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7권 - 21화
Satisfy시간으로 4개월 전.
크라우젤은 무려 한 달 동안을 피아로와 함께 생활했었다.
피아로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고 총 30회 이상을 대련했다. 피아로가 전설의 농부로 전직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크라우젤은 피아로의 강함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알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레벨의 차이가 크다.’
마지막으로 헤어질 당시 피아로의 레벨은 380언저리였다.
단순한 추측이 아니다.
온갖 지표를 통한 계산이므로 정확하다고 크라우젤은 확신했다. 그만큼 스스로의 게임 이해도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크라우젤이 계산하기로, 피아로의 현재 레벨은 385에서 386선이었다.
레벨 업 필요 경험치와 네임드 NPC의 성장속도에 대한 연구결과를 숙지하고 도출해낸 결론이었다.
반면 크라우젤의 레벨은?
326이다.
‘60의 레벨 차이.’
입히는 피해가 30퍼센트 적게 적용되고 받는 피해는 30퍼센트 크게 적용될 터다.
안 그래도 노멀 클래스와 레전드리 클래스의 기본 능력치 차이가 큰 상태에서 이는 무시무시한 페널티였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위축되지 않았다.
‘내게는 충분한 승산이 있다.’
크라우젤은 Satisfy가 오픈한 이래 지금까지 쭉 랭킹 1위를 고수해온 괴물이다.
온갖 분야에서 최초, 최고의 업적을 남겼고 수십 개의 칭호를 독식했다.
이를 통해서 레벨과 클래스의 격차를 조금이나마 무마시킬 수 있었다.
‘또한.’
피아로의 농기구술은 검술을 기반으로 한다.
쇠스랑, 낫, 호미, 도리깨 등.
생소한 농기구들을 무기로 사용하지만 종국에는 검술이라는 형태로 귀결됐다.
‘무릇 검술이란 검으로 구사함이 가장 이상적인 법.’
굳이 농기구로 검술을 구사한다?
무의미할 따름이며 이는 ‘농부’ 피아로의 유일하고도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크라우젤이 승산을 엿볼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주의해야할 점은 확정 즉사 스킬.’
랭킹 2위 지발을 단 한 방에 로그아웃시켰던 <필멸>.
‘그것만 허용하지 않으면 된다.’
방송을 통해서 공개된 <도정>이라는 광역기가 최근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지만, 크라우젤은 그보다 필멸의 위력을 훨씬 더 높이 평가하는 것이었다.
철컥.
크라우젤이 <백아도>를 꺼내 쥐었다.
검성 뮐러에게 패배하고 육신을 잃은 대악마 중 하나인 드라시온을 레이드하고 획득한 레전드리 무기였다.
“선공의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고수끼리의 싸움에서 선공은 주요하게 작용한다.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확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렇다.
지금 크라우젤은, 피아로에게 한 수 물려주기를 청하는 것이다.
온갖 페널티를 받은 입장이니, 이 정도 어드밴티지는 요구해도 치졸한 게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물론 피아로에게는 거부권이 있었다.
하지만 피아로가 누군가?
늘 최강이라고 칭송받아온 존재다. 자신감으로 똘똘 뭉쳤다.
“기꺼이.”
크라우젤의 예상대로였다.
피아로는 크라우젤에게 선공의 기회를 주었고, 크라우젤은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상대는 전설. 체력의 차이 또한 압도적으로 크니 장기전은 불리해. 빠르게 승부를 본다.’
파앗!
해가 중천에 뜬 시간이다.
강렬한 햇빛이나 완연한 달빛 아래에서 미약하게나마 은신 기능을 부여해주는 보법이 크라우젤의 몸을 가렸다.
<백광보>였다.
과거의 피아로는 이 보법을 통한 크라우젤의 은신을 감지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좌측으로부터 나타나 백아도를 꽂아 넣는 크라우젤의 기척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있던 그가 쉽사리 대응하였다.
쩌엉-!!
‘역시, 레벨의 격차가 너무 큰가.’
은신이 무용지물이다.
백광보의 은신에 기댈 수 없다면 승률이 1할 이상 떨어진다.
‘하지만 허용범위.’
크라우젤의 낯빛은 여전히 침착했다.
설사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지언정 동요하지 않는 것.
그것이 정점의 자세였으니까.
한편, 왼손의 호미로 백아도를 막아낸 피아로가 오른손으로 낫을 휘두르고 있었다.
어깻죽지부터 골반까지 사선으로 긋는 공격.
크라우젤의 예측범위를 초월할 정도로 빨랐다.
‘뭐지?’
피아로의 민첩성이 상정한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다?
크라우젤은 경악하면서도 실수하지 않고 반응했다.
채챙! 챙!
채채챙!!
0.1초의 간극을 두고 연계되는 피아로의 공격을 피하고, 막고, 반격하기를 반복해내는 크라우젤.
지금의 그는 보고, 판단하는 과정을 거쳐서 대응하는 게 아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전투를 토대로 쌓은 경험과 반사 신경을 활용하는 중이었다. 물론 <예리한 감각>의 도움도 컸다.
쩌엉-!!
“큭!”
크라우젤이 끝내 신음을 토했다.
교차하며 찍혀오는 호미와 낫을 백아도로 막아내었는데, 힘에 짓눌려 무릎이 굽혀졌으니 당혹스러웠다.
일반인이었다면 이 순간 힘의 격차를 절감하며 패배를 확신했을 터였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위기 속에서 기회를 엿보았다.
“하늘 찢기.”
콰작! 콰자자자작!!
백의 검객의 궁극기 중 하나가 발현되었다.
피아로가 등지고 선 창천에 맹수의 발톱자국이 아로새겨졌고,
쩌엉-!
호미와 낫이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면서 피아로의 가슴으로부터 선혈이 솟구쳤다.
‘주군께서 만들어주신 농기구가…!’
피아로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전설의 대장장이가 제작해준 농기구들이 일격에 손상되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작 그보다 더 놀란 사람은 크라우젤 쪽이었다.
‘데미지가 안 들어가?’
궤도가 <상단>으로 국한되는 <반격기>로서 활용하기가 무척이나 까다로운 이 <하늘 찢기>의 데미지 공식은 사용자의 물리공격력+적의 공격력에 비례한다.
크라우젤은 피아로에게 최소 4만대의 데미지가 들어가리라 예측했었다.
한데 실제로 들어간 데미지는 7천대에 불과하였으니 크라우젤은 자연히 깨닫게 됐다.
‘형님의 레벨, 무조건 400이상이다.’
낭패다.
레벨 차이가 너무 커서 데미지 공식이 제대로 적용되질 않는다. 4차 각성한 스탯은 온갖 칭호의 효과들로도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작용했다.
‘어떻게? 형님은 무슨 수로 이토록 빠르게 성장하신 거지?’
크라우젤은 모르는 사실이지만, 이 모든 건 크리스를 비롯한 하이랭커들과 그리드 때문이었다.
끊임없이 레이단을 방문하는 하이랭커들을 농노화시키면서 단련하고, 그리드와의 대련을 통해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한 피아로였기에 크라우젤이 엿을 먹고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쐐액!
어떻게든 냉정하고자 노력하는 크라우젤에게 도리깨가 날아들었다.
궤도를 읽으려던 크라우젤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검술이 아니다?’
검술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피아로의 농기구술이 변화하고 있었다. 전혀 새로운 형태를 선보였다.
무수한 검로를 꿰뚫어보는 <검성 후보> 크라우젤의 강점이 무력화되는 순간이었다.
퍼퍼퍽!
“크윽!”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세차게 얻어맞은 크라우젤의 어깨가 들썩였다. 백아도를 쥔 오른팔이 상태이상 <마비>에 빠졌다.
찰나지간에 그를 읽어낸 피아로는 생각하고 있었다.
‘반격은 무리겠지.’
무조건 회피 동작을 취할 터다. 백광보라는 보법으로 빠져나갈 가능성이 지극히 높다.
판단한 피아로가 도리깨를 연달아 휘두르는 순간이었다.
스윽.
크라우젤이 피하기는커녕 도리어 피아로에게 들러붙었다. 백광보와는 다른 형식의 보법을 응용한 접근법이었다.
완전히 밀착 된 상태로 현란한 발재간을 일으키는 크라우젤이었기에 피아로는 섣불리 공격하기가 어려웠다.
<휘모리>의 전조였다.
퍽! 퍼퍽!
퍼퍼퍼퍼퍼퍼퍼퍼퍽!!
숨은 현자 스틱세이의 도움을 받아서 도달할 수 있었던 동대륙.
동양의 문화를 본떠 만든 그곳에서 백의 검객으로 전직하기 전, 기인을 만나 익혔던 발기술이 크라우젤을 통해서 재현되었고 이는 매우 빠르며 기이했다.
손가락 한 마디 간격만 두고 붙은 상태에서 발차기로 타격을 입혔으니 피아로는 귀신에 홀린 심정이었다.
하지만.
“간지러울 따름!”
하늘 찢기에 적중당하고도 멀쩡했던 피아로를 상대로 발차기 따위가 먹힐 리 만무했다.
피아로는 크라우젤의 발차기를 모조리 허용하고도 멀쩡했다.
어깨로 크라우젤을 밀치더니 앞으로 뻗었던 도리깨를 회수, 동시에 다른 손으로 쇠스랑을 꺼내 휘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