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7권 - 17화
라우엘의 조언을 받아들인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했다. 그렇다면 렌 왕자에 대한 처분은 달리하도록 하지.
분노로 점철되었던 그리드의 검은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후로이의 언변과 라우엘의 지식을 지켜보며 배운 바.
신중하게 생각하고 침착하게 입을 연다.
“렌 왕자, 한 가지만 묻자. 그대가 레이단을 침공했다는 것은 즉 국왕전하께 변고가 발생하였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되는 거겠지?”
‘이자가 역시 영리했구나.’
괜히 내 책략들을 간파하고 무력화시킨 것이 아니다.
흑안.
보기 드문 그 신비로운 눈동자가 나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도무지 천민 출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경외심을 느끼며 마른 침을 삼킨 렌 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국왕전하의 생명은 슬프게도 경각에 달렸고, 나는 무사히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서 당신을 칠 수밖에 없었소.”
말해나가던 렌 왕자가 이를 갈았다.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그리드에게 다시금 원망의 시선을 보냈다.
“당신이…! 당신이 그날의 작위 수여식에서 국왕전하만이 아닌 왕실 그 자체에 충성을 맹세했다면! 그랬다면 나 또한 이런 극단적인 선택은 안 했을 것이요!!”
단순한 책임전가가 아니다.
렌 왕자가 그리드에게 칼날을 드러낸 것.
렌 왕자의 입장에서는 정녕 어쩔 수가 없었기 때문이고 이는 모두 라우엘이 의도한 바였다.
라우엘은 사악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당신의 극단적인 선택이 왕실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그리드님의 입지를 높이게 되었으니 잘한 일이지.’
‘라우엘 저 녀석.’
라우엘의 웃는 낯을 확인한 그리드는 소름이 돋았다.
똑똑한 놈들은 역시 무섭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흠… 왕자의 말대로 나는 국왕전하께 충성을 맹세한 몸.”
그리드는 정치적인 시각으로 대국을 읽었다. 그러자 렌 왕자에 대한 분노는 사소한 것이 되어 억누를 수 있었다.
“나, 그리드 레이단 드 스테임이 결정한다. 레이단을 침공하여 내 백성을 해하고 내 기반을 흔들려한 렌 왕자의 죄가 막중하나, 렌 왕자는 국왕전하의 후계자이며 에트날 왕실의 기둥인 바. 나는 신하 된 도리로서 왕자의 죄를 사한다.”
“……!”
렌 왕자와 왕실군 생존자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그리드가 왕자를 하대하고 있음은 문제가 되는 게 아니었다.
죄를 사한다.
이는 즉 그 어떤 책임도 물지 않겠다는 뜻이 된다.
세상에 이처럼 거대한 자비는 듣도 보도 못했다.
믿을 수 없었던 렌 왕자가 재차 물었다.
“방금 전에는 사형이라더니…! 갑자기 내 죄를 없애주는 조건이 뭐요? 내게 대체 어떤 터무니없는 것을 요구하려고 그러는 거요!”
그리드의 두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이건 봐준다고 해도 지랄이네.”
아니꼬운 렌 왕자의 태도에 결국 성질을 드러내는 그리드였다.
도리도리 고개를 저은 라우엘이 바니바니에게 눈짓했다.
이 장면은 눈치껏 편집하라는 뜻이었고 눈치 빠른 바니바니는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드는 다시 말하고 있었다.
“그냥 봐주겠다고. 너는 내가 충성을 맹세한 국왕전하의 후계자니까. 이는 국왕전하께 충정을 지키는 일이며 에트날의 혼란을 억제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그냥 봐주겠다고, 이 자식아.”
“어찌… 어찌 그런 결단을…”
그리드의 마음이 하해와 같이 넓음을 깨달은 렌 왕자가 감격했다. 하여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
‘이유야 어찌됐든 나는 그리드 공작의 모든 것을 해하려했다.’
이러고도 순순히 용서를 구할 수 있다니…
깊이 고개 숙인 렌 왕자가 진정 된 마음으로 말했다.
“나, 에트날의 제1왕자 렌이 이 자리에서 맹세하오. 그리드 공작, 오로지 조국의 안위를 위하여 이 죄인을 용서한 당신의 희생과 은혜… 내 평생을 잊지 않고 갚아나가겠소.”
“뒤통수나 치지 마라.”
퉁명스레 대꾸한 그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의 좌우로 도열하고 있던 레이단군 1천과 북부군 생존자 5백이 일제히 차렷했다.
실로 장관이다.
과연 20억 유저의 정점에 있는 인물 중 하나답다.
‘모두가 처음에는 동등한 조건으로 게임을 시작한다.’
하지만 어느 누구는 아직도 오크와 씨름이나 하고 있는 반면 그리드는 일국의 공작이 되어 수천 병사 위에 군림하고 있다. 정녕 대단한 사람이다. 그를 바라보는 바니바니의 시선에는 선망이 가득했다.
‘지금 보니 인물도 좋은 것 같고.’
흑화를 사용한 직후의 그리드는 눈동자가 보다 더 검고 피부는 하얗다. 뚜렷한 색조가 인물을 승화시켜주었으니 막말로 미남 같은 착각을 주었다. 화면빨을 무척 잘 받았다.
한때 전 세계의 여성들을 설레게 만들었던 <백발 버전 그리드>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이만 돌아간다.”
바니바니의 영상에 담기는 그리드.
그는 더 이상 전장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막사를 철수시키고 군을 추슬러 레이단으로 귀환했다.
떠나기 전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왕실군 생존자들 사이에 섞여있는 척슬리였다.
척슬리는 다짐하고 있었다.
‘무용과 지략, 그리고 넓은 도량까지 갖춘 영웅 중의 영웅이시여.’
왕자전하를 용서해주셨음에 깊이 감사드리며,
‘우리 로칸 가문은 영원토록 당신과 당신의 가문을 공경하리라 맹세합니다.’
본래라면 진즉 이래야했다.
그리드는 구국의 영웅이었으니까.
한데 수세에 몰렸답시고 그 사실을 망각하고 우를 범하였으니 렌 왕자와 척슬리는 죄스러울 따름이었다.
***
“목숨을 부지한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긴 하나… 씁쓸하군. 이제 나는 왕위계승서열에서 완전히 뒤처지게 되었으니까.”
패퇴하는 왕실군의 숫자는 불과 1천도 되지 않았다.
7천 병력 중 6천 이상을 잃은 것이다.
또한 24명의 은룡대원과 39명의 기사를 잃었고 페럴과 앙드가 전사했다.
이번 전쟁으로 인해서 왕실과 왕실을 지지하던 세력들이 큰 타격을 입었으니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왕위계승서열이 밀리는 것은 기본이고 어쩌면 근신 처분을 받을 수도 있었다.
“왕가의 피는 그 어떤 보석보다도 고귀합니다. 전하께서 목숨을 지키실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 족합니다. 또한 그리드 공작의 왕가에 대한 충성을 확인한 것은 큰 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척슬리가 최대한 위로했다.
늘 극진한 마음으로 왕실을 섬기는 그가 렌 왕자는 고마웠다.
“서두르도록 하지. 아바마마께서 마지막 가시는 길을 곁에서 지켜드려야 하니까.”
비스바덴 국왕의 목숨은 이제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그의 곁을 지키지 못할 경우 렌 왕자의 죄는 더욱 더 막중해졌다.
초조한 마음에 행군 속도를 높이는 렌 왕자와 척슬리의 눈앞으로 두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은 에트날의 제2왕자 아스란이었고 다른 한 명은 로브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기에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아스란? 왕성에 있어야할 네가 어찌 이곳에 있는 게냐?”
동생의 예상치 못한 등장에 당황하는 렌 왕자에게 아스란이 쏘아붙였다.
“저는 형님께서 패전하시리라고 확신했었습니다. 7천 대군을 이끌어 출정해봤자 전설인 그리드 공작을 해치는 일이 어디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전설은 일개 사병으로 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아직 왕실에는 그리드 공작을 적대할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미안하다. 내 초조함에 억눌려 사리분별을 못하고 왕실에 큰 타격을 입히고 말았구나.”
“아니요. 제게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형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형님의 패전을 예측하고도 형님의 출정을 말리지 않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스란은 본래 과묵한 왕자였다. 쉽게 입을 열지 않았고 한 마디를 하더라도 열 번은 생각하는 과정을 거쳤다.
친형제인 렌 왕자조차도 지난 30년 동안 아스란의 목소리를 들어본 경험을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한데 지금.
아스란이 저토록 도발적인 표정으로 거침없이 말하고 있다. 어째 내용도 불안하다.
렌 왕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스란, 네 녀석 설마.”
아스란의 입가로 비릿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눈치 채셨습니까? 저는 형님의 자멸을 원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금의 결과는 다소 아쉽군요. 그리드 공작에게 목숨을 잃고 완벽하게 파멸하셨다면 보다 이상적이었을 텐데.”
“아스란 왕자님! 농이 심하십니다!”
척슬리는 굳이 렌 왕자가 아닌 왕실 그 자체에 충성을 맹세한 몸이다.
오로지 왕실의 안녕만을 기원하는 그였기에 왕자간의 불화를 원치 않았다.
분위기를 진정시키고자 일갈하는 척슬리에게 아스란이 손을 내밀었다.
“척슬리 경, 이리오세요. 제가 지금부터 형님의 목숨을 취할 것인데 거기에 당신이 휩쓸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게 무슨…!”
척슬리가 귀를 의심했다.
황망해하면서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그를 확인하고 한숨 쉰 아스란이 로브의 사내에게 부탁했다.
“되도록이면 척슬리 경은 살려주십시오. 우리 왕국의 보배입니다.”
내내 아무 말 없이 서있던 로브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펄럭!
정체불명의 사내가 입고 있던 로브가 밤하늘 위로 나부꼈고, 렌 왕자가 그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 사이.
터엉-!
로브를 벗고 모습을 드러낸 사내가 어느새 렌 왕자의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놈!”
척슬리가 다급히 움직였다.
렌 왕자를 향해서 꽂히는 사내의 검을 막아내고자 사력을 다했다.
하지만 사내의 검술은 척슬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척슬리의 검을 가볍게 흘려버리더니 렌 왕자의 몸을 사선으로 그었다.
“커…흑!!”
갑옷을 통째로 베어버리는 검격에 당하고 피를 토한 렌 왕자가 그대로 낙마했다.
차가운 사막의 모래를 뜨거운 피가 빠르게 적셨다.
“왕자전하!!”
살려야만 한다!
오로지 그 일념에 휩싸인 척슬리가 렌 왕자에게 몸을 날렸다. 어떻게든 이곳을 이탈해 응급처치부터 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아스란이 데려온 정체불명의 사내가 척슬리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네놈은 대체 뭐냐!”
나는 검호다. 대륙 최강의 검사다.
한데 나를 월등히 상회하는 검술을 구사하다니?
혼란스러워하는 척슬리에게 정체불명의 사내가 답변해주었다.
“흔히들 아홉 번째 기사라고 부릅니다.”
“……!”
척슬리가 뒤늦게 사내의 행색을 살폈다.
사내는 적기사단을 상징하는 적색의 갑주를 무장하고 있었다.
“솔로 넘버 나이트!!”
수백 년 동안 서대륙을 지배했던 사하란 제국의 최강 기사들.
그들의 명성은 적해 너머 동대륙에까지 알려졌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는 검호다!’
솔로 넘버 나이트가 제국 최강의 기사라면 나는 대륙 최강의 검사다.
내가 위어야만이 정상이다.
‘한데 왜!’
혼란스러워하는 척슬리에게 아홉 번째 기사가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불과 1백 년 전까지만 해도 검호는 최강의 검사를 뜻하는 칭호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검성만이 최고였죠.”
하지만 지난 1백 년 동안 검성의 경지를 이룰만한 자질을 타고난 자가 등장하질 않았다. 검호조차도 20년에 한 번씩 등장하는 수준이었다.
“하여 검호가 즉 최강자라는 인식이 박혀버렸습니다만, 아무래도 당대에는 검성의 자질을 타고난 인재가 있나봅니다. 검호가 흔해진 걸 보면.”
“너 또한 검호란 말인가!”
“그렇죠. 고지식한 검술을 구사하는 당신과 비교하면 훨씬 더 검성에 가까운.”
푸욱!
날 끝이 Y자로 갈라진 기이한 검.
그것이 척슬리의 검을 물어 떨어뜨리더니 이어서 렌 왕자의 심장을 꿰뚫었다.
“전하아!!”
품에 안은 렌 왕자의 몸이 빠르게 식어간다.
그를 느낀 척슬리가 절망하며 오열하였고, 아스란 왕자는 아홉 번째 기사의 무력을 위시해 병사들을 수습했다.
***
본래는 아이린을 납치하러 왔던 20인의 은룡대원들.
검사인지, 마법사인지, 농부인지 모를 감자 매니아에게 제압당하고 붙잡힌 그들은 본인들이 꼼짝없이 살해당할 줄로만 알았다.
한데 감자 매니아는 의외로 자비를 베풀어주었다.
목숨을 취하기는커녕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구속했던 마력 탐지기를 제거해주는 게 아닌가?
“하찮은 네놈들도 인간이랍시고 뭔가 딱한 속사정이 있었나보군. 어쨌든 이걸로 너희들은 자유다. 굳이 너희들을 죽임으로서 천한 피로 내 몸을 더럽히고 싶진 않으니까 썩 꺼져.”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되었고 이후엔 또 강제로 어쌔신으로 육성되었던 우리들.
늘 지옥 같은 삶을 살았던 우리들에게 자유를 주다니?
은룡대원들은 감동이었다. 이름 모를 감자 매니아에게 너무 감사했다. 하지만 당장 갈 곳이 없는 게 문제였다.
“진실 된 마음으로 당신을 따르고 싶습니다.”
“…”
감자 매니아 블란드는 귀찮았다. 그에게 이런 나약한 어쌔신들 따윈 하등 도움도 되지 않았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나한테 너흰 귀찮은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정 뭐라도 하고 싶다면 아이린 공작부인의 곁을 지켜라.”
“존명!”
명을 받든 은룡대원들이 즉각 이동했다.
한데 하필이면 이때 아이린은 로드의 방에 있었다.
그림자의 왕, 카심의 영역 말이다.
“네놈들은 뭐냐?”
“허억!”
우리씩이나 되는 고수가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범의 아가리로 들어와 있었다고?
사색이 된 은룡대원들을 바라보는 카심의 눈에 이채가 실렸다.
“호오, 다루카의 술법인가? 네놈들 꽤나 흥미로운 잡기를 익히고 있구나.”
훗날 대륙을 호령하게 될 로드 스테임.
그의 그림자로서 무수한 활약을 펼치게 될 최강의 어쌔신 집단 <템빨 그림자단>의 기틀이 마련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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