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7권 - 14화
푹!
‘이제 곧!’
푹푹!
‘이제 곧이다!’
한 청년이 땅을 파고 있었다.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와 흙 묻은 행색조차도 청년의 타고난 미모와 기품을 퇴색시키지 못했다.
‘머지않았어!’
푹푹! 푹!
비장한 표정의 청년.
호미로 연신 땅을 파는 그의 귓가로 고대하고 또 고대하던 외침이 들려왔다.
“새참 시간이다!!”
“……!”
청년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몸을 벌떡 일으킨 그가 마치 부모의 원수를 눈앞에 둔 마법사처럼 빠르게 마법을 전개시켰다.
“헤이스트!”
헤이스트.
대상의 속도를 최소 1.2배에서 최대 2.5배까지 올려주는 마법이다.
광범위하게 활용할 수 있는 유용한 마법이니만큼 익히기가 쉽지 않았고, 설령 익힌다할지라도 시전자의 역량에 따라서 성능 차이가 컸다.
헤이스트를 통해서 속도를 2배 이상 상승시킬 수 있는 마법사?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100명이 채 되지 않을 터였다.
한데!
쌔앵~!!
쭈그리고 앉아 호미질이나 하고 있던 흙투성이 청년이 전개한 헤이스트가 경이적인 기능을 발휘했다.
속도를 무려 2배나 높였으니 그 속도를 범인은 감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저 치사한 양반이…!”
“오늘도 혼자서 감자를 독차지하려고!”
농민들이 분개했다.
헤이스트를 사용한 청년, 블란드.
그가 매번 새참 시간 때마다 마법이라는 반칙을 사용해 혼자 더 많은 감자를 차지하였으니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새참은 사이좋게 나눠 먹으라는 피아로님의 말씀을 또 잊은 겁니까!”
“피아로님께 이를 겁니다!!”
농민들이 다섯 살 먹은 애들까지도 치를 떤다는 이르기 신공을 발휘하였다.
그에 멈칫하는가 싶었던 블란드가 이내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나는 먹어야만 한다!’
백작.
그것도 대륙 10대 마법사인 아슈르 백작의 아들로서 풍족한 삶을 영위했던 블란드!
그에게 있어서 감자란, 아사 직전의 천민들이나 억지로 먹는 돼지 사료에 불과했었다.
굳이 감자를 먹어본 바 없었고, 늘 감자보다 영양가 높고 맛도 좋은 고급 식재료만을 섭취했었다.
하지만 먹을거리라고는 쥐뿔도 없는 레이단에 볼모로 잡혀온 이후.
블란드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 감자를 먹게 되었다.
그리고 감격했다.
포슬포슬한 식감과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고 순식간에 포만감이 느껴졌으니 실로 놀라웠다.
특히 레인보우 포테이토가 천하의 진미였다.
하나의 감자에서 일곱 가지 맛을 맛볼 수 있었으니 신통방통했다.
볼모로 잡혀온 것만으로도 서러운 상황에 굶어죽을 위기까지 처했다가 먹게 된 감자.
블란드에게 있어서 그것은 그 어떤 신의 축복보다 더 성스러운 것이었다. 온갖 서러움과 불안감을 오로지 그것 덕분에 떨쳐내고 이겨낼 수 있었다.
이제 풍족해진 레이단에 먹거리는 많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블란드는 감자가 가장 좋았다.
***
“오늘도 한 판 다 가져가실 건가요?”
광활한 논밭을 가로질러 달려온 블란드에게 아낙들이 물었다.
블란드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헐…”
아낙들은 애처로울 따름이었다.
눈앞의 아름다운 청년.
높은 집안의 귀한 자식이라 들었다. 한데 그리드 공작각하께 당최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건지 노예 생활 중이다.
매일 종일 밭일을 하였고 밤에는 피아로님께 따로 끌려가서 온갖 구타를 당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청년이 겪고 있을 노예 생활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할 게 분명했다.
매일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울 터였다.
‘스트레스를 먹는 거로나마 해소하려는 거겠지…’
‘잘생긴 사내가 딱하기도 하지.’
눈물을 훔친 아낙들이 블란드에게 소쿠리를 건넸다.
소쿠리 속에는 구운 감자 10개와 삶은 감자 10개가 세트로 들어있었다.
“아시다시피 본래 한 사람당 지급 되는 감자는 한 개 뿐이지만…”
“젊은 총각이 늘 고생하는 걸 알고 있으니까 다 드릴게요.”
“부디 이거 먹고 힘내요!”
‘천민 주제에 나를 동정하다니.’
독보적인 혈통을 지닌 블란드는 왕국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인물이다.
그의 삶에서 천민과 엮일 기회는 흔치 않았고 그에게 있어서 천민이란 딱히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레이단에서 볼모 생활을 하는 동안 천민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자기들 본인부터가 힘들 게 사는 주제에 남부터 챙기다니. 쓸데없는 정이 너무 많아.’
가소롭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갸륵하다.
감자가 한가득 들어있는 소쿠리를 건네받은 블란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남 걱정하고 챙겨줄 시간에 본인들 간수나 잘해. 혈통이 나빠서 타고난 체력도 약한 주제에 무리하다가 병 걸리지 말고 일도 좀 쉬어가면서 하고. 하여튼 괜히 민폐 끼치지 말라는 뜻이다.”
블란드의 화법은 듣는 이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낙들은 그저 좋았다.
잘생긴 청년이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우리를 걱정해주는 모습이 썩 귀여웠다.
“감자… 본래는 돼지들이나 먹어야할 저급한 음식이지만 어쨌든 성의를 봐서라도 잘 먹어주마.”
흥! 콧방귀 뀐 블란드가 소쿠리를 가슴에 품었다. 말하는 투와 달리 감자를 무척이나 소중히 다루는 모습이었다.
그가 자리를 떠난 이후.
뒤늦게 도착한 농민들이 마구 성을 냈다.
“댁이 한 판 다 가져가면!”
“우리 중 몇 명은 배불리 못 먹을 수도 있잖아!”
“에라이, 빌어먹을 거지같은 양반아!”
‘시끄럽긴.’
고작 먹을 것 때문에 저토록 흥분해서는 뛰어다니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니?
역시 천민답게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혀를 찬 블란드가 한적한 장소로 이동했다.
북쪽 외성벽 근처였다.
자리를 깔고 앉아 감자를 크게 베어 먹던 그의 눈빛이 차츰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저건 웬 쥐새끼들이지.’
수상한 놈들이 높디높은 레이단 외성벽 한쪽에 들러붙어 있었다.
숫자는 정확히 20.
신중하게 움직여 성벽을 차츰차츰 올라가는 중이다.
기척을 완벽하게 지웠고, 입은 옷 색깔은 성벽의 색깔과 닮아 있었으니 은밀함이 대단했다.
레이단에 오기 전의 블란드였다면 저들을 코앞에서 보더라도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을 수준이었다.
“흐음.”
반나절 전.
아스모펠이 이끈 군대가 흉흉한 기세로 출진한다 싶더니 뭔가 큰 사달이 발생하고 있는 중 같다.
“어찌됐든 나와는 관계없다.”
성벽을 타고 오른 저 20명의 어쌔신들이 레이단 잠입에 성공하여 어떤 짓을 벌일지라도 블란드는 상관없었다.
설령 레이단 내부에서 살육이 벌어지고 레이단이 불바다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블란드가 손해 볼 일은 하등 없었다.
사실 입장을 놓고 따져보면 박수라도 치며 기뻐해야할 것이었다.
“근데 난 왜…”
왜 이렇게 마음에 안 들지?
삶은 감자 1개를 통째로 입속에 쑤셔 넣은 블란드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 맛있는 감자, 나와 함께 고생한 농민들이 수확했고 나를 걱정해주는 아낙들이 조리해온 것이다.
혹 그들이 해를 입는다고 생각해보면.
“기분 나쁘다.”
또한 무엇보다도.
“…아이린.”
현재 레이단에는 내가 한때 사랑했던 여인이 있다.
이제는 그녀에게 아무런 미련도 남아있지 않지만. 이미 다른 사내의 여자가 된 그녀이지만.
‘행복하길 바란다.’
3개째 감자를 입에 넣는 시간 동안 블란드의 마음은 정해졌다.
“파이어 애로우.”
화르륵!!
어느새 성벽 위까지 오른 20명의 어쌔신.
그들을 노리고 8발의 불화살이 쏘아졌다.
한데 그 기세가 일반적인 파이어 애로우와는 차원이 달랐다.
당연했다.
벌써 16개월 이상 매일 같이 밭일을 하면서 피아로에게 단련을 받아온 블란드다.
그는 논밭… 아니, 자연의 마나를 빌려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있었다.
피아로가 전설이 되고 습득한 자연경의 하위호환이라고 보면 되었다.
***
다루카.
모든 게 베일에 휩싸인 전설적 어쌔신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카심과 도란이 다루카의 제자라는 추측이 난무할 정도로 다루카에 대한 세간의 환상은 컸다.
그리고 10년 전 어느 날.
에트날 왕실은 다루카의 비급 중 하나를 우연치 않게 얻게 되었다.
그때부터 은룡대가 육성됐다.
왕국 각지로부터 5천 명의 고아들을 데려와 어쌔신으로 단련시키고 다루카의 비급을 익히게끔 만들었다.
물론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5천 명의 아이 중 훈련을 견디고 살아남아 다루카의 비급까지 익힌 인원은 고작 40명밖에 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 40명 중 다루카의 비급을 통달한 인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죄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조금밖에 익히지 못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능력을 발휘했다.
은룡대 발족 이후 1년.
은룡대의 임무 성공률은 무려 100퍼센트를 자랑하고 있었다.
렌 왕자는 자신했다.
은룡대의 힘이라면, 우리 에트날 왕국이 언젠가 저 사하란 제국마저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고 말이다.
그때에 가서는 국기에 그려진 실버 드래곤이 다시금 두 날개를 활짝 펼칠 수 있으리라!
‘당최 이게 무슨 일이지.’
은룡대원 20명은 드물게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레이단 외성벽 바깥으로 사방팔방 펼쳐진 논밭.
레이단에 진입하기 위해선 이곳을 꼭 지나야만 했건만, 어째 농민들의 상태가 이상했다.
‘왜 농부가 아니라 고수 같지?’
광활한 논밭 곳곳에 흩어진 농민들이 수십 명씩 무리를 이뤄서 밭일을 하고 있었다.
한데 그들의 움직임이 하나 같이 예사롭지 않았다.
낫을 휘두르고 호미를 찍는 기술이 흡사 기사의 검술을 연상하게 만들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특히 극소수의 농부들은 은룡대원들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만큼 뛰어난 기파를 발산하고 있었다. 일국을 대표할만한 실력자들 같아 보였다.
‘이게 무슨 영문이야?’
은룡대원들이 익힌 다루카술 중에는 <무심법>이라는 게 있다.
단 5성의 단계에만 올라도 명경지수의 경지에 오르게 만들어 주는 호흡법이었다.
그리고 이번 임무에 투입 된 은룡대원 20명은 전원 무심법 5성의 경지에 오른 정예들이었다. 설사 죽음을 앞두게 될지라도 동요를 보이지 않는 고수들이라는 뜻이다.
한데 고작 농민들이 이 고수들의 마음을 동요하게 만들고 있었다.
‘보다 신중하게 움직임이 좋겠다.’
판단하고 마음을 바로잡은 은룡대원들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는 논밭을 이동했다. 혹 농민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헉헉… 더럽게 힘들군.’
은룡대원들이 레이단의 외성벽에 도달하기 위해 소모한 시간과 체력은 예정을 가뿐히 초과하게 되었다.
본래라면 지금쯤 공작부인과 접촉했어야할 자신들이 아직도 외성벽을 넘지 못하다니?
은룡대원들은 심히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정예다.
‘동요를 지워라.’
무심법의 묘리를 살려 마음을 추스른 은룡대원들이 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다루카의 옷>을 전개했다.
숨소리를 완전히 죽이고 마치 카멜레온처럼 보호색을 펼침으로서 은밀함의 궁극에 오를 수 있는 기술이었다.
스슥.
스스슥.
설령 하늘 위 신들조차도 지금의 우리를 엿볼 순 없을 터!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고 외성벽을 오르는 은룡대원들의 등 뒤로 파이어 애로우가 날아왔다.
“허억!”
어떻게 우리를 감지한 거지?
산개하면서 마법을 피한 은룡대원들이 다급히 주변을 살폈다.
마법이 날아온 방향에 한 사내가 보였다.
감자를 씹어 먹고 있는 농부였다.
햇볕에 피부가 잔뜩 그을려서는 흙투성이가 된 행색을 보면 진짜 영락없는 촌놈이었다. 천민답지 않은 기상이 엿보이긴 했으나 어쨌든 농부가 확실했다.
‘한데 마법을 썼다고?’
그것도 우리가 미처 완전히 피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강력한 마법을!
‘이 동네 농부들은 죄다 미친 건가!’
은룡대원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심법 5성의 경지가 무색하게도 또 다시 동요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해선 안 된다. 무시하고 임무를 속행하는 게 어떨까?’
‘안 되지. 목격자는 즉시 척결해야지만 은밀하게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
은룡대의 판단과 행동은 빠르다.
성벽 위 그들이 지상에서 감자나 씹어 먹고 있는 마법사인지 농부인지 모를 놈에게 표창을 투척했다.
마법사의 방어능력은 무척이나 취약한 바.
우리들의 투척술이라면 제아무리 고강한 마법사일지라도 비교적 쉬이 제압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마법사의 반격?
걱정할 필요 없다.
캐스팅할 시간조차 주지 않으면 되는 거니까!
“헉?”
자신만만하던 은룡대원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법사인지 농부인지 모를 놈.
한 손에는 실드를 펼치고 다른 한 손에는 검을 뽑아 쥐더니 표창들을 모조리 쳐내는 것이 아닌가?
‘저놈의 정체가 당최 뭐냐!’
농부냐, 마법사냐, 검사냐.
좀 확실하게 해줬으면 좋겠다.
어이없어하는 은룡대원들에게 블란드가 <파이어 블래스트>를 전개하였다.
실드를 펼치고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마법을 사용한다?
“더블 캐스팅이라고!”
은룡대원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5성에 이른 무심법이 산산이 깨어진 것은 오래 된 일이었다.
같은 시각.
“다시 던져라.”
그림자의 왕 카심.
무수한 인명을 거둬온 최강최악의 어쌔신이 갓난아기와 시간을 보내느라 바빴다.
진중한 표정으로 아기에게 자꾸만 무엇인가를 강요했다.
“아부! 아부부부!!”
아빠를 닮아서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아기가 뭐라고 막 떠들어댔다.
이번엔 기필코 해내리라고 말하는 듯한 뉘앙스였다.
그리고…
퍽!
갓난아기 로드가 집어던진 블록이 3미터 거리 바깥의 인형을 맞추고 떨어뜨렸다.
단 이틀 만에 이룬 성과였다.
카심의 예상보다 보름은 더 빠른 성장속도였다.
감탄을 넘어서 경악한 카심은 확신했다.
‘이 아이라면…! 필시 이 아이라면 스승님의 모든 기술을 극성까지 익힐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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