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7권 - 18화
레이단으로 귀환하는 길.
레이단군과 북부군의 수준 차이는 행군 과정에서도 극명히 드러났다.
레이단군은 호흡이 조금도 가쁘지 않고 날듯이 걷는 반면, 잔뜩 지친 북부군은 빈사상태로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전쟁에서 큰 희생을 치른 북부군이 정신적으로 약화되었기에 빨리 지친 것일까?
아니다.
이는 기본적인 능력의 차이였다.
북부군이 에트날 내에서는 나름 강병으로 꼽힌다지만 피아로와 아스모펠의 지옥훈련을 견뎌낸 레이단군과는 비할 바가 못 되었던 것이다.
레이단군 병사들은 기본적으로 레벨이 높을 뿐만 아니라 체력과 스태미나가 레벨 평균치를 훨씬 더 웃돌고 있었다. 더군다나 지형적응능력도 높아 일개 병사 수준이라고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레이단의 강병 육성법을 전수받고 싶구나.’
레이단군에 감명 받은 라덴이 바람을 품는 그때, 선두의 그리드는 강병 육성의 일등공신인 아스모펠을 치하하고 있었다.
“아스모펠, 그간 군대를 훈련시키느라 고생이 많았다. 그대의 노고 덕분에 이번 전쟁에서 보다 더 수월하게 이길 수 있었어.”
“과찬이십니다, 주군. 또한 군사훈련은 저 홀로 해낸 일이 아니라 피아로 총사령관도 함께한 일이 아닙니까.”
“아니, 과찬이 아니다. 왕실군과 레이단군의 실력차이가 하늘과 땅처럼 크더군. 그대의 능력, 이번 기회로 내 잘 알게 됐다. 그리고 피아로? 평소엔 밭일만 하다가 전쟁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은 그자? 그자에 비하면 그대가 백배천배 낫다.”
“주군…!”
그리드를 섬기게 된 이후, 뚜렷한 활약을 펼치지 못한 채 음지에서 고생하였던 아스모펠.
그는 영영 그리드의 눈에 띄지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하였으나 기우에 불과했다.
그리드는 이렇듯 자신의 노고를 알아주고 능력을 인정해주고 있었다.
그에 감격한 아스모펠이 분기하여 외쳤다.
“앞으로도 주군을 위해서 분골쇄신 하겠나이다!”
“암, 그래야지. 앞으로도 계속 군사훈련에 매진하도록.”
“…예?”
아스모펠의 공식 직위는 템빨 제2기사단의 단장이었다.
사실 병사들 훈련이나 시킬 짬밥이 아니라는 뜻이다.
일반적인 기사단장들은 본디 훨씬 더 고차원적인 임무를 수행했다.
특히 아스모펠의 경우, 서대륙 최강국 사하란 제국에서도 중추적인 역할만 도맡아 했던 인재다.
‘이런 내게 앞으로도 군사훈련이나 시키라니?’
역시 활약하지 못한 게 문제다.
‘주군께서는 내 실력을 여전히 잘 모르고 계심이 확실하다.’
이러다가 직책이 훈련교관으로 격하되는 것은 아닐까?
불안해하며 좌절하는 아스모펠에게 그리드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전리품은 얼마나 챙겼지?”
“…왕실군 병사들이 사용하던 칼 933정, 창 712정, 활 250정, 방패 195정, 갑옷 141개를 챙겼습니다.”
“그게 끝이야?”
“예…”
“왜?”
“예? 그건… 왕실군 병사들이 드롭한 아이템이 그게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적의 사상자가 4천을 넘었다며? 그럼 드롭템도 최소 4천개 이상이어야 정상 아닌가?”
“…”
몬스터나 유저들이 그러하듯, NPC들 또한 죽는다고 해서 무조건 아이템을 드롭하는 건 아니었다. 빈손으로 산화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리드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너무 기대 이하였다.
아무 말도 못하는 아스모펠로부터 시선을 뗀 그리드가 라우엘에게 물었다.
“라우엘, 승전은 돈이 된다며? 전리품만 챙겨도 돈방석에 앉을 수 있다고 했잖냐? 근데 뭐 이래? 완전히 기대 이한데?”
“130레벨 제한의 노멀 등급 병장기가 2,090정. 노멀 등급 갑옷이 141개. 최소 시세로 계산해도 무려 2만 5천 골드의 수익을 올리셨습니다만… 조만간 건물주가 되신다더니 이 정도 액수는 별거 아닌 거로 치부하시게 된 겁니까?”
“헉?”
2만 5천 골드를 한화로 환산하면 약 3,000만원이 된다.
반나절 전쟁 치렀답시고 획득한 수익이 어마어마한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큰돈이 되는 거지?”
“130레벨 제한의 노멀 무기 최소 시세가 10골드, 갑옷은 30골드가량 되니까요. 수천 개라는 단위를 무시하시면 안 되죠. 그걸 전부 녹여서 당신께서 아이템을 제작하실 재료로 사용한다면 훨씬 더 큰 이익을 창출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전쟁이란 참 좋은 거구나.”
“그렇죠. 전쟁을 잘만 활용하면 단지 전리품 노획뿐만이 아니라 군수 사업을 확대할 수가 있고 이를 기반으로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으니 참 유익합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제국이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죠.”
“그럼 우리도 이제 매일 전쟁하면 되는 건가?”
“…그게 어디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 뭐, 어쨌든 레이단이 전쟁의 거점으로 삼기에 최적화 된 영토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사방에 사막이 깔려있고 몬스터가 대량으로 출몰하니 천혜의 요새요, 피아로님 덕분에 대량의 식량을 생산할 수도 있으니까요. 때가 되면 유용하게 활용하도록 하죠.”
“피아로…”
피아로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그리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명색이 총사령관이라는 인물이 전쟁 내내 코빼기도 안 보이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괘씸했던 것이다.
“어떻게 딱 전쟁나기 직전에 알테스 산맥으로 튄 거지? 그것도 고작 병사 1명을 훈련시키겠다는 핑계로 말이야. 농땡이 피우는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는군.”
휴렌트가 이끌어온 별동대를 단신으로 박살냄으로서 레이단군의 후방을 지킨 피아로.
심지어 그는 850명의 새로운 농부… 아니, 포로를 확보하기까지 했다.
이번 전쟁의 일등공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피아로였지만 그리드는 아직 그 사실을 몰랐다.
***
“전하…! 전하아!!”
차갑게 식은 밤의 사막.
고귀한 혈통이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고 객사했다.
렌 왕자의 주검을 품에 안은 척슬리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그를 바라보는 아스란의 눈빛은 더 없이 호의적이었다.
“척슬리 경, 그대의 왕실에 대한 충정을 내 다시금 되새겼소. 자, 이제는 내 손을 잡으시오. 앞으로 죽게 될 그날까지 나를 섬기시오.”
“…”
척슬리는 렌 왕자만을 각별히 여기지 않았다. 모든 왕족을 동등하게 공경했다.
하지만 이 순간 아스란에게 적대심이 생겼다.
친형제를 살해하고도 눈 하나 깜빡 않는 그의 잔학한 모습이 척슬리에게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무서운 분이로다!’
또한 나의 존재 가치를 상실시킨 분이다.
렌 왕자를 지켜내지 못한 스스로가 더없이 무력하게 느껴진다.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절망을 삼켜 숨긴 척슬리가 아스란에게 고개를 숙였다.
“…따르겠나이다.”
이게 내 의무다.
아스란이 어떤 인물이든, 그가 에트날의 왕족인 이상 로칸 가문의 수장인 척슬리는 따라야만했다.
하지만.
‘왕위에 눈이 멀어, 외세의 힘을 빌려와 친형제를 시해한 당신께 진정으로 충성하지는 못할 듯합니다.’
단지 의무를 수행할 뿐이다.
늘 왕실을 위해서 뜨겁게 불타오르던 척슬리의 열정이 사늘하게 식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속내를 알 리 없는 아스란 왕자는 싱글벙글 기뻐할 따름이었다.
“오늘처럼 기쁜 날이 또 있을까.”
렌보다 단지 2년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왕이 되지 못하는 운명이었던 아스란 왕자.
그는 늘 자신의 운명을 저주했었다.
왕이 되지 못한 왕자로서 평생을 변방에서 썩어 지내야할 자신의 신세를 증오했었다.
하지만 렌 왕자의 어리석음 덕분에 이 순간 운명이 바뀌었다.
“자, 이만 돌아갑시다. 그리드 공작에게 살해당한 형님의 주검을 잘 챙기도록 하시오.”
에트날 왕국력 406년 2월 10일.
7천의 대군을 일으켜 레이단을 침공하였던 제1왕자 렌이 전사하였다.
에트날 왕국력 406년 2월 17일.
13대 국왕 비스바덴이 붕어하고 제2왕자 아스란이 왕위를 이었다.
에트날 왕국력 406년 2월 21일.
14대 국왕 아스란이 대신회의에서 판결했다.
“그리드 공작이 비록 왕자를 살해하였다고는 하나 죄가 되지는 않는다. 구국의 영웅인 그리드 공작의 공로를 잊고 명분도 없이 침공한 렌 왕자가 명명백백히 잘못하였고 그리드 공작은 정당방위를 하였을 뿐이다.”
이후.
그리드는 렌 왕자를 죽였다는 누명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작위를 유지하고 전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됐다.
에트날의 대영주 중 하나로서 그의 입지는 여전히 견고했다.
하지만 이는 라우엘이 바란 형태가 아니었다.
‘내 본래 계획대로라면, 그리드님의 입지는 지금쯤 이미 왕실을 넘어서야만 했다.’
괜히 렌 왕자를 살려 보냈던 게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렌 왕자를 죽인 바람에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렌 왕자를 죽인 범인?
라우엘은 아스란 국왕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표면화시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정확한 물증이 없을뿐더러 애초에 명분도 없었다. 아스란은 전대 국왕 이상으로 그리드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영리하다.’
그리드에게 누명을 씌움으로서 그리드의 기반이 커지는 것을 억제시킴과 동시에 그리드와 친분을 쌓음으로서 회유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제국과의 교류를 이뤄 왕성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대시키고 있다.
‘아스란이 국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제국의 노골적인 협력태도. 이는 아스란 뒤에 제국 황실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겠지. 아스란은 제국 덕분에 기반을 다질 수 있게 되고 제국은 아스란을 이용해서 에트날을 완벽하게 통제하니 서로가 좋은 일이군.’
아스란, 제법 골치 아픈 상대다.
눈살을 찌푸린 채 생각해보던 라우엘의 입가로 이내 미소가 피어올랐다.
“크크큭…! 아스란 왕이여, 제법이로구나. 이생에서 내 승부욕을 자극시킨 상대는 그대가 처음이다. 내 머릿속 뇌의 주름들 또한 흥분하여 꿈틀꿈틀 날뛰는구나.”
커다란 손을 들어 자신의 작은 얼굴 절반을 감싸 쥔 라우엘.
창가에 등을 기댄 그가 투명한 유리잔을 들어올렸다.
“이 유리잔을 붉게 채울 피눈물의 주인, 그대가 될지 내가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
그렇게.
라우엘이 한껏 몰입하여 분위기를 잡는 동안 그리드는 그저 즐거워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스란 국왕이 또 선물을 보냈다고? 이야, 그것 참 알면 알수록 착하고 고마운 녀석일세. 하하하! 전대 국왕보다 훨씬 더 낫구만!”
전쟁 후.
대량의 전리품을 획득하고 아스란 왕으로부터 금은보화를 하사 받은 레이단은 이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풍족해졌다.
그리고 이 재력은 레이단의 1천 병사 전원이 <양산형 그리드 세트>를 무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레이단의 병사들은 진정한 정예병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
“엉?”
4개의 갓 핸드와 함께 양산형 그리드 세트를 찍어내느라 바쁜 그리드.
그가 바람도 쐴 겸, 로드와 함께 시간도 보낼 겸 외성 바깥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째 논밭에 일꾼들이 대량으로 늘어나있었던 까닭이다. 대략 천 명 가까이는 늘어난 듯이 보였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솟아난 거지?”
늘 인구난으로 허덕이던 레이단이 이토록 많은 농부를 거느리게 되다니?
황당해하며 의아해하는 그리드에게 피아로가 다가와 설명했다.
“알테스 산맥에서 우연히 주워왔습니다.”
“…”
산에서 사람을 주워왔다고? 그것도 무려 800명이 넘는 사람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앞서 울족이라는 소수민족을 데려온 경력이 있는 그리드였기에 곧이곧대로 믿었다.
“알테스 산맥에 거주하는 소수민족들이 있었나보군. 아주 좋아. 전쟁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그래도 한 건 했군.”
에트날 왕실군이 소수민족 취급을 당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로이먼은 의문이었다.
로드를 품에 안은 그리드가 입성하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피아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피아로님, 어째서 공작각하께 사실대로 말씀드리지 않은 건가요? 저들은 소수민족 같은 게 아니라 우리와 같은 에트날의 백성들이잖아요?”
“기껏 얻은 인력을 군에 빼앗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결코 주군을 기만하는 행위가 아니다. 농사가 곧 국력이니 결국에 나는 주군을 위한 선택을 한 것이다. 또한 나는 이들에게 별도의 군사훈련도 시켜서 전시에는 병사로도 활동하게끔 할 예정이다.”
“그렇군요!”
피아로의 압도적인 무용을 목격한 로이먼은 피아로를 진심으로 존경하며 따르고 있었다. 피아로가 하는 말이라면 모든 옳게 들렸다.
어쨌든 덕분에 레이단에 농부 850명이 추가됐다.
아침에는 밭일을, 저녁에는 군사훈련을 받는 희한한 농부들이었다.
그들 틈에는 오러 마스터 휴렌트도 섞여있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매우 혼란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이기는 하나 <★히든 퀘스트★즐겁고 신나는 훈련>의 보상이 워낙 탐나 도중에 관둘 수도 없었다.
나날이 강성해지는 레이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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