했다며 환호했다.
『데미안님! 교황으로 당선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같은 일본인으로서 무척 자랑스럽니다!』
『아리가또.』
『교황이 되시기까지 얼마나 험난하셨습니까? 온 국민이 알고 싶어 합니다. 당신은 어떤 시련과 역경을 넘어 그토록 위대한 업적을 세울 수 있으셨던 건지요?』
레베카교 교황의 권력은 절대적이다. 어지간한 왕국의 국왕들조차도 교황 앞에서는 고개를 조아렸다.
그렇기에 일본인들은 기대했다.
데미안이 우리 일본인 유저들을 위해서 수많은 정책을 내놓고 일본의 Satisfy력 발전에 큰 기여를 해주기를 말이다.
한데 수많은 언론매체와 인터뷰를 시작한 데미안의 상태가 어째 영 이상했다.
『제가 교황이 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그리드님 덕분입니다.』
『전설의 대장장이 그리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리드가 교황 후보 연설식 당일에 적기사들과 사투를 벌여 큰 화제가 되었던 바가 있는데, 그와 같은 행동들이 결과적으로 데미안님께 도움이 되었나보군요?』
『결과적으로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저는 오로지 그리드님의 도움을 받은 덕분에 교황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드의 인기는 꾸준히 상승세다.
특히 백발 버전 그리드가 공개된 이후로는 일본에서도 제법 큰 팬덤이 형성됐다. 제5한류 열풍의 주역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늘 그랬듯, 한류란 소수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다.
일본국민 대부분은 한류에 관심조차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의 영웅 데미안이 오로지 그리드를 찬양하는 모습은 반감을 사고 말았다.
근본적으로 그리드는 국가대항전에서 일본을 좌절시킨 장본인 중 하나였던 탓에 극우 세력들의 반발을 일으켰다.
“데미안 저자는 어째서 모든 공을 그리드에게 돌리는 거지?”
“그리드 그놈 탓에 우리 일본이 얼마나 큰 수모를 겪었는지 모르는 건가!”
“그리드 그거 천벌 받을 놈이다! 국가대항전에서 일본인 랭커들을 몰살시킨 것은 물론이고, 일전에 사쿠라 길드가 은기사 길드를 습격했을 때도 방해했었어!!”
“뭐라고! 그리드 그놈 완전히 최악이로군! 데미안 저 자식, 그런 개자식을 찬양하고 다니다니? 혹시 자이니치-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과 북한인을 지칭하는 일본말- 아니야?”
“가능성 있네! 저딴 매국노가 순혈 일본인일리가 없다!”
일본 대중들이 분노했다.
각종 SNS에서 ‘데미안은 자이니치다. 일본 내에서 조국 한국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서 공작을 벌이는 중이다.’라는 등의 루머가 들끓기 시작했다. 일본 극우 세력들의 더러운 수작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개의치 않았다.
늘 오타쿠라며 조롱 받아온 그에게 있어서 비난은 익숙한 것이었고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데미안님께서 한국인이 아니냐는 루머가 들끓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와따시와 순수한 닛뽄진입니다.』
『하지만 데미안님께서는 평소 모든 인터뷰에서 그리드를 거론함으로서 한국을 좋은 식으로 포장하는 경향이 심했습니다. 그 의도에 대해서 의문을 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한국을 좋게 포장한 적이 없습니다만? 단지 그리드님에게 감사를 표했을 뿐인데 그걸 일부 사람들이 비약해서 해석했을 뿐이죠.』
『어쨌든 자국 내에서 데미안님의 이미지가 좋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이참에 의혹을 털어내고 이미지 쇄신을 위해서 일본 소속 길드들이 다스리고 있는 영지들에 레베카 신전을 세워주심은 어떤지요?』
『야다~ 특정 지역에 레베카 신전을 세우기 위해서는 엄격한 조건들을 충족시켜야만 합니다. 단지 같은 동포이기 때문에 신전을 세워준다는 개념은 있을 수 없어요.』
『하면… 데미안님께서는 교황으로서 일본을 도울 생각이 없으시다는 뜻입니까?』
『당연합니다. 제가 교황이 된 거랑 일본이랑 뭔 상관입니까? 전 교황으로서 늘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할 계획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교황으로서 하실 첫 번째 공식 활동 계획이 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그리드님께서 다스리고 계신 레이단에 레베카 여신의 신전을 세우는 것입니다.』
『아니, 레베카 신전을 세우려면 엄격한 조건들을 충족시켜야한다지 않았습니까? 레이단은 현재 인구가 2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거 아닙니까?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하신다고 해놓고는 그리드를 너무 노골적으로 편애하는 게 아닙니까?』
후지산TV.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 언론사 중 하나인 그곳의 간판 아나운서가 극우 세력들을 대변하고 있었다.
데미안의 행태에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내비치며 인터뷰를 진행시켰다.
만약 데미안이 일반적인 인물이었다면, 극우 세력들의 영향력과 보복을 두려워해서라도 입장을 굽혔을 터였다.
하지만 데미안은 오타쿠다.
오타쿠의 확고한 신념은 결코 쉽게 굽혀지지 않는다.
『저는 그리드님을 편애하는 게 아니라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그리드님은 저와 레베카교에게 있어서 대은인인 바! 레베카 여신께서 친히 그리드님께 은혜를 갚으라는 신탁을 내리셨을 정도입니다! 와따시와 갓리드 찬양해!!』
『…』
“저 미친 새끼!!”
일본 극우 세력들이 격노하였다.
기껏 일본인이 큰 권력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국민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을뿐더러 한국인 따위를 도우려들자 그들은 결코 납득할 수가 없었다.
하여 무시무시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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