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7권 - 15화
과연 전설의 힘은 위대하다.
단신으로 1천 북부군을 구원하고 5천 왕실군의 발목을 붙잡은 그리드 공작.
그는 절정에 이른 무력의 위력을 여실히 증명해보였다.
솔직히 렌 왕자는 경외심을 느낄 지경이었다.
4개 황금 손을 위시하여 병사들을 휩쓰는 그리드의 모습은 전장의 화신 그 자체였다.
하지만!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무력보다 지략이다!’
전쟁은 하나의 전장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전략과 전술이 만들어내는 흐름을 승리로 귀결시키려면 보다 대국적인 시야를 가져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드는 최악이었다.
군주 홀로 적진에 뛰어들다니?
진정으로 어리석다.
‘그리드! 스스로의 무력을 과신하여 적진 한가운데 몸담은 행위, 이제 곧 후회하게 될 것이다!’
잠시 후에 도착할 별동대가 레이단군의 후방을 치고, 이어 은룡대원들이 공작부인을 납치해올 터였다.
그때가면 주도권은 완전히 렌 왕자에게 넘어온다. 그리드는 철저히 고립 된 채 무력해질 것이었다.
왕실군의 전쟁 승리는 예정 된 수순이나 다름이 없었다.
‘훗훗! 네놈의 체력이 무한할 리도 없고 말이지!’
실제로 그리드의 움직임은 처음만 못했다.
견고한 방진을 펼친 채 압박해오는 병사들을 상대하는 한편 쉴 틈 없이 날아오는 화살과 마법, 그리고 기사들의 절묘한 기습을 상대하느라 지쳐보였다. 둔해졌음이 확연히 드러났다.
‘이제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된다!’
그리드를 주시하는 렌 왕자의 입가로 점차 짙은 미소가 번졌다.
그는 이미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한데 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푹!
푸푸푸푸푸푸푹!!
“크악!”
“허윽!”
그리드를 엄호하는 레이단군의 화살세례.
왕실군을 집요하게 노리는 그 화살세례의 위력들이 어째 갈수록 강해지는 것 같다?
‘착각이겠지.’
최초에는 그렇게 여겼다.
하지만 곧 깨닫게 됐다.
‘착각 따위가 아니다!’
푸푸푸푸푸푹!!
“끄아아악!!”
화살에 당하는 사상자의 발생 속도가 점차 더 빨라지고 있었다.
레이단군의 공격력이 처음과 비교하면 월등히 상승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이게 무슨…!’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불안해하는 렌에게 척슬리가 쐐기를 박았다.
“적군의 활솜씨가 실시간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아군이 입는 피해를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그리드 공작의 견제는 기사단에게만 맡기시고 병사들은 화살의 방어에 주력시키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소!”
1명의 기사를 육성하는 일은 1,000명의 병사를 육성하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렵다.
렌 왕자는 기사단의 희생을 최소화시키고 싶었다. 그리드의 발목을 붙잡는 역할은 병사들이 해줌이 옳다고 보았다.
‘어차피 조금만 더 견디면 된다!’
정말로 머지않았다.
이제 곧 별동대가 나타나 저 멀리서 활을 쏴대고 있는 적군의 후위를 급습할 것이었다.
한데!
“왕자전하! 별동대의 도착 예정 시간이 훌쩍 초과하였습니다!”
“…?”
들려오는 비보에 퍼뜩 정신을 차린 렌 왕자가 하늘을 보았다.
어느덧 해가 떨어지기 직전이다.
렌 왕자의 계획대로라면, 휴렌트의 별동대가 진즉에 도착하여 적을 박살내놓고 있어야할 시간이었다.
한데 왜?
‘별동대가 왜 여직 도착을 않는 거지?’
휴렌트는 척슬리에 필적하는 강자다.
휴렌트가 이끄는 2천 별동대가 고작 몬스터들 따위에게 발목을 붙잡혔을 리 만무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던 렌 왕자가 두 눈을 부릅떴다.
‘설마!’
그리드가 별동대의 존재를 간파하고 있었다면?
‘별동대의 진로에 복병이라도 대기시켜놓은 건가!!’
그리드!
정식 교육도 받지 못한 천민 출신 주제에 전장의 흐름을 간파하는가!
‘네놈은 전략에도 타고난 재능을 갖춘 것이냐!!’
설마 별동대의 존재를 눈치 채고 복병을 대기시켜놨을 줄이야! 그저 놀랍고 또 놀라울 따름이다.
질색하는 렌 왕자에게 또 다른 비보가 전달 됐다.
“왕자전하! 은룡대를 감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뭐, 뭐라!!”
강제로 육성시킨 은룡대원들의 신체에는 마력 탐지기를 내장시켜놨다.
언제 세뇌가 풀려 배반할지 모를 일이었으므로 철저히 감시, 관리하려는 용도였다.
그들을 감지할 수 없다?
이는 곧 은룡대원들의 죽음을 뜻했다.
‘어떻게?’
렌 왕자는 은룡대의 실력을 100퍼센트 신뢰하고 있었다. 대륙 최강의 어쌔신 집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정도였다.
그들이 고작 여자 하나 납치하는 임무를 실패하는 것으로 모자라 전멸당한다고?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일이다.
‘공작부인 곁을 그리드와 필적하는 강자가 지키고 있지 않는 이상 은룡대가 임무에 실패할 가능성은 없… 헉!’
설마 공작부인의 호위 중에는 그리드와 필적하는 강자가 있는 건가?
라인하르트 골렘전 당시 그리드를 보좌하며 활약했던 템빨단원들.
그들의 존재를 상기한 렌 왕자가 고개를 저었다.
‘당시의 그들 실력을 고려해보면 은룡대가 능히 감당할 수 있을 터인데?’
그리드!
‘네놈 대체 무슨 요술을…!’
극도의 혼란에 침범당하기 시작하는 렌 왕자에게 척슬리가 소리쳤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사태가 심상찮습니다! 여기서는 태세를 바꿈이 옳을 것입니다!”
“어, 어찌. 어찌 하면 좋겠소?”
“시간을 끄는 게 무의미해진 이상!”
척슬리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전력을 쏟아 그리드 공작을 척살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그 외침이 신호였다.
기사단장 척슬리와 부단장 앙드.
두 명의 절대적인 실력자를 비롯한 왕실 기사단 50명과 수천 병사들이 일제히 그리드를 향해서 쇄도했다. 전력 손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총공세였다.
뿌옇게 일어나는 흙먼지가 그리드의 사방을 침식시켰다.
***
‘더럽게 힘들다.’
왕실군 병사들의 평균 레벨은 130에 불과했다.
비단 그리드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하이랭커들은 왕실군 병사들을 홀로 도륙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왕실군 병사들을 해치면 안 되는 입장이었다.
경험치를 레이단의 병사들에게 양보해야하는 의무가 있었다.
그게 힘들었다.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것!
힘 조절을 해야 하니 심력이 크게 소모됐고 이는 빠른 스태미나 하나를 유발시켰다.
‘애초에 숫자도 너무 많아.’
5천이라는 숫자.
직접 마주하고 보니 한도 끝도 없다.
레이단의 병사들이 족히 수백의 적을 활로 쏴죽였으나 보기에는 변하는 게 없었다.
10명의 병사를 반 죽여 놓고 고개를 돌려 보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병사들이 멀쩡한 모습으로 또 버티고 서있었다.
사방팔방으로부터 날아오는 공격들?
갓 핸드가 아니었다면 벌써 몇 차례나 허용했을 터다.
‘전쟁이라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군.’
두 번 다시는 이런 개고생하지 않도록, 어서 레이단의 군력을 발전시켜야겠다는 의욕이 들끓는다.
슬슬 거친 호흡을 뱉기 시작하는 그리드의 사방으로 뿌연 흙먼지가 일어났다.
“그리드 공작을 쳐라!”
“……!”
그리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대체 무슨 꿍꿍이 속인지, 여태껏 왕자의 곁을 지키며 대기나 하고 있던 척슬리와 기사들.
그들이 일제히 덤벼오는 게 아닌가? 방어적인 진형을 구축하고 있던 병사들 또한 창칼을 앞세워 달려왔다.
“좀 위험한가?”
다구리엔 장사 없다는 불변의 법칙이 그리드의 뇌리를 관통했고 라우엘의 귓속말이 들려왔다.
-힘의 봉인을 푸시죠.
중2병 같은 대사에 그리드는 닭살이 돋았다. 오글거려서 몸을 비비 꼬는 그에게 라우엘이 재촉했다.
-병사들에게 어뷰징해줄 만한 여유, 더 이상 없잖습니까? 과한 욕심은 독이 될 겁니다. 병사들은 제가 알아서 잘 통솔하도록 할테니 당신은 미쳐 날뛰도록 하세요.
-그래, 알았다.
처억!
여유를 부릴 틈이 없다.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검무를 펼치기에 적합한 자세를 취하는 그때였다.
“그리드 공작각하!”
라덴과 북부군이 달려와 그리드를 호위하고 섰다.
“이 이상은 무리십니다! 여긴 제게 맡기시고 어서 피하십시오!”
“…너.”
라덴의 표정은 비장했다.
언뜻 봐도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리드는 스테임 후작이 어째서 라덴을 높이 평가했던 것인지, 그 이유를 절실히 깨닫게 됐다.
‘충성심이 쥬드급이군.’
아니, 굳이 따지고 보면 쥬드 이상이다.
쥬드야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에 목숨을 아끼지 않는 반면 라덴은 정상적인 사고회로를 가졌으면서도 목숨을 희생할 각오를 다졌으니까.
‘여기에 실력까지 갖추면 금상첨화일 텐데.’
라덴의 솜씨를 모르는 그리드가 끝까지 오해하며 아쉬워하는 그때, 라덴은 어느덧 직면해온 척슬리를 상대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 뒤로는 가지 못합니다!”
“애송이! 길을 열어라!”
라덴의 검과 척슬리의 검이 허공에서 얽히기 직전이었다.
“몸 사려.”
그리드가 라덴의 어깨를 붙잡아 끌어오더니 뒤로 자빠뜨렸다.
덕분에 라덴은 척슬리의 공격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지만 그 대신 그리드가 곤경에 빠졌다.
척슬리의 공격을 필두로 수십 기사들의 창칼이 모조리 그리드에게 꽂혔다.
“그리드 공작각하!!”
질색한 라덴이 다급히 외쳤다.
그는 제아무리 그리드일지라도 수십 기사를 홀로 상대하는 건 결코 불가능하리라 보고 있었다.
그리드를 철저히 비호하던 4개의 황금 손들조차 병사들을 상대하느라 무력해진 상태였으니 더욱 그랬다.
애절하게도 외치는 라덴이 그리드는 썩 가상했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귀여운 놈.”
“…?”
이 상황에 웃어?
라덴은 그리드가 정신이 나간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이를 악무는 그의 눈앞으로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파그마의 검무, 제(制).”
실로 위압적인 춤사위였다.
발이 푹푹 빠지는 사막의 모래 위를 힘차게 밟아나가며 검무를 펼치는 그리드의 모습은 군신의 풍모를 연상하게 만들었다.
쩌어엉-!
찰랑이는 흑발 사이로 날카로운 눈을 빛내는 그리드의 주변 기류가 무겁게 억눌렸고,
“으음…!”
오로지 그리드를 노리고 덤벼오던 기사들과 병사들이 모조리 기세를 잃고 뒷걸음쳤다.
단 1명.
척슬리만이 육신과 마음을 억누르는 기파를 극복하고 그리드에게 검을 찌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검, 그리드에게 닿지 못했다.
파앗-!
그리드의 등 뒤로부터 솟구친 인영.
그리드와 꼭 닮은 모습을 한 그것이 날아가 척슬리의 검을 방어한 까닭이었다.
그리드의 모습을 복제한 도플갱어 랜디의 활약이었다.
“분신술…!”
척슬리와 기사들이 동요를 금치 못했다.
그들의 상식에서 분신술이란 단순한 허상으로 눈속임에 불과했던 반면 그리드의 분신술은 명확한 실체를 갖고 있었다. 마치 또 하나의 그리드처럼 물리력을 행사했다.
“파그마의 후예! 검사이자 대장장이여야 할 당신이 어찌 이런 기술을!”
혼란스러워하며 외치는 척슬리에게 그리드가 콧방귀 뀌었다.
“펫빨이다.”
“펫빨?”
이건 또 무슨 전문용어지?
천민 출신 주제에 자꾸만 고급진 용어를 구사하는 그리드 탓에 머리가 복잡해지는 척슬리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리드의 능력치를 30퍼센트 복제한 도플갱어 랜디를 검술로 압도하는 위용은 역시 검호다웠다.
하지만 그는 언제까지고 활약할 수 없었다.
“와룡의 기지개.”
기공사 3차 전직 클래스 중 하나인 <흐름의 주인>.
단일 전투 능력은 상대적으로 뒤떨어지나 기후와 지형에 변화를 주는, 그야말로 전쟁을 위해서 존재하는 클래스다.
오로지 그리드의 책사로서 역할을 다하고자 흐름의 주인으로 전직한 라우엘이 긴 시간에 걸쳐 캐스팅해놓고 있던 스킬을 전개시켰고 그 여파는 어마무시했다.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
사막이 요동쳤다.
지면 깊은 곳에서부터 격동하기 시작한 기운이 일대에 지진을 일으켰고 이에 모래의 파도와 폭포가 사방팔방으로 쏟아지며 왕실군을 집어삼켰다.
“흑화.”
쿠와아아아아아아앙!!
달과 별이 뜨지 않은 밤하늘보다 더욱 더 짙은 칠흑.
그것이 혼돈의 중심에 선 그리드로부터 방출되며 왕실군에 재앙을 선사했다.
파그마의 검무 파(派), 연(聯), 살(殺), 초(超) 등.
힘을 안배하지 않고 모든 것을 쏟아내는 그리드와 그를 보좌하는 라우엘, 북부군, 레이단군의 활약 덕분에 전쟁은 빠르게 종식됐다.
전장 한복판에 선 북부군은 커다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으나 레이단군은 별 달리 피해도 입지 않고 레벨만 잔뜩 올렸으니 엄청난 성과였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승리였다.
하지만 아스모펠은 작금의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했다.
“제발 제게도 활약할 기회를…”
나도 주군의 눈에 띄고 싶다.
간절히 바라는 아스모펠에게 그리드의 외침이 들려왔다.
“아스모펠! 병사들과 함께 전리품을 회수하라!”
“…예.”
이번에도 이런 역할인가.
한때 사하란 제국의 양대 기둥 중 하나로 손꼽혔던 아스모펠.
피아로가 인정하는 최강의 실력자가 흘리는 눈물이 전장을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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