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8권 - 2화
쿠우웅!!!
지상으로 추락한 그리드를 중심으로 뿌연 흙먼지가 일어났다.
그리드는 비교적 멀쩡했다. 아니, 비교적 멀쩡한 정도가 아니라 혈색이 무척 좋았다. 몸 곳곳의 상처 또한 꽤나 회복된 상태였다.
초근접 거리에서 행해진 발차기에 얻어맞는 순간, <도란의 반지>를 착용하고 <성스러운 빛의 갑옷>의 옵션 효과를 활용함으로서 생명력을 1만 3천까지 회복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만족하지 못했다.
“발차기보다야, 칼 맞았을 때 활용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지금보다 족히 3배는 높은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 터다.
“안 그러냐? 야쿠르트.”
[…]
야쿠르트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마다 성을 내던 이야루그트가 웬일로 잠잠했다.
크라우젤의 검로를 읽지 못하여 그리드가 치명상을 입게끔 만들었으니 당당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피아로와 대련할 때도 그렇고, 척슬리와 싸울 때도 그렇고. 진짜배기들 상대로는 너, 진심 쓸모가 없는 것 같다.”
[그건…! 내 본래 능력 대부분이 봉인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진짜 능력을 발휘할 수만 있다면 저놈들 따위 아무 것도 아니야!!]
“뭐, 그렇다고 해두지.”
실제로, 이야루그트의 등급은 현재 유니크에 불과했다. 레전드리 등급까지 성장한다면 훨씬 더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절구통처럼 움푹 파인 연병장의 중앙.
스윽.
그곳에 깊숙이 처박혀있던 그리드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본의는 아니지만, 전투로부터 잠시 이탈하게 된 것이 유요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머리를 차갑게 식힌 그리드는 초조함을 극복한 상태였다. 불사에 의존하겠다거나 하는, 그런 극단적인 발상은 억눌렀다.
그리드의 사고가 한층 더 심화됐다.
‘내가 흑화를 너무 빨리 썼나?’
흑화는 사용자의 공격력, 마력, 민첩성을 각각 20퍼센트씩 상승시켜주는 대가로 최대 생명력의 50퍼센트를 소모시킨다.
양날의 검으로서 적에게 반격을 당할 경우 도리어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 수가 있었다. 방금처럼 말이다.
‘보다 확정적일 때 썼더라면… 아니, 아끼다가 똥 되는 것보다야 낫지. 흑화가 아니면 위협도 못줄 상대다.’
기본적으로 실력의 차이가 너무 크다.
신컨으로 불린다더니 과연, 평타랑 논타켓 스킬은 대부분 회피하고 확정기는 반격기로 카운터치는 크라우젤이었다.
‘공격속도와 공격력을 보면 의외로 스탯 차이도 안 나는 것 같고.’
이 부분이 가장 의아했다.
그리드는 마이너스 레벨 과정을 거쳤고, 온갖 칭호를 보유하였으며, 아이템 제작을 통해서 꾸준히 스탯을 성장시켜왔다.
누구보다도 스탯이 앞서있어야 함이 옳았다.
한데 크라우젤의 스탯 또한 만만치 않게 느껴졌다.
‘당연한 건가?’
크라우젤은 랭킹 1위다.
누구보다도 앞서나갔고 그를 이점으로 많은 이득을 취해온 입장이었다.
유용한 칭호와 퀘스트들을 독식함으로서 스탯을 크게 성장시켰을 가능성이 높았다. 따로 노가다를 했을 수도 있는 거고.
‘내가 80레벨 검사일 때.’
그래, 내가 아직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하기 전.
‘그때 이미 크라우젤의 레벨은 240을 넘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본래 좁힐 수 없는 격차가 있어야함이 옳았다.
‘최소한 전투 관련 스탯만큼은 비등하다고 보는 게 맞겠어.’
거기에 크라우젤은 적절한 템빨까지 갖췄다.
방어구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무기가 엄청났다. 그리드가 창조, 제작한 레전드리 무기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었다.
“…여러모로 사긴데.”
역시 내가 지는가?
나약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꽈드득!
이를 가는 그리드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부족한 재능을 핑계 삼아 패배자로 살아왔던 과거가 떠오른 까닭이었다.
‘지는 건 이제 그만하자.’
부족한 재능, 노력으로 극복해오지 않았던가?
누군가는 운빨이라고 조롱할지언정 그리드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할 수 있었던 것부터가 본인의 노력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기고 싶어.’
크라우젤.
천외천이라 칭송받으며 랭커들의 선망을 독차지하는 존재.
그를 이김으로서, 그리드는 그간의 오명을 모조리 씻어내고 새롭게 비상하고 싶었다. 진정한 실력자로 인정받고 종국에 이르러서는 지존이라는 타이틀을 쟁취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분발해야한다.
여태까지처럼.
“2라운드다.”
[<그리드의 부츠>를 해제합니다. 이동속도와 회피율이 정상수치로 회복됩니다.]
첫 번째 실수가 있었다.
그리드의 부츠는 오로지 대검의 위력을 높이기 위해서 고안했던 아이템인 바, 한손 검인 이야루그트를 사용할 때는 도리어 독이었다. 속도 저하와 회피율 저하라는 페널티를 무의미하게 감수해야했기 때문이다.
[<브라함의 부츠>를 착용합니다. 이동속도가 10퍼센트 상승합니다.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20퍼센트 감소합니다.]
브라함의 부츠는 방어력이 낮다는 고질적인 한계점이 있지만 뛰어난 옵션을 보유하고 있다.
과연 전설의 대마법사의 아이템답다고 할까.
그리드가 팔아먹지 못하고 꾸준히 애용해온 이유다.
[마법 <플라이>를 전개합니다.]
터엉-!!
그리드가 날아올랐다.
그 경쾌함이 전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
“허억… 허억… 뭐라고?”
벼랑처럼 깎아내려진 연병장의 위쪽.
숨을 고르며 추이를 엿보던 크라우젤의 두 눈이 부릅 뜨였다.
지하의 자욱한 연기 너머, 그리드가 멀쩡한 기색으로 날아오른 까닭이었다.
‘저게 정녕 사람인가?’
의문을 품을 만도 하다.
<검성 후보 5단계>, <서대륙의 선인>, <판데아의 영웅>, <기적을 일으키는 낭인>, <최초의…>, <최초의…>, <최초의…>, <최초의…>…
그 가치를 감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비교불허의 칭호를 수십 개나 독식해온 크라우젤이다.
그의 공격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고 플레이어들이 결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한데 그리드는 버티고 또 버티고 있었다.
지금 보니 생명력이 또 거짓말처럼 회복되었고 기세는 도리어 더욱 올랐다.
크라우젤이 보기에 그리드는 보스몬스터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한때는 조롱의 대상이었다고는 하나 과연 전설.’
크라우젤 또한 눈과 귀가 있다.
형편없는 실력의 레전드리 클래스 전직자.
부족함을 오로지 템빨과 직업빨로 커버하는 비겁자.
그리고 이제는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게 된 템빨러.
그리드에 대한 평가들, 크라우젤 또한 숙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국가대항전과 교황 후보 연설식 영상을 보면서 일부 동의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깨달았다.
사람은 누구나 성장하는 법이고, 이는 그리드 또한 마찬가지임을.
그리드는 성장했다.
내게 상처를 입힌 몇 안 되는 플레이어 중 하나가 되었음이 그 증거다.
‘당신이 정녕 둔재였다면.’
지금에 이르기까지 남들보다 몇 배나 더 노력했을 터.
‘애초에, 노력이 없었더라면 전설이 되지도 못했겠지.’
인정한다.
당신은 대단한 남자다. 그 누구에게도 조롱을 받아선 안 된다.
“경의를 표하여 진심으로 상대해주겠다. 유성 검.”
크라우젤이 앞서 <피의 울음>탓에 도중 캔슬되었던 스킬을 재사용했다.
유성처럼 떨어지는 그의 주변 기파가 대기를 격동시켰고,
“파그마의 검무.”
크라우젤을 향해서 솟구쳐 오르던 그리드가 멈춰 춤사위를 펼치기 시작했다.
과연 크라우젤의 예상대로였다.
그리드는 레전드리 아이템과 스킬을 보유한 인물인 바, 공격력만큼은 누구보다도 더 자신이 있을 터였다. 유성 검에 정면으로 맞서려함이 분명했다.
‘그게 당신의 실수다.’
유성 검은 다단 히트 계열의 스킬이다. 짧게 여러 번 끊어 치고, 이때마다 피해량이 증가하니 대상과 정면으로 충돌할 경우 끔찍한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크라우젤은 자신했지만, 그리드는 크라우젤의 예측에 어긋나는 선택을 하고 있었다.
“초(超).”
쿠오오오오오오!!
크라우젤의 기파에 짓눌리던 대기의 흐름이 변했다. 그리드가 발산하는 초월적 기운에 떠밀려 위로 들끓었다.
‘내 두 번째 실수.’
나보다 컨트롤이 뛰어난 사람을 상대로 굳이 정면승부를 하려했던 점이다.
[초월적 영역에 진입합니다.]
[물리공격력이 2배 상승하며, 기본 공격이 원거리 공격으로 전환됩니다. 이 효과는 30초 동안 유지됩니다.]
스윽.
플라이의 이점을 활용, 허공에서 방향을 비튼 그리드가 닥쳐오는 크라우젤과 거리를 벌렸다. 동시에 검을 휘두르니 혈빛의 검기가 쏘아졌다.
[10,7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쿨럭!”
유성 검의 진로는 단순하다. 타켓팅 스킬의 한계였고 이는 크라우젤의 컨트롤 솜씨에 제약을 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날아오는 검기에 무방비하게 얻어맞은 크라우젤이 입에서 피를 토했다.
‘노선을 바꾸는가…!’
콰앙!!
맥없이 지면으로 떨어진 크라우젤이 곧장 벌떡 일어섰다.
이미 3줄기 검기가 직면해오고 있었다.
땅을 굴러서 회피한 크라우젤이 <청운진>을 전개하였다.
쿠르르릉-!
백아도로부터 구름 같은 검기가 뻗어 나와 일대가 푸른 구름으로 가리어졌다.
천하의 크라우젤이 몸을 지키고자 눈속임을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질없었다.
그리드의 높은 통찰력과 도살귀의 안대의 결합.
비록 크라우젤의 검로를 간파하지는 못했을지언정 완전히 무력한 것은 아니다.
그리드는 구름 속에 숨어있는 크라우젤의 위치를 ‘빠르게’ 파악해냈다. 지금의 그리드가 얼마나 높은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는지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콰콰콰콰콰콰콰쾅!!
그리드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날카로운 검기가 구름 속 크라우젤에게 쇄도했다.
쉬지 않고 날아오는 검기를 간신히 피하고, 막으며 버티는가 싶던 크라우젤이 또 한 번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큭… 초연(超聯)이라는 스킬과는 다른 건가?’
크라우젤이 시청했던 2개의 방송에서 그리드는 초(超)를 선보인 바가 없다. 원거리 공격으로는 초연(超聯)만 선보였었다.
단발성인 초연(超聯)과 지속성인 초(超)의 차이가 크라우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퍼펑! 퍼퍼퍼퍼펑!!
점차 빠르게 쏟아지는 검기의 폭우.
전력으로 회피하던 크라우젤이 차츰 여유를 되찾아갔다. 과연 천재답게 검기의 속도와 궤도에 적응한 것이었다.
잠시 후 검기의 폭우가 그쳤다.
‘스킬의 지속시간이 끝났군.’
판단한 크라우젤이 구름을 헤치고 도약, 백아도를 앞세워 그리드에게 날아들었다.
그를 본 그리드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페이크다.”
퍼엉-!!
초(超)의 지속 시간은 30초. 아직 5초나 남았다.
그리드가 크라우젤을 향하여 다시금 검기를 발사했다.
지상과 달리 허공에서는 운신에 제약이 생겼으니, 그리드는 크라우젤이 쉽게 피하지 못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백운보의 묘리를 살림으로서 몸의 궤적을 바꿔버렸다. 그리드처럼 플라이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건만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걸 피하다니!’
그리드가 경악하는 사이,
“하아압!!”
허공을 박찬 크라우젤이 그리드에게 도달, 백아도를 휘둘렀다.
서걱!
그리드의 가슴이 크게 베였다.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하며 공격을 연계시키는 크라우젤의 귓가로 그리드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내 세 번째 실수…”
갓 핸드.
기껏 나의 손을 재현하여 만든 그것을 매직 미사일의 총구, 혹은 무기의 활용도구로밖에 사용하지 않았던 점.
실로 최악의 실수다.
덥썩!!
“……!”
크라우젤은 소름이 돋았다.
검술실력은 형편없으나 이동속도만큼은 월등하였던 4개의 황금 손들.
쏜살같이 날아온 그것들이 내 손목과 발목을 붙잡아 구속하는 것이 아닌가?
손놀림이 어찌나 대단한지 허무하리마치 쉽게 붙잡히고 말았다.
급히 뿌리쳐보지만, 찰나의 빈틈이 드러났다.
벼르고 있던 그리드가 그 틈을 놓칠 리 만무했다.
“연살(聯殺).”
“초감각!”
[초감각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푹-!
푹푹푹!!
스킬을 잘 활용하는 능력이 실력으로 인정받는 것처럼, 아이템을 잘 활용하는 능력 또한 실력의 일부다.
부족한 재능에 발목이 붙잡힌 채로도 끝끝내 벼랑을 기어 올라온 둔재, 그리드.
그가 이름난 랭커들조차도 도달하지 못했던 ‘하늘 밖의 하늘’을 무너뜨렸다.
뒤늦게 소란을 접하고 달려왔던 템빨단원들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편, 루비의 품에 안긴 로드는 동그란 눈동자를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로드 스테임.
훗날의 절대강자에게 ‘아빠가 최고’라는 인식이 각인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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