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7권 - 16화
‘벌써 지치신건가.’
전장에서 큰 활약을 펼치는 그리드였지만 라우엘은 썩 흡족치 못했다. 솔직히 기대 이하였다.
‘최소 양학전에서만큼은 무결점의 위용을 보여주시길 바랐는데.’
적의 움직임을 읽고 대처하는 능력, 지형을 활용하는 능력, 스킬을 사용하고 물약을 복용하는 타이밍과 아이템을 활용하는 능력 등등.
현재의 그리드는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은 능력치를 발휘하고 있었으나 하이랭커들과 비교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다고 비하하는 건 아니다.
최상이나 최고는 아니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겠다.
‘유라님의 실력을 바로 곁에서 목도해봤기에 더욱 더 절실히 와 닿는다. 그리드님은 아직도 부족해. 우선 스태미나와 마나의 안배 능력이 나빠.’
그리드는 항시 명심해야만 한다.
전설급 스킬들의 위력, 필시 뛰어나기는 하나 자원 소모량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말이다.
‘위기를 겪을 때마다 파(派)와 제(制)에 의존하는 습관이 최악이다. 논타켓 스킬을 거의 무조건 회피할 수 있는 실력자들을 상대로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거야. 매직 미사일을 남발하는 이유도 전혀 모르겠고.’
그뿐만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인공지능에 불과한 갓 핸드를 필요 이상으로 신뢰해. 갓 핸드가 대처하지 못하는 형태의 공격… 예를 들면 더미를 앞세우는 형태의 공격에 당할 경우 어쩌시려고.’
랭커들 사이에서 <지존>이라고 불리는 존재들.
간단한 예로 크라우젤과 아그너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공략할만한 여지를 도통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반면 그리드는?
상대적으로 빈틈이 많다.
라우엘이 봤을 때는 유라가 300레벨을 달성하는 즉시 그리드를 넘어설 것 같았다.
‘분명…’
그리드는 꾸준히 성장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믿어 봐도 좋겠지만 라우엘은 걱정이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한계점이라는 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
설령 그리드가 재능적 한계를 맞이했을 지라도.
‘아이템으로 극복하면 될 일이다.’
그리드에게는 <전설적 아이템 창조>라는 스킬이 있다.
활용하기에 따라서 전혀 새로운 형식의 아이템을 창조할 수도 있었으니 그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전형적인 아이템 말고 보다 창의적인 아이템을 창조하실 수 있게끔 앞으로 내가 돕겠다.’
전장을 살피고 병사들을 통솔하는 와중에도 그리드를 염두에 두고 생각하는 라우엘.
겉으로 보이는 태도와 달리 늘 지고지순한 충신이었던 그의 시야로 렌 왕자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드디어 전장을 이탈하는가.”
기사들이 그리드를 막고 병사들은 북부군과 레이단군을 상대하느라 목숨을 건 이때.
적의 수장 렌 왕자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고 있었다.
라우엘의 바람대로였다.
‘포획하기가 더 수월해졌군.’
영주대행의 권한으로 <레이단 병사목록>을 열어 레벨 순으로 정렬한 라우엘.
그가 13명의 병사들을 지목했다.
“너희들은 이걸 무장하고 나를 따라라.”
“예!”
라우엘이 병사들에게 지급하는 무구들.
그것은 160레벨 제한의 <양산형 그리드 세트>였다.
***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
렌 왕자는 극심한 두통을 느끼고 있었다.
달이 뜨고 차갑게 식은 사막의 냉기조차 그의 머리에 끓어오르는 열을 식혀주지 못했다.
‘병력의 차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무력과 내 책략을 모조리 간파할 정도의 지략을 동시에 갖추다니!’
그리드!
그는 렌 왕자의 상정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적으로 돌리면 안 되는 존재였다. 왕자로서의 존엄을 상실할지언정 굴복해야만 하는 대상이었다.
다그닥다그닥!!
사막의 모래를 거침없이 질주하는 파트리안산 명마.
녀석의 고삐를 몰아치며 질주하는 렌 왕자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고통과 분노, 그리고 후회와 절망이었다.
금일의 패전으로 인해 제1왕자로서의 기반을 완전히 상실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좌절하는 그의 뒤를 추적해오는 무리가 있었다.
라우엘과 13인의 병사였다.
“렌 왕자! 죽어 악신의 아가리로 떨어지고 싶지 않다면! 정녕 살고 싶다면 당장 그 말을 멈추시오!”
“너 같으면 멈추겠냐!!”
되도 않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라우엘에게 반발한 왕자가 더욱 세차게 말을 달렸다.
그에 한숨 쉰 라우엘이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활을 쏴라.”
“예?”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라니?
레이단의 병사들이 당황했다. 기마술의 초짜인 그들에게 있어서 기궁술이란 아득히 먼 경지였다.
망설이는 그들에게 라우엘이 소리쳤다.
“템빨을 믿어라!”
“템빨…!”
일반적인 NPC들은 템빨의 개념을 모르는 반면 레이단의 병사들은 달랐다.
주군부터 상관들 죄다 템빨러였으니 템빨에 대해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고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고 있었다.
이를 악 문 그들이 말을 달리는 채로 활을 빼어 들었다.
라우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의 시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말의 고삐를 놓았습니다! 위험합니다! 낙마율이 60퍼센트 상승합니다!]
[<양산형 그리드의 각반>이 등자에 고정 된 상태입니다. 낙마율이 대폭 하락합니다.]
‘제대로 만드셨군!’
정예강병의 소양에는 기마술이 포함된다.
하지만 달리는 말 위에서 창칼을 휘두르고 화살을 쏘는 수준의 기마술을 단련하려면 상당한 시간을 소요하는 수밖에 없다.
특히 레이단의 지형은 사막인지라 초보자들이 기마술을 단련하기가 더욱 힘들었다.
이에 대해 고민해본 라우엘이 그리드에게 부탁해보았다.
템빨로 해결해주실 수 없겠느냐고.
그에 대한 그리드의 호응이 바로 <양산형 그리드의 각반>이다.
각반 아래 고리가 달려 말안장 등자에 고정시킬 수 있는 형태였다.
말에서 내릴 때 불편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하지만,
‘그거야 차츰 익숙해지면 될 일!!’
끼릭-!
달리는 말 위!
상체를 뒤로 크게 젖히고 활시위를 당기는 라우엘과 13인의 병사들!
곁눈질로 그들을 훔쳐본 렌 왕자가 경악했다.
‘일개 병사들 따위가 궁기술을 익혔다고?’
기사들조차도 체득하기 어려워한다는 기술이 아닌가!
질색하는 렌 왕자의 모습을 확인한 라우엘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레이단의 병사들이여, 그리드 공작각하의 충신들이여! 날카로운 화살촉에 그대들의 분노를 담아 쏴라! 감히 레이단을 침공한 적의 수장에게 후회와 절망이라는 이름의 화살을 관통시켜라!!”
오글오글!
라우엘의 소름끼치는 외침에 13인 병사들은 닭살이 돋았다. 하지만 피아로와 아스모펠의 지옥훈련을 견딘 정예병들답게 동요하지 않고 마음을 진정시키더니 흔들림 없는 호흡으로 활시위를 놓았다.
파앗-!
파파파파파팟!!
“왕자님을 지켜라!!”
왕위계승서열 1위인 렌 왕자의 중요도는 에트날 왕실 내에서 매우 높다. 하여 늘 은룡대원들이 곁을 지켰다.
<다루카의 옷>을 전개, 모래와 어둠에 은폐한 채 왕자를 따르던 5명의 은룡대원들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단도로 14발의 화살을 모조리 베어 넘겼다.
어둠을 수놓는 은빛의 검광이 무척 예리했다.
‘어마어마한 실력자들이다!’
병사들의 얼굴에 낭패가 실렸다. 자신들의 실력으로는 저 고강한 어쌔신들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찰나지간에 간파해낸 것이다.
하지만 라우엘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노에!”
지옥제일 마수 멤피스.
이번 전쟁 내내 녀석은 라우엘의 품속에 잠들어 있었다.
라우엘을 호위하라는 그리드의 명령을 받든 것이었다.
“냥!”
네 다리와 작은 악마날개를 활짝 펼치며 등장하는 검은 고양이!
뱃살을 출렁이며 어쌔신들에게 날아간 녀석이 날카로운 발톱을 전광석화처럼 휘둘렀다.
“냐냐냐냐냐냐냐냐냥!!”
“헉!”
“윽!”
“컥!”
은룡대원들은 강하다.
아직 200초반레벨에 불과한 노에에게 쉽게 제압당하지 않았다. 집중해서 단도를 휘둘러 노에의 할퀴기 공격에 맞서 버텼다.
하지만 노에에겐 비장의 수가 있었다.
“캬옹!!”
바둑알 같은 눈동자를 빛내며 아가리를 크게 벌리는 노에.
녀석에게 일거에 집어삼켜진 은룡대원들의 민첩성이 대폭 하락하였고,
“내가 전생에 비하면 한 물 갔다지만.”
라우엘의 손끝으로 기공이 집중됐다.
이어 대지에 상처를 남기는 <지룡의 발톱>이 솟구치더니 약화된 은룡대원들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이, 이럴 수가!”
은룡대원들을 저렇게 손쉽게 제압하다니!
‘저 미친 고양이는 뭐지!’
모골이 송연해진 렌 왕자가 말 달리는 속도를 더욱 높였다. 하지만 은룡대원들의 민첩성을 집어삼킨 노에의 이동속도가 그를 월등히 상회했다.
퍽!
“윽!”
고양이의 말랑말랑한 앞발에 뒤통수를 얻어맞고 낙마하는 렌 왕자.
일생일대의 치욕이었다.
***
레이단군의 막사.
군대를 버리고 퇴각했던 제1왕자 렌이 라우엘과 병사들에게 붙잡혀왔다.
“너희들이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왕족. 그것도 왕위계승서열 1위인 렌은 스스로가 고귀함을 넘어 성스러운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한낱 병사들 따위에게 붙잡혀 개처럼 끌려오는 모욕?
그로서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감당키 어려운 수치였다.
으르렁거리며 발악하는 그의 눈빛에 가득 담긴 분노와 원망을 읽어낸 그리드가 황당해했다.
“이거 완전히 미친 새끼네.”
“뭣…!”
내 비록 지금은 포로의 신세가 되었을지언정 에트날의 왕자가 아닌가?
최소한의 예우는 당연한 것인데 개처럼 끌고 와 무릎 꿇린 것으로 모자라 미친 새끼라니!
“이, 이익! 그리드 공작! 당신! 당신 어찌 그런 막말을!!”
“막말은 개뿔. 아니, 너 미친 거 맞지 않냐? 먼저 내 영토를 침공해온 주제에 실패하더니만 도리어 나를 원망해? 그게 무슨 개새끼들도 안 할 염치없는 태도야?”
“더 이상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꽈드득!
이를 가는 렌 왕자의 하관에 핏대가 가득 섰다. 저러다 이가 부러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리드가 한숨 쉬었다.
“영영 제 잘못을 모를 놈이군.”
못 배워먹은 강자들의 성향이 이렇다.
타인을 짓밟고 제멋대로 사는 것에 익숙해진 나머지 늘 고자세다. 본인의 잘못을 자각하는 경우가 없다.
‘이준호, 최찬성 같은 새끼들이 이랬지.’
그들에게 평생을 시달려왔던 그리드였기에 잘 알고 있었다.
“너 같은 놈들은 쉽게 변하지 않지. 그리고 나 또한.”
그리드의 현재 인격은 대부분 오기로 형성됐다.
평생을 남에게 무시당하고 짓밟히며 품은 원한을 오기로 승화시켰고 그것은 집념과 난폭함을 낳았다. 삶의 여유를 되찾은 지금도 그 근본적인 성향은 변치 않았다.
“눈깔아.”
퍼억!
그리드는 상대가 왕자라고 해서 특별히 취급하지 않았다.
발로 대가리를 내리쳐 고개를 숙이게끔 만들더니 즉각 판결했다.
“넌 사형이다.”
주변이 술렁였다.
서대륙에는 포로법이라는 게 있다.
포로가 귀족이나 왕족일 경우 함부로 해할 수 없다는 대륙공통법으로서 수백 년간 이어져온, 오로지 금수저들을 위한 상식이었다.
그에 위배되는 그리드의 선택이 렌 왕자를 비롯한 왕실군을 경악시켰다.
라우엘이 그리드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참으시죠. 렌 왕자를 죽일 경우 레이단은 에트날을 완전히 적대하고 독립해야만 합니다.
-독립하면 되지. 어차피 난 왕이 될 거잖아?
-시기상조입니다. 지금 에트날로부터 레이단이 독립할 경우 스테임 후작의 북부가 고립 된 채 집어삼켜질 우려가 있고 레이단은 제국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흠.
그리드의 이해도는 낮다. 하지만 예전처럼 남의 말에 아예 귀를 기울이지 않는 벽창호의 태도를 보이진 않았다.
-잘은 모르겠다만… 그럼 어째야하는데?
-최대한 자비를 베푸는 형태로 살려 보내시죠. 어차피 렌 왕자는 이번 전쟁의 책임을 물어 기반을 완전히 상실하게 될 겁니다. 딱히 견제할 가치조차 없는 인물로 전락하게 될 그를 살려 보냄으로서 당신은 왕실에 충성하고 있다는 명목을 세울 수 있고 넓은 도량까지 알릴 수 있으니 일석이조입니다. 수많은 세력들이 당신을 지지하게 될 것이며 레이단은 에트날 내에서 보다 더 큰 입지를 다질 수 있게 되겠죠.
-하지만 나는 이미 침략자들을 살려 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했었는데?
-말이야 번복하라고 있는 거죠. 딱히 위엄을 잃지는 않을 겁니다. 아니, 도리어 당신의 현명한 선택에 수많은 유저들이 감탄하겠죠.
-그… 그래?
말이야 번복하라고 있는 거다.
이 말이 유독 마음에 들면서도 거슬리는 그리드였다.
-너, 나중에 내 뒤통수 후려칠 거 아니지?
-당신이 제게 이득을 주는 존재로서 군림하는 이상 결코 그럴 일 없습니다.
-…네가 무서워서라도 열심히 해야겠네.
-후후훗!
웃는 것조차도 중2병 같은 라우엘이었다.
그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 누구보다도 그리드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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